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핵실험 파문 이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얼굴이 밝지 않다. 지난 11일 청와대 오찬에 참석한 현 회장. 청와대사진기자단 | ||
그룹 경영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대북사업 위기 속에서도 현 회장 측은 경영권 안정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 15일 현대그룹은 현 회장 딸 지이 씨와 영이 씨, 아들 영선 씨 등이 현대상선 주식 5만 3000여 주를 장내 매수했다고 공시했다. 정몽준 의원과 지분 전쟁을 벌인 현대상선의 현 회장 측 우호지분을 꾸준히 늘리고 있는 것이다.
현정은 회장 부친인 현영원 씨는 지난 9월 8일 자신 명의로 돼 있던 현대상선 지분 162만여 주를 재단법인 영문에 기증했다. 이는 지분율 1.22%에 해당하며 기증 당시 주가 1만 8500원으로 환산하면 300억 원에 해당한다. 정몽준 의원이 최대주주인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 지분 전쟁을 벌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300억 원 상당의 현 회장 우호지분이 다른 곳에 기증된 점이 눈길을 끈 것이다.
재단법인 영문은 지난해 5월 3일 설립됐다. 재단의 등기부등본에 나온 설립목적은 ‘장학사업, 학술연구비 지원사업, 목적사업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부동산 임대업’. 장학재단인 셈이다.
재단법인 영문 이사진 명부엔 현영원 씨 부인이자 현정은 회장 모친인 김문희 씨 이름이 올라있다. 등기부 이사진 명부에 오른 김 씨 이름 아래엔 ‘대표권 제한규정, 이사 김문희 외에는 대표권이 없음’이라 적시돼 있다. 김문희 씨가 이 재단의 이사장인 셈이다.
등기부에 나온 재단법인 영문의 주소지는 서울 종로구 사직동 262-XX이다. 이 건물은 262-XX 외 3필지에 걸쳐 있는데 이 일대 360평 토지는 지난 1960년대 초반부터 현영원-김문희 부부 일가 소유였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현영원-김문희 부부, 그리고 현정은 회장 언니 현일선 씨, 현 회장 동생 현승혜 씨가 공동소유하고 있다가 지난해 5월 13일 모두 재단법인 영문에 출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현정은 회장 일가가 40년 넘게 소유해온 건물과 토지가 김문희 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재단의 소유로 된 것이다. 재단명의가 됐지만 실질적 소유주엔 변함이 없다.
재단법인 영문은 설립 이후 지금까지 별다른 장학사업을 시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재단의 자본총액은 50억 원인 것으로 등기부상 기재돼 있다. 삼성이건희장학재단의 자본총액이 3500억 원, 정몽준 의원의 아산사회복지재단 자본총액이 135억 원인 것과 비교하면 재단법인 영문은 아직 큰 장학사업을 할 만한 재정적 준비가 안 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재단법인 영문이 관심을 끄는 것은 현대그룹 경영권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쓰일 가능성 때문이다. 현영원 씨는 1927년생이며 김문희 씨는 1928년생이다. 고령인 이들 부부의 지분이 현정은 회장 우호지분으로 안전하게 유지되려면 현 회장 일가에 상속돼야 하는데 거액의 상속세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영원-김문희 부부의 지분이 이들 영향력하에 놓인 장학재단에 넘어가면 이는 현 회장 우호지분으로 관리될 수 있는 동시에 상속세를 피할 수 있다. 남편 정몽헌 회장 사후 시숙부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과 경영권 전쟁을 벌이고 나서 최근 시동생인 정몽준 의원과 지분 갈등을 겪은 현 회장 측이 장학재단을 통해 출혈을 피하면서 안정적 우호지분 관리에 들어갔다는 해석이 나올 법도 하다.
재단법인이 그룹 지배구조에 포함돼 있는 사례는 현 회장과 현대상선 지분 갈등을 겪은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 의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아산사회복지재단은 현재 현대중공업 지분 2.53%를 갖고 있다. 아산재단의 현대중공업 지분은 정 의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한 정 의원 우호지분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러나 아산재단은 울산의대 학자금 지원 등 왕성한 장학사업을 펼치고 있어 재단법인 영문과 대조를 이룬다. 아산재단 이사진 명부엔 서울시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조순 전 서울대 명예교수, 박홍 전 서강대 총장, 이상주 전 교육부총리 등 교육계 명망가들의 이름이 올라있다. 반면 재단법인 영문의 이사진 중 교육계 출신 인사로는 하규섭 서울대 의대 교수 정도만이 눈에 띌 정도다.
한편 재단법인 영문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현 회장님 부모님이 만든 재단이라 그룹 차원에서 관리하는 곳이 아닌데 재단 관련 질문이 (그룹 측에) 많이 온다”며 “원래 다른 장학재단도 수익을 낸 뒤 그 돈으로 장학사업을 하기 마련인데 재단법인 영문이 장학사업에 필요한 충분한 수익을 내지 못해 본격적인 장학사업을 시작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상속세 회피 논란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장학재단에 기부된 돈은 이미 사회환원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를 두고 상속세 운운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