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애 인정 일주일 만에 ‘자필 사과문’ 올리며 팬심 달래기…팬덤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육성형 아이돌’ 그림자
이런 가운데 막강한 구매력을 가진 중국 팬덤마저 등을 돌릴 것을 예고하자 결국 카리나가 ‘열애 사과문’을 올리면서 논란은 조금씩 잦아드는 분위기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가수를 쥐락펴락하려는 K팝 팬덤과 그들에게 휘둘리는 소속사의 어두운 일면을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라는 지적도 나온다.
카리나와 이재욱과의 열애설이 터진 것은 2월 27일이다. 연예전문매체 디스패치의 단독 보도에 따르면 이들의 관계는 2024년 1월 이탈리아 밀라노 패션쇼에 함께 참석하면서부터 발전되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지 고작 한 달 만에 열애 사실이 드러났고, 데이트를 짐작하게 하는 사진까지 공개된 이상 양측이 “이제 알아가는 단계”라며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고 신속한 절차였다.
‘아이돌의 사랑’이 한국 연예계에서 오래도록 금기시 됐었다고 해도 3세대부터는 대중도, 팬덤도 이전에 비해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 왔다. 블랙핑크의 지수, 트와이스의 모모와 지효 등의 열애설이 불거지고 이들의 인정이 그 뒤를 따랐어도 큰 동요가 없었던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가수 활동은 활동대로, 사생활은 사생활대로 나누어 보겠다는 것이 당시 팬덤의 입장이기도 했다.
3세대 선배들의 열애가 그럭저럭 인정받았던 만큼 그 후발주자들에게도 비슷한 태도가 유지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카리나를 향한 팬들의 반응은 가혹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국내 팬들은 X(옛 트위터)를 통해 “유지민(카리나의 본명)은 봐라”라는 해시태그를 걸고 그를 향한 성토의 장을 열었고, 이른바 ‘홈마(홈페이지 마스터의 줄임말)’라고 불리며 좋아하는 연예인의 스케줄을 모두 따라가 사진을 찍는 유명 팬들 가운데 일부가 이번 열애를 이유로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실제로 2월 29일 서울에서 있었던 카리나의 외부 일정에 홈마들이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K팝 팬덤 내에서 작지 않은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제까지 카리나는 물론, 에스파의 인기에 가장 막강한 뒷받침이 됐던 중국 팬덤의 경우는 이보다 좀 더 심각하게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다. 열애 보도 직후 SM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에서 트럭 시위를 진행한 중국 팬덤은 “직접 사과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하락한 앨범 판매량과 텅 빈 콘서트 좌석을 보게 될 거예요” “당신은 직접 당신의 진로를 망쳤어요. 당신의 모든 노력이 하나의 연애 소문으로 인해 모두 부정되고 있어요” 등의 문구로 카리나를 비판했다. 이에 맞서 카리나를 응원하는 다른 집단행동도 있었지만, 실제 중국 팬덤 내에서는 카리나의 열애 이슈에 대한 부정적인 기류가 더욱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 카리나의 인기는 압도적이다. 2022년 7월 8일 발매한 에스파 미니 2집 ‘걸스(Girls)’의 초동 판매량은 약 142만 장으로 걸그룹 최초 초동 밀리언셀러를 달성했는데 이 가운데 33만 5000장이 중국의 카리나 개인 팬덤이 주문한 수량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선주문량으로 따져도 카리나의 중국 팬덤이 주문한 수치가 블랙핑크의 리사, 제니, 지수 등을 뛰어넘어 K팝 여성 아티스트 최다 선주문량을 기록할 정도였다.
그런 만큼 정규 1집 활동을 앞둔 에스파가 중국 팬덤의 마음을 다시 돌리지 않는다면 이전만큼 좋은 성적을 장담하기 힘든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결국 카리나는 열애설이 보도된 지 약 일주일 만인 3월 5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데뷔한 순간부터 저에게 가장 따뜻한 겨울을 선물해준 팬분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다”는 내용의 자필 사과문을 올리며 ‘팬심 달래기’에 나섰다.
대중들이 보기엔 20대 남녀 사이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연애 감정’에 팬들이 과도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앞서 3세대 아이돌들의 연애가 이 정도로까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는 점에 비춰본다면 팬들의 이 같은 ‘집단 히스테리’는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실제로 사과로 이어진 카리나의 열애 이슈를 두고 BBC는 “K팝 스타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팬들에게 ‘배신당했다’는 비난을 받자 굽신거리며 사과했다”고 짚었고, CNN도 “K팝 팬들의 극도의 충성심은 스타와 소속사가 팬의 요구나 욕구에 긴밀한 관계로 묶여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K팝 스타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킨다”고 지적했다.
업계 관계자들 역시 이번 ‘카리나 열애 사태’는 팬덤의 충성심에 사실상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K팝 산업의 특수성으로 인해 더욱 심각한 문제로 번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난립하는 아이돌 그룹 가운데 극소수만이 최상위권을 선점하게 됐고, 특히 4세대는 이 최상위권만을 놓고 걸그룹 간의 격렬한 성적 싸움이 벌어지며 팬덤의 경쟁도 어느 때보다 치열해진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팬에게 있어 스타가 이전처럼 단순히 맹목적인 애정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동반자’로 의미가 달라지면서 같은 목적에서 벗어난 스타에 대한 배신감이 이전보다 더욱 클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해 한 엔터사 관계자는 “4세대는 ‘걸그룹 천하’라는 말이 나올 만큼 많은 걸그룹들이 쏟아졌는데 이 가운데 SM엔터의 에스파, 스타쉽엔터의 아이브, 쏘스뮤직의 르세라핌, 어도어의 뉴진스를 최상위권으로 꼽는다”라며 “팬덤의 인기와 대중성을 모두 갖춘 그룹이 넷이나 되다 보니 최상위권의 지분을 두고도 팬덤 간의 신경전도 굉장히 날카로운 상황에서 아이돌에게 특히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열애설이 불거진 게 팬덤에 큰 쇼크가 된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그는 “3세대 이후부터의 K팝 팬덤은 아이돌을 말 그대로 우상으로 바라보기보단 ‘내가 키워 나가야 할 내 새끼’로 보는 시각이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이른바 ‘육성형 아이돌’로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이라며 “일반 대중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기이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팬덤의 구매력에 극단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최근의 K팝 산업에 맞춰 변화한 형태로 파악한다”고 설명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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