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열린 <시대의 양심 정구영> 평전 출판기념회에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축사를 했다. 박은숙 기자 eopark@ilyo.co.kr |
그도 그럴 것이 정구영의 넷째 아들 만영과 박정희, 그리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동학한 사이다. 특히 박정희의 최측근이었던 김재규는 정구영에게 세배를 갈 정도였다. 김재규가 박정희와 정구영 사이에 다리를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애초 목적이 민정 이양이었던 박정희와 공화당 인사들은 당대를 대표하던 법조인이자 올곧은 성품으로 알려진 정구영과 같은 인물이 필요했다. 물론 안전한 민정 이양과 승공통일을 중시했던 정구영 본인의 평소 생각도 크게 작용했다. 1968년 8월 박정희가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면서 총재직에 오르기 전까지, 정구영은 공화당 초대 총재를 맡았다.
초창기 박정희는 원로급 인사였던 정구영의 충고에 귀를 기울였고 진심으로 그를 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구영과 박정희의 관계는 정권 내내 불편함의 연속이었다. 정구영의 솔직하고 따끔한 제언은 공화당 초창기였던 1963년 3월 16일 박정희의 군정 연장선언 때부터 시작된다.
훗날 야당과의 영수회담 합의로 철회되기는 했지만, 당시 정구영은 박정희의 군정 연장 선언에 대해 “난 거기에 승복 못 하오. 당신 손으로 헌법을 만들어놓고 그 헌법을 당신 손으로 폐기하고 부정할 작정이오?”라고 엄포를 놓았다. 법조인으로서 원칙주의를 강조했던 그의 평소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직에 오르고 나서도 그의 지조 있는 발언은 계속되었다. 1964년 월남파병 논의 당시에도 그는 여당인사면서도 월남파병 반대의견을 개진했다.
정구영은 박정희의 1인 지상주의에 대해 크게 경계했다. 특히 박정희가 지방 순시를 통해 도지사나 군수, 심지어 면장 같은 말단 행정 관리들에게 직접 지시하는 관행에 대해 극렬히 반대했다. 한 예로 전남의 어느 소도시에서 “이 지역 수돗물이 모자라니 이웃 지방의 물을 이 소도시로 대라”는 박정희의 말 한마디에 군수와 면장들이 쩔쩔매며 이웃 동네 물을 끌어 써 모두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정구영은 박정희 면전에 “장군은 군대를 통솔하지만, 주군은 재상을 통솔하는 법이다”라며 아래 인사들의 재량권을 강조했다.
더 놀라운 것은 정구영이 박정희의 3선 개헌 가능성을 애초부터 예견했다는 점이다. 1966년 박정희가 재선을 앞두던 시점에 정구영은 “4년 임기가 지나면 현행법상 세 번 출마는 못한다. 반드시 다른 사람이 대통령으로 나와야 한다. 이것이 안 되면 혼란이 온다. 이것이 안 되면 10년 전 자유당 정권이 그랬듯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쓴다”고 경고했다. 4년 후 유신체제 시작이라는 헌법파괴사태에 대해 그는 미리부터 걱정했던 것이다. 정구영의 불길한 예감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박정희가 재임에 성공하고 불과 몇 년 뒤인 1969년 새해 벽두부터 3선 개헌에 대한 언급이 나오며 개헌절차가 본격화된 것이다. 그해 7월 25일, 박정희는 담화를 통해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친다고 발표했다.
담화 직후 박정희는 끝까지 반대를 주장했던 정구영과 마주한다. 일종의 마지막 설득에 나섰던 셈이었다. 당시 정구영은 당 고문의 일종인 ‘총재상의역’을 맡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도 “제 생각은 이미 3년 전 말씀드렸다. 어떤 변화가 있건 원칙은 부동의 것이다”라고 뼈 있는 한마디를 남기며 마지막까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법조인으로서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3선 개헌 후 박정희는 결국 1971년 4월, 다시 대통령직에 오르게 되고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유신체제의 서막을 알린다. 7대 국회를 끝으로 사실상 의정활동을 마친 정구영은 결국 1974년 1월 7일 공화당 탈당 성명을 내고 권력에 항거한다. 탈당서를 쥐고 찍은 그의 사진 속 얼굴에는 비장함보다는 후련함이 묻어난다. 그는 탈당선언문을 통해 “민주주의는 삼권 분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유신헌법은 3권이 하나로 흡수된 삼권적 유일 체제다. 이 같은 비민주적이고 불법적인 권력의 전횡에 대해 나는 공화당원으로서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탈당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라며 한때는 주군으로 모셨던 박정희에 대한 실망감과 혐오감을 극렬하게 내보인다.
박정희로서는 공화당 당원명부 제1호이자 초대 총재이자 당 의장이었던 내부 핵심인물이 자신을 비난하며 떠났으니 체면에 먹물을 뒤집어쓴 셈이었다. 정구영과 박정희의 인연은 실로 필연이면서도 악연이라 하겠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1899년 6월 22일 충청북도 옥천의 한 명망가에서 태어난 정구영 전 공화당 총재는 서울대 법대의 전신인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한 법조인 출신이다. 대학 시절부터 그는 재학생 144명을 이끌고 삼일운동에 참여하며 권력에 항거하는 반항적 기질을 보였다. 그의 호 청람(淸嵐)은 그의 성품을 말해주듯 ‘맑은 아지랑이’를 뜻한다.
3년 6개월간 짧은 검사생활을 접은 뒤로 그는 줄곧 변호사로 활동해왔다. 대한변협 회장까지 역임한 정구영은 당대 법조계 실력자로 통했으며 자유당 정권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부터 법무부 장관을 제의받기도 했다.
1963년 그는 고민 끝에 공화당에 합류하지만, 정권 내내 군정 주체들의 들러리로만 남지 않고 정치자금 투명화, 1인 지상주의 반대, 월남 파병 반대, 평화적 정권교체 등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박정희에 쓴소리를 했다.
결국 박정희는 서서히 정구영에게서 등을 돌렸고 1974년 1월 7일, 그는 3선개헌과 유신체제에 항거하며 끝내 탈당서를 제출했다. 그해 11월 그는, 김수환 추기경, 김대중 당시 의원 등 재야 세력과 뜻을 함께하며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에 참여한다.
정구영은 지난 1978년 5월 22일, 향년 83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