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량함·우편함·환풍기 등 ‘던지기 수법’ 장소로 이용돼…학교·병원·군대·법원도 안전지대 아냐
1월 28일 의정부지법 남양주지원 형사1단독 최치봉 판사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A 씨(59)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개발업체 간부로 알려진 A 씨는 2022년 10월에서 2023년 10월 사이 강원도의 한 아파트 단지 인근에서 수차례에 걸쳐 필로폰을 투약하고 대마초를 흡연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A 씨가 수사 과정에서 밝힌 마약 입수 과정이다. A 씨는 경기 지역의 한 법원 노상에서 필로폰을 구매했다고 진술했으며 대마초는 강원도 춘천시의 한 야산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마약 구매 과정을 감추기 위해 거짓 진술을 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매우 충격적이다.
강원도 야산 어딘가에 대마초가 자라고 있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다는 내용도 놀랍지만 법원 노상에서 필로폰을 구매했다는 대목은 더욱 충격적이다. 재판을 받으러 법원을 오가는 마약사범들이 많아 오히려 법원 노상이 필로폰 판매에선 이제 ‘목 좋은 곳’이 돼 버린 것일까.
마약청정국이던 호시절이 지나고 이제 대한민국은 마약오염국이다. 특히 속칭 ‘던지기 수법’으로 마약 유통이 이뤄지면서 일상 공간 어디서나 마약이 발견되고 있다. ‘던지기 수법’은 일상 공간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 마약을 몰래 숨겨둔 뒤 비대면으로 거래하는 방식이다.
2023년 11월 14일 부산지법 형사5부(장기석 부장판사)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B 씨에게 징역 2년 6월과 추징금 1200만 원을 선고했다. B 씨는 던지기 수법으로 마약을 유통시킨 20대 판매상이다.
B 씨는 대마와 엑스터시 등의 마약류를 던지기 수법으로 판매했는데 건물 외부 화단, 가스 계량기함, 에어컨 실외기, 전봇대 옆 등에 마약을 숨겨둔 뒤 구매자가 현금이나 암호화폐(가상화폐)를 송금하면 그 장소를 알려줘 찾아가게 했다. B 씨 같은 마약 판매상들이 검거될 때마다 던지기 수법에서 활용되는 다양한 공간이 알려져 화제가 되곤 한다. 과거에는 관리가 잘 안 되는 건물의 이곳저곳이 단골 거래 장소였는데 이제는 거의 모든 일상 공간이 마약 유통 경로다.
다세대 주택 수도계량기는 기본이고 아파트 복도의 수도계량기에 마약을 숨기는 일도 많다. 가스계량기도 마찬가지다. 또한 주택가와 아파트 단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의류수거함에 마약을 숨기기도 한다. 병원 화장실, 상가 화장실, 건물 주차장 등은 물론이고 가게 간판 밑도 활용된다. 지하 유리창틀, 우편함, 전기 배선 아래, 손잡이 뒤편 등에 마약을 숨겨 유통하다 적발된 마약 판매상도 있다.
심지어 초등학교 화단 풀숲에 마약을 숨기기도 한다. 2021년 12월 경찰에 체포돼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C 씨는 인터넷 채팅 사이트에서 알게 된 마약 판매자에게 대마를 구매했다. 판매자가 알려준 대마잎을 숨겨준 장소는 초등학교 화단이었다. 자칫 학교에서 놀던 초등학생이 무슨 잎인지도 모르고 대마잎을 주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호텔 침대의 베개 아래가 마약 유통 경로가 된 사례도 있다. 2021년 7월 한 마약 구매자가 경기도 의정부시 소재의 한 호텔 객실을 빌린 뒤 침대에 현금 20만 원을 두고 문을 잠그지 않고 외출했다. 그 사이 판매자가 들어와 베개 아래 있는 현금을 가져가며 그 자리에 다시 마약을 숨겨놓고 나가는 일이 있었다.
이런 상황이 도시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요즘에는 농어촌에도 마약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 6월 인천경찰청 광역수사대는 태국인 총책과 국내 판매책 48명 등 야바 밀수 조직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캡슐형 건강기능식품으로 위장한 야바 1970정을 국제우편을 통해 국내로 들여와 던지기 수법으로 충남 서산·경기 화성·전북 정읍·대구 등지에서 유통시켰다. 비슷한 시기 전남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도 태국인 야바 호남 지역 유통 조직을 일망타진해 야바 1198정을 압수했다고 밝혔다.
이들에게 야바를 구매해 투약한 이들은 대부분 농어촌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태국인 노동자들이다. 농촌 지역 비닐하우스나 숙소 등에서 몰래 투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에도 유통망은 던지기 수법이었다. 도시의 일상 공간뿐 아니라 농어촌의 일상 공간 여기저기에도 야바 등 마약류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비닐하우스에 모여 술을 마시며 야바를 불법 투약한 사례가 잦다. 지금도 인적 드문 농촌의 비닐하우스에서 마약 파티가 자주 열리고 있을 수 있다 .
심지어 군대까지 마약이 침투했다. 2018년부터 2023년 8월까지 군 내에서 검거된 마약 사범은 119명이나 된다. 대표적인 사건은 2022년 12월 수도권의 한 육군 부대에서 액상 대마를 군부대로 몰래 반입해 불법 흡입하다 적발된 병사의 사례다. 당시 상병이던 병사는 액상 대마를 전자담배인 척 속이며 피웠는데 그때마다 말투가 어눌해지고 행동도 부자연스러웠다. 이를 동료 병사들이 제보하면서 불법 마약 투약 사실이 드러났다.
2022년 6월부터 2023년 4월까지 경기 연천군의 한 육군 부대에서 복무한 D 씨가 동료 부대원들과 대마초를 불법 흡연한 사건도 있다. 군부대에 복무하면서 택배를 통해 상습적으로 대마초를 군부대로 반입해 흡연했다는 사실이 전역 이후에 드러난 것.
마약오염국이 된 이후 입영 대상 10대와 20대에서도 마약 사범이 급증하면서 이제 그들이 입대하는 군대도 마약 안전지대가 아니다. 군복무를 하면서도 마약을 끊지 못해 택배 등으로 마약류를 몰래 반입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 이에 병무청은 오는 7월부터 입영 전 검사 대상자 전원을 대상으로 마약 검사를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의 여기저기에 마약이 근접해 있다. 그만큼 마약의 유혹이 강렬해졌지만 누구라도 마약 범죄를 신고해 마약 확산을 막을 수도 있다. 2023년 11월 10일 오후 6시 무렵 E 씨가 대전 동구의 한 주택가 빌라 우편함을 뒤지고 있었다. 이를 본 한 주민이 “남의 집 우편함을 뒤지는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E 씨는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역시나 E 씨는 던지기 수법을 통한 마약 구매자였다. 경찰은 우편함 안쪽에 검은색 테이프로 말려 있는 마약을 발견했는데 필로폰 0.92g, 대략 30여 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이었다.
앞서 언급한 던지기 수법에서 활용되는 다양한 일상 공간 어딘가를 누군가 수상하게 뒤지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면 바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이런 신고는 마약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작지만 큰 실천이 될 수 있다.
길가에 떨어져 있는 지갑을 발견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자칫 점유물무단이탈 횡령죄로 처벌 받을 수 있는데 대형마트나 PC방 등 실내에서 누군가 흘린 지갑을 주워가면 절도죄가 적용될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운이 없으면 마약사범이 될 수도 있다.
2024년 1월 12일 오후 길을 지나던 한 시민이 지갑을 주웠다. 동전지갑이었는데 열어 보니 이상한 가루가 들어 있었고 이를 습득한 시민은 이날 저녁 8시 20분 즈음 ‘마약으로 의심되는 가루가 들어있는 지갑을 주웠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서울 중랑경찰서는 폐쇄회로(CC)TV 등을 통해 한 시간여 만인 9시 20분 즈음 지갑을 흘린 남성과 일행의 신원을 특정해 인근에서 긴급체포했다. 이들이 흘린 지갑 안에 있던 가루는 필로폰이었고 체포 당시 이들의 호주머니 안에서도 마약이 든 봉투가 발견됐다.
이제는 길가에서 주운 지갑 안에서도 마약이 발견되는 세상이다. 그냥 가져갔거나 주웠다가 뭔가 찜찜해 그냥 길가에 두고 오는 경우 자칫 마약 관련 수사를 받게 될 수 있다. 즉각적인 신고가 괜한 오해를 피하고 마약 확산까지 막을 수 있는 최고의 대응이다.
전동선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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