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무더위를 앞두고 검찰이 변양호 전 재경부 국장을 구속했을 때 명분은 현대차 비자금 수수 혐의였다. 그러나 정·관·재계 대다수 인사들은 변 전 국장이 이헌재 사단 일원임을 근거로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이헌재 사단 시니어급 인사들에 대한 본격수사가 임박했다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변 전 국장의 입을 통해 외환은행 매각 당시 경제정책을 주도했던 이헌재 전 부총리나 이헌재 사단 시니어급 인사인 오호수 인베스투스글로벌 회장 관련 정황을 포착할 가능성이 거론됐던 것이다.
말 끝나기도 무섭게 검찰은 곧바로 이 전 부총리에 대한 계좌추적을 실시하고 출국금지 조치까지 취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 쏟아진 수많은 억측에도 불구하고 이헌재-오호수 라인에 대한 구체적 정황은 더 이상 검찰청사에서 흘러나오지 않게 됐다.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는 얼마 전 사석에서 사견을 전제로 “이번 수사의 궁극적 목표가 이헌재 사단이었던 것은 맞지만 뚜렷한 정황을 포착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라며 “아직 수사가 끝난 게 아니다”고 밝혔던 바 있다. 최근에 터져 나온 진념 전 부총리 계좌추적 소식과 외환은행 비자금 조성 의혹 조사는 검찰의 수사의욕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진 전 부총리의 계좌 추적은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구속된 김재록 씨 돈 1억 원이 진 전 부총리 차명계좌로 ‘추정’되는 계좌에 입금된 사실이 드러나 검찰이 조사를 벌이는 중이기 때문이다. 진 전 부총리는 2002년 4월 경제부총리직에서 퇴임한 후 론스타 측 회계법인의 고문으로 활동했던 바 있다. 검찰은 진 전 부총리에 대한 금융 조사를 통해 외환은행 매각 책임자들 사이에 부정한 금품거래 정황이 있었는가를 확인 중이다.
외환은행 비자금 의혹 또한 침체됐던 검찰수사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강원 전 행장 시절인 지난 2003년 외환은행이 차세대 금융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비용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을 포착한 것이다. 그동안 검찰은 스티븐 리 전 론스타코리아 대표의 신병 확보가 여의치 않고 외환은행 관계자들의 말 바꾸기와 책임 전가가 되풀이된 탓으로 결정적 정황 포착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번 비자금 의혹 수사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는 셈이다.
▲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왼쪽), 진념 전 경제부총리 | ||
그러나 이헌재 전 부총리 계좌추적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점 때문인지 이번 진 전 부총리 관련 조사 결과에 대한 비관적 전망도 나오고 있다. 외환은행 비자금에 대한 이강원 전 행장 조사는 이 전 행장이 결제를 했을 것이란 점에서 결정적 진술을 얻어낼 것이란 희망적 관측도 있지만 동시에 납품비리 정도로 치부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익명의 한 검찰 관계자는 “검찰이 외환은행 수사 목표를 수정한 것은 아니다”고 밝힌다. 이헌재 사단에 대한 조사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대검찰청 채동욱 수사기획관은 “대검찰청 중수1과와 2과 인원이 모두 외환은행 수사에 투입됐으며 비자금 수사는 은행 매각 수사를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현재 외환은행 수사팀엔 다른 지방검찰청의 인력까지 차출된 상태다. 익명의 검찰 관계자는 “이헌재 전 부총리나 진념 전 부총리 같은 거물급 인사들에 대한 계좌추적을 할 정도라면 검찰이 단단히 각오하고 덤벼든 것으로 봐야 한다”며 “어떤 식으로든 유종의 미를 거두려 할 것”이라 밝힌다. 이헌재 사단을 옭아맬 수 없다면 다른 대어급 인사를 최종 타깃으로 삼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정황 포착을 위해선 관련자들의 진술을 얻어내는 방법이 최선인데 구속돼 있는 변양호 전 국장의 경우 좀처럼 검찰이 원하는 답변을 내놓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진 전 부총리나 이 전 행장을 압박하는 것 또한 결정적 정황 포착을 위해서지만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다 보니 검찰청사 주변에선 외환은행 매각에 대한 실무절차를 총괄했던 김대중 정부 핵심인사들에 대한 조사설마저 흘러나오고 있다. 진 전 부총리나 이 전 행장에 대한 조사가 결국 DJ정부 시절 핵심인사들을 덮치기 위한 수순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한 검찰 관계자는 “담당 수사관은 스트레스성 탈모증세까지 보일 지경이다. 수사팀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정치적 상황에 신경 쓰지 않고 거물급 참고인 소환 조사를 통해 정황 확보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그러나 수사당국이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수사의 무대를 DJ 인맥으로까지 확전시키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차기 대선을 앞두고 최고의 연대 파트너로 떠오른 민주당 세력에 대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지원사격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DJ 주변 인사들 또한 자신들을 향한 검찰의 칼날을 정치 이슈화를 통해 막아내려 할 것이 자명하다. 최근 검찰청사 안팎에선 DJ 정부 실세 중 핵심인사를 직접 수사하는 방법도 거론되고 있는데 이들을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과 묶어 조사할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