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물’들이 특검에 출두하는 모습. 왼쪽은 지난 5월30일 정몽헌 현 대아산 이사회 회장, 오른쪽은 6월18일 박지원 전 문광부 장관. 이종현 임준선 기자 | ||
기자들을 피해 야밤에 목숨을 걸고 8차선 도로를 횡단한 황당한 사람도 있었고 긴급체포된 피의자를 위해 ‘폭탄주 파티’가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특검에 소환된 ‘거물’들의 조사태도도 각양각색이었다고 한다. 특검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대치동 소환자들의 인물열전’을 펼쳐본다.
‘다음중 가장 순둥이처럼 보이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박지원 ②``이기호 ③``이근영 ④``정몽헌.’
답은 ‘의외로’ 4번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다. 그가 한때 한국의 최대 재벌 총수로서 일반사람들에게 카리스마와 뚝심을 갖춘 ‘회장님’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특검 관계자 A씨는 정몽헌 회장에 대해 “그 사람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곱게 자라서 그런지 순진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진술도 여러 가지 돌려서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A씨는 정 회장의 성격에 대해 “어떤 때는 소심하고 겁쟁이로 비치기도 했다. 사업가 스타일은 아닐 정도로 샌님이었다. 마음이 약하고 순둥이처럼 보여 사업가 기질을 타고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또한 정 회장의 진술태도에 대해선 “거짓말하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에 대한 특검팀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특검 관계자 A씨는 이 전 회장에 대해 “그 사람은 송사를 많이 겪어본 사람이어서 그런지 조사받는 데 달인 같았다. 나중에 재판까지 갈 것을 미리 생각하고 치밀한 계산을 한 뒤 진술했다”고 말했다. 또한 “순간순간 이 전 회장의 진술이 바뀌어 조사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고 밝혔다. 특검의 또 다른 관계자는 “속에 든 게 없이 겉으로만 통이 큰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이에 반해 박지원 전 문화부장관은 대북송금 의혹과 관련해 이미 모든 사실을 인정한 듯 자신의 혐의 사실에 대해 ‘자세하게’ 진술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박 전 장관은 1백50억원 수뢰혐의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부인했다고 한다. 박 전 장관은 이익치 전 회장과의 대질신문에서 “증거를 대라”며 소리를 질러 사무실 밖까지 고성이 오간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특검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박 전 장관은 지난 6월18일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지법으로 가면서 이씨를 “크레디트(신뢰성)가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반면 이 전 회장은 박 전 장관에 대해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코멘트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특검관계자 A씨는 박 전 장관에 대해 “화끈한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주군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것 같아 DJ와 관련한 조사에 대해서는 별 소득이 없었다”고 말했다. 박지원 전 장관은 특검 조사 과정에서 유독 한 수사관계자의 집중 추궁에 고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사관계자 중 누군가가 영장을 청구한 직후 “미안하다”며 양주 폭탄주 3잔을 만들어주자 박 전 장관이 모두 ‘비워버렸다’고 한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의 경우 “마음이 약한 사람처럼 보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진술과정에서는 철저히 ‘자물쇠 작전’을 폈다고 한다. 특검 관계자 A씨는 “아마 전직 국정원장으로서 ‘직무상 기밀누설’을 염려해서인지 진술을 잘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A씨는 “임 전 원장으로부터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해 확실한 ‘키 카드’를 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임 전 원장이 자신의 ‘키 카드’를 어떻게 쓸지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임 전 원장은 처음 소환될 때만 해도 기자들에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소환이 잦아지자 긴장이 풀렸던지 “기자님들, 바이바이” 하며 인사할 정도로 분위기에 적응(?)했다고 한다.
▲ 특검 사무실엔 매일같이 기자들이 북적댔다. | ||
하지만 이 전 수석 경우도 ‘DJ 감싸기’만은 다른 소환자들 못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대북송금 과정을 DJ가 사전에 보고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제가 십자가를 지겠다”며 당당히 맞서기도 했다.
이기호 전 수석과 이근영 전 금융감독위원장은 모두 특검에 소환된 뒤 긴급체포된 바 있다. 이들의 긴급체포에는 ‘함정’이 있었다고 한다. 특검 조사가 한창이던 지난 5월30일 조사를 받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같은 조사실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을 대질 조사하던 특검팀 파견 검사와 수사관들이 “식사를 하고 오겠다”며 모두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사진은 식당이 아닌 폐쇄회로(CCTV)가 설치된 모니터룸으로 향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태도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당시 두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 조용하게 무슨 말을 계속 주고받았다고 한다. 특검팀은 두 사람이 입을 맞췄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이 전 수석에 대해서 그날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한다. 특검팀 한 관계자는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사항은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는지를 먼저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수석은 긴급체포된 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순순히 구속사실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특검 한 관계자는 “며칠 동안 계속된 조사과정에서 자신들의 혐의 사실을 인정하고 구속될 것을 예감했을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처음에는 자신들의 방어논리를 펴다가 점점 구속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광옥 전 비서실장도 특검에 소환된 뒤 “내가 죽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온갖 수모와 암울한 정치적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겠다”며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한 전 비서실장은 이 전 수석에 비해 훨씬 당당하고 흔들림없이 조사에 임했다고 전해진다.
한 특검관계자는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인 출신이다. 조사과정에서 전혀 흔들림없이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 고분고분하게 조사를 받았지만 당당하게 대북송금의 성격을 설명했다. 그리고 진술 곳곳에서 DJ를 감싸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그외에 A씨는 김윤규 현대상선 사장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취지로 진술했지만 노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성격은 정 회장과 비슷해 소심한 편이었다”는 평가했고 김재수 전 현대 구조본부장은 “끝까지 오너를 보호하려는 충성맨”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김 전 본부장을 “아는 게 없는 무늬만 사장”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특검 관계자 A씨는 국정원 관계자들의 조사에 대해서는 “비교적 화끈하게 모든 것을 다 밝혀 놀랐다”고 말했다.
특검 관계자 A씨는 소환자들에 대한 총평에서 “특별히 조사하는 데 어려웠던 사람은 없었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 같은 사람은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모두 비슷했다. 이미 특검에서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실정법 위반 여부를 조사했기 때문에 방어논리 없이 무너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고 말했다. 소환자들 대부분은 DJ의 핵심인사들이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충성경쟁’이 치열했다고 전해진다. 모두 DJ와 관련한 진술에서는 그를 감싸려는 태도가 역력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A씨는 “대북송금과 관련해 민족의 장래를 위해 못 밝힌 부분들도 많다.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민족의 장래와 진실 사이에서 방황했던 특검 관계자들의 ‘고민’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