▲ 살인 혐의로 교도소에 들어간 김 아무개 씨가 식물인간인 것처럼 속여 형 집행을 피해오다가 20년 만에 발각됐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일요신문 DB |
그런데 지난 20년간 전문배우도 어렵다는 이 ‘식물인간’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사람들을 속여 온 황당한 범법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연기의 달인’인 그에게도 임자는 있었다. 하필이면 대한민국에 2명밖에 없다는 의사 출신 검사가 그에게 배정됐던 것. 결국 그의 연기생활 20년은 최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 1991년, 김 아무개 씨(58)는 아내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자세한 내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아내가 김 씨에게 이혼을 요구했다고 한다. 김 씨는 아내의 이혼 요구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결국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흉기로 아내를 찔렀고, 아내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결국 김 씨는 당시 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1심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범행이 우발적이었고 어린 딸 둘을 부양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 그나마 형량이 줄었던 것이었다. 김 씨는 곧바로 천안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런데 김 씨가 수감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교도소 내에서 졸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기자와 만난 대전지검 천안지청 김호철 지청장은 “20년이 넘은 일이라 지금으로서 정확한 상황은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당시 김 씨는 수감생활을 하기 전, 분쇄골절을 동반한 심각한 교통사고를 입은 바 있었다. 아마도 당시 교도소와 병원에서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파악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김 씨는 수감생활 4개월 만에 누운 채로 교도소에서 나오게 됐다. 드라마틱한 일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교도소에서 식물인간으로 실려 나온 김 씨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이때부터 김 씨는 철저한 이중생활에 돌입한다.
김 지청장은 “김 씨의 지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본명과 함께 또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사실상의 신분세탁을 통해 또 다른 삶을 영위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재혼을 통해 새로운 가정까지 꾸렸다”라고 설명했다.
연장검사 당시 형 집행 담당검사들이 매번 말을 걸었지만 그는 언제나 퀭한 표정에 묵묵부답이었다. 연장검사는 의사를 동반하지 않은 채, 의학적 비전문가인 검사들이 관장하기 때문에 상태 확인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연장검사에 나선 검사들은 김 씨의 혼신을 다한 연기에 감쪽같이 속고 말았다. 김 씨는 그렇게 20년 넘게 이중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올해 2월, 우리나라에서 단 2명뿐이라는 의사 출신 송한섭 검사(32)가 천안지청으로 부임한 것이다. 송 검사는 공교롭게도 김 씨의 형 집행 담당검사로 지명됐다. 그를 잡을 저승사자로 나서게 됐던 셈이다.
드디어 김 씨는 최근에 있었던 연장검사에서 새로 부임한 송 검사와 마주 하게 된다. 김 씨는 송 검사의 의사 이력을 전혀 모른 상태였고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식물인간 연기에 나섰다.
기자와 만난 송 검사는 “검사 당시 김 씨는 수염을 더부룩하게 한 채 침상에 누워있었다. 뒤에는 약봉지가 어지럽혀져 있었고 산소 호흡기까지 마련돼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딸이 간병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완벽한 준비였다”라고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김 씨로서는 운이 나빠도 억세게 나쁜 꼴이 됐다. 의대 졸업은 물론 인턴까지 마친 송 검사의 예리한 눈에 몇 가지 수상한 점이 포착된 것이다. 송 검사는 “처음부터 이상했다. 20년 전, 재판첨부기록을 봤는데 식물인간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우선 식물인간은 대뇌기능에 이상이 있는데 김 씨는 그렇지 않았다. 또 보호자 동의하에 김 씨를 탈의한 채, 몸 상태를 확인했는데 식물인간한테서 나타나는 욕창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고 근육상태도 발달됐었다. 더군다나 보호자로 동행한 딸의 진술이 계속 엇갈렸다. 식물인간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라고 설명했다. 말 그대로 딱 걸린 셈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송 검사의 호통이 시작됐다. 송 검사는 김 씨를 향해 “어제 많이 잔 거 다 안다. 아니라는 거 다 알고 있으니 어서 일어나라!”며 다그쳤다. 김 씨는 한동안 말 없이 누워있었지만 매서운 송 검사의 호통과 추궁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이실직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검찰은 이후 조사과정을 통해 김 씨로부터 자백을 받아냈다.
김 지청장은 “현재 김 씨는 남은 형량을 살기위해 교도소로 이송된 상태다. 20년간 검찰을 속여 온 그의 공무집행방해 행위에 대해서는 후에 적용혐의에 대해 고민한 뒤 처리할 계획이다. 김 씨를 도와 온 딸 등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밝혔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의사 출신 한국에 단 두 명
이번 사건의 주역으로 떠오른 송한섭 검사(사법연수원 39기)는 그의 독특한 이력 덕에 지난 2010년 검사 부임초기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는 검사 부임 이전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인턴 과정까지 마친 의사 출신이다.
그는 자신의 뜻을 위해 가족들의 만류와 안정된 직장을 뒤로한 채, 군 복무와 함께 사법시험공부에 돌입했고 결국 지난 2007년 사법시험에 최종합격했다.
이번 사건은 결국 의사 출신이라는 송 검사의 독특한 이력과 주특기가 현장에서 제대로 빛을 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