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 자매 살인사건의 용의자 김홍일이 사건 현장에서 범죄를 재연하고 있다. 뉴시스 |
범행 55일 만에 검거된 울산 자매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홍일이 밝힌 범행 동기다. 교제를 하다가 헤어지는 일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이제는 이별통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무서운 시대가 됐다. 연인의 이별통보에 격분, 끔찍한 보복을 하는 일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복은 폭행·폭언은 기본이고 감금과 협박, 살인미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잖다. 한때는 죽고 못 살 정도로 깊은 정을 나눴던 연인이 졸지에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되는 셈이다. 피해자들의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
생명을 위협받을 정도의 협박에 속앓이만 하는 이들은 나날이 늘어가지만 결별 통보에 앙심을 품은 이들의 광기어린 행동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애인을 상대로 한 살인(미수 포함), 강도, 강간, 방화 등 강력범죄는 신고된 것만 무려 655건이었다. 이성마저 잃어버린 이들의 치정 범죄 행태를 취재했다.
30대 초반의 직장인 정미희 씨(가명·여)는 3개월째 신경정신과에 다니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전문의와의 상담과 불안증에 도움이 되는 치료를 받는 것 외에도 아침 저녁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다. 정 씨가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 이유는 남자친구에게 당한 끔찍한 기억 때문이다.
“집착이 심하긴 했지만 사랑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갈수록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없으면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했어요. 급기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구속하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죠.”
‘악몽’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남자친구는 정 씨의 자취방으로 매일같이 찾아와 물건을 부수는 등 행패를 부렸고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가졌다. 그는 “5년 동안 나를 갖고 놀았냐. 다른 남자 못 만나도록 얼굴에 염산을 뿌려버리고 가족들도 가만 두지 않겠다”며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과 함께 폭력을 휘둘렀다. ‘옛정’을 생각해 고소까지는 하지 못했다는 김 씨는 현재 집을 옮기고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A 씨와 부딪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다.
또 다른 직장인 최지영 씨(가명·여·29) 역시 결혼을 전제로 4년간 사귄 애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가 엄청난 ‘수난’을 당했다. 추억을 위해 찍었던 성관계 동영상은 덫이 되어 돌아왔다. “‘죽여버리겠다’ ‘여자 구실 못하게 만들겠다’는 말은 기본이었다. 직장에 동영상을 뿌리고 낙태 사실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젠 나를 죽이고 감옥 가겠다고 한다. 안 좋은 소문이 날 것이 두려워 다시 만나고는 있는데 하루하루가 지옥 같다.”
위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주변에는 연인에게 이별통보를 한 ‘죄’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이 적잖다. 실제로 유명 익명 게시판에는 이와 관련된 사연 및 상담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용은 상상이상으로 충격적이다. 헤어지자고 하면 부엌칼로 위협을 하거나 자해를 하는 경우, 목을 조르고 동반자살을 강요하는 경우, 온몸을 묶어두고 가학적 성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혈서를 쓰게 하거나 강제로 성관계 동영상을 찍는 경우도 있었다. 사흘 밤낮을 지방의 모텔로 끌려 다녔다는 충격적인 사연도 있었다.
도저히 연인간의 일로 볼 수 없는 엽기적인 내용 일색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린다는 사실이었다. 피해자들은 “신고해봤자 처벌될 가능성도 희박하고 강력히 처벌되지도 않는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연인간 이뤄진 성관계 및 감금의 강제성을 입증하기가 애매한 데다가 단순 협박 혐의 정도로는 확실한 처벌을 기대할 수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 피해자는 “경찰이 ‘반 동거했으면서 무슨 감금이냐’ ‘평소에도 모텔에 자주 드나들었던데 납치라 할 수 있나’ ‘강제로 성관계를 한 증거가 있느냐’고 할 땐 눈앞이 캄캄했다. 결국 남자친구는 풀려났고 반미치광이가 돼서 날 찾아왔다. ‘네 가족 모두를 죽여버리겠다’고 날뛰는데 무조건 잘못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여성은 “재물손괴, 무단침입, 강간치상, 폭행 등으로 집어넣으려 했는데 ‘몇 년 살고 나와서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하더라. 너무 겁이 나서 신고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또 범죄가 성립된다 해도 주변에 소문이 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피해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문제는 얼마 전 발생한 ‘울산 자매 살인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집착 및 광기어린 분노가 끔찍한 사건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9월 16일 성남에서는 애인과 그 어머니를 잔혹하게 살해한 박 아무개 씨(24)가 검거됐다. 애인의 어머니가 평소 교제를 반대한 데다가 갑작스레 애인으로부터 결별을 통보받았다는 이유였다. 같은 날 전남 여수에서는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의 집에 불을 지른 40대 남성이 검거됐다.
8월 7일 중앙고속도로 가산나들목 인근에서는 한 여성이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질주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놀랍게도 여성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사람은 4세 연하의 남자친구(27)였다. 경찰 조사 결과 그는 “싫증났다. 그만 만나자”는 말에 격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은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남성이 그토록 사랑했다던 여성은 병원으로 옮겨진 지 3시간 만에 사망했다.
애인에게 무모한 집착을 보인 유부남도 있다. 강원도 양구에서는 6개월 간 사귄 띠 동갑 여자친구가 이별을 통보하자 자신의 승용차로 납치해 감금한 박 아무개 씨(34)가 체포됐다.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엽기행각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5월 전남 담양에서는 헤어진 동거녀를 무참히 때려 사망케 한 72세의 노인이 검거됐다. 또 7월 30일 인천에서는 이별을 요구하는 애인을 살해한 50대 남성도 체포됐다.
헤어진 이성에 대한 보복은 남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9월 4일 대구 남부경찰서는 이별을 요구한 남자친구에게 600통 이상의 협박성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폭행까지 한 여성(32)을 입건했다. 그녀는 “낙태했다. 위자료 5000만 원을 내놔라”는 등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가하면 남성의 집과 회사에 찾아가 행패를 부리고 폭력까지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애인을 잊지 못한 나머지 아들까지 동원해 스토킹을 일삼은 엽기 여성도 있었다. 8월 23일 전주완산경찰서는 5년간 사귄 남성이 이별을 통보하자 자신의 아들을 시켜 남성과 외도 의심 상대의 차량에 GPS를 설치하고 미행을 일삼은 40대 여성을 입건했다.
이별통보에 격분, 애인의 성행위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한 나쁜 남자도 있다. 7월 19일 충남지방경찰청에는 헤어진 내연녀의 알몸 사진을 유포한 남성이, 7월 20일 인천삼산경찰서에는 애인의 성행위 동영상을 휴대전화로 전송한 남성이 구속됐다.
일그러진 사랑 앞에서는 국적도 상관없었다. 동거녀를 살해하려한 중국인, “성관계를 거부하면 알몸 동영상과 사진을 주변사람들과 인터넷에 뿌리겠다”고 협박한 미군도 있었다. 또 7월 23일 대전 대덕경찰서에는 헤어진 애인의 남자친구까지 살해하려한 30대 남성이 구속됐다.
일련의 사건과 관련 전문가들은 “비뚤어진 사랑과 도를 넘은 집착이 불러온 비극”이라며 “제2의 김홍일은 언제든 출현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삭막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일수록 정을 준 상대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집착을 하게 되며 그것이 상대를 향한 그릇된 소유욕으로 발전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성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우, 평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특히 위험하다.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인해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에 대한 극한의 분노로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이 신경정신과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범죄심리학자는 김홍일이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은둔형 외톨이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백석대 법정경찰학부 김상균 교수는 “치정사건 범죄자들은 이성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이 무척 강한 특징이 있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어린시절 모자간 애착관계가 형성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엄마의 모습을 애인에게 투영시키게 되는데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그녀에게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있다. 여성이 절교를 요구하게 되면 결국 그는 엄마로부터 버림받는 것으로 느끼게 되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살인과 같은 극단적 행위로 나타난다. ‘갖지 못할 바에야 죽여서 완전한 나의 소유로 만든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김 교수는 “김홍일의 경우도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애정관계가 형성되지 못했기에 마음에 드는 여성 앞에서도 소심하게 행동하고 때로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걸지 못한다. 그런데 여성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사랑 앞에서 순진하다’고 생각하고 모성애가 발동되는 것이다. 하지만 남성은 연애과정에서 강한 집착과 의존성을 드러내게 되고 이별을 통보받으면 감춰진 잔혹성이 폭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서대문경찰서 김맹호 경위는 “연인이었다 해도 공권력이 개입할 수 있다. 일이 복잡하게 될까봐 혹은 보복이 두려워 혼자 해결하려하면 절대 안 된다. 참고 피하는 식의 대응은 정말 무서운 사건을 야기할 수 있다. 무조건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