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력 못 챙긴 한동훈 ‘열정 페이 그만’ 의도 노출…윤 대통령 물러섰지만 총선 후 전투 재개 불가피
#직진본능 윤, 이번엔 후진
3월 17일 오후, 여권에 폭탄이 터졌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이날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채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으로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수사 대상에 오른 이종섭 주호주 대사에 대해 “공수처가 즉각 소환하고, 이 대사는 즉각 귀국해야 한다”고 말했다. 용산의 기존 입장과 배치되는 발언으로, 여권이 발칵 뒤집혔다.
이종섭 대사는 공수처의 피고발인 신분으로 출국금지 상태였지만, 호주대사에 임명되고 나서 공수처에 자진 출석해 조사받았고 출국금지가 해제되자 부임했다. 여권은 공수처가 이 대사를 한 차례도 소환하지 않은 채 늑장 수사를 했고, 야권의 ‘수사 대상자 빼돌리기’ 주장은 정치 공세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런데 한 위원장이 공수처의 즉각 소환을 촉구하고, 이에 맞춰 이 대사가 즉각 귀국해 공수처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까지 밝히자 정치권은 시끄러워졌다. 한 위원장은 한 술 더 떠 ‘언론인 회칼 테러’ 발언으로 논란이 된 황상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에 대해서도 자진사퇴를 촉구했다. 한 위원장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발언이고, 본인이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종섭 대사, 그리고 황 수석으로 인해 복수의 여론조사에서 여당 지지율이 하락한 것으로 나타나자 한 위원장이 정면 돌파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수도권을 비롯한 많은 후보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한 위원장 결단은 용산과의 충돌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용산을 때리는 모양새까지 연출됐다.
3월 18일 많은 언론들이 일제히 한 위원장 발언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고 용산에 대한 압박은 거세졌다. 대통령실은 발끈했다. 대통령실은 3월 18일 언론 배포문을 통해 이종섭 주호주대사와 관련, “공수처가 조사 준비가 되지 않아 소환도 안 한 상태에서 재외공관장이 국내에 들어와 마냥 대기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또 “이종섭 임명은 적임자를 발탁한 정당한 인사”라고 반박했다.
대통령실은 황 수석의 발언이 부적절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사퇴 요구엔 선을 그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황 수석 거취에 변화 분위기는 없다”고 일축했다. 황 수석은 대통령실 회의에 참석하는 등 정상 업무도 이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본인이 사과한 만큼 사퇴까지 갈 사안은 아니라는 게 대통령실의 일관된 견해였다.
대통령실 내부에선 한 위원장을 향한 불쾌한 기류가 공공연히 새어 나오기도 했다. 한 위원장의 압박성 요구를 윤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은 가운데 여권의 긴장감은 고조됐다. 이런 가운데 발표된 비례대표 명단은 트리거로 작용했고 윤·한 갈등 전선은 확대됐다. 윤·한 갈등 2라운드의 공격 포문을 한 위원장이 열었다면 이번엔 친윤 쪽 반격이 나왔다.
3월 18일 여당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공천자 명단이 나오자마자 친윤 핵심이자 당 인재영입위원장인 이철규 의원은 페이스북 글을 통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당선 안정권에 현직 비례대표인 김예지 의원과 한지아 을지의과대학 교수 등 비대위원 2명, ‘생소한 이름’의 공직자 2명이 명단에 포함되고 호남 인사와 사무처 당직자가 빠졌다”고 질타했다. 한 위원장을 겨눈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친윤 진영에선 ‘한동훈 사천’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윤·한 갈등이 확전일로를 걷고 자중지란에 대한 우려가 쇄도하자 윤 대통령이 결국 나섰다. 몇몇 원로들이 윤 대통령에게 총선 위기감을 호소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진다. 윤 대통령은 3월 20일 새벽 황 수석 사의를 수용했다. 이어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급히 귀국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두 사안 모두 윤 대통령이 여당, 정확히 말하면 한 위원장 요구를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취했다.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에게 ‘양보 운전’을 한 셈이다. 한 위원장은 대통령실 조치가 나온 직후 3월 20일 낮 경기도 안양 거리 인사에서 육성으로 직접 “다 해결됐다”고 밝혔다. 자신이 모든 문제를 풀었다면서 해결사 역할을 과시한 윤·한 갈등 정리 멘트였다.
용산이 양보하자 여당 지도부도 한발 물러서는 행보로 ‘보답’을 했다. 친윤이 직격했던 비례대표 명단에 대한 수정이 3월 20일 밤늦게 나온 것이다. TK(대구·경북) 몫으로 보이는 이달희 전 경북도 경제부지사가 당선권인 17번으로 재배치됐고, 호남 출신 조배숙 전 전북도당위원장을 역시 당선권인 13번에 새로이 배치했다. 용산 입장을 여당 지도부가 일부 수용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용산의 예견된 패배
윤·한 갈등 2라운드는 용산의 예정된 패배였다는 평이다. 이번 총선의 최대 승부처인 수도권에서 ‘이종섭·황상무 사태’로 민심이 악화하자 한 위원장은 여러 경로를 통해 특단의 조치를 용산에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고, 결국 언론 마이크를 통해 문제 해결에 들어갔다.
한 위원장의 공개 요구가 나오자 대통령실은 큰 혼돈에 빠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친윤’으로 불렸던 의원들까지 한 위원장의 발언에 동조하고 나선 것에 대해 윤 대통령은 마음이 몹시 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 사정에 밝은 한 여권 관계자는 통화에서 “한 위원장에 대한 섭섭함이 많았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는 기류도 있었다. 선거 사령탑 아니냐. 그런데, 한 위원장 외에 많은 친윤 후보들이 대통령실을 겨누는 것에 대해선 괘씸하다는 말이 많았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용산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은혜 전 홍보수석에다 윤석열 대선 캠프 수행실장이었던 이용 의원 등은 황 수석은 사퇴하고 이 대사는 빨리 귀국해야 한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친윤 의원 상당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대구에서 막말 논란을 부른 도태우 후보에 대한 공천 취소에 이어 부산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이미 공천을 받은 장예찬 후보를 배제 결정한 것도 윤·한 갈등에 기름을 부은 요인으로 정치권에서는 해석한다. 용산은 전통적인 보수 유권자들의 지지를 감안할 때 이들의 공천 유지가 맞다는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 감정이 격해지면서 커뮤니케이션이 작동하지 못했고 대화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공개적으로 노출되면서 갈등은 심화했다.
한 위원장이 윤 대통령에 대해 직접 날을 세우는 상황까지 간 것은 강력하게 형성된 여론 때문이었다. 복수의 여론조사에서 여당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다는 경고음이 속출했고, 수도권 표밭을 누비는 후보들의 “이대로는 진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자 한 위원장은 칼을 빼들었다. 윤·한 갈등 1라운드 때와는 달리, 지금은 총선을 앞두고 있다는 점 때문에 여권에선 한 위원장에 대한 우호적 반응이 주를 이뤘다.
국민의힘 한 의원은 “용산의 입장을 대변할 우군이 전혀 없었고 한동훈 위원장도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 상황을 확인하고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애당초 용산은 윤·한 갈등에서 승리하기가 불가능했다”며 “뒤늦게나마 윤 대통령이 결단을 내렸으니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미래’와 ‘현재’의 충돌
윤·한 갈등 2라운드는 한동훈이라는 미래 권력, 그리고 윤 대통령이라는 현재 권력의 본격 충돌로 정치권에서는 읽는다. 갈등의 근원엔 미래 권력의 세력 확장, 그리고 이를 견제하는 현재 권력의 세력 유지 시도가 깔려 있다는 의미다.
한 위원장은 윤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위해 대통령실과 대립각을 세웠고, 비례대표 명단에서도 친윤 대신 친 한동훈 세력을 다수 심으려고 했다. 한동훈 비대위 지도부에 있는 김예지(15번)·한지아(11번) 비대위원이 당선권에 들어간 게 대표적이다. 친윤계는 이들에 대해 ‘한동훈 사천’이라는 꼬리표를 직접 붙였다. 일부는 한 위원장을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빗대기도 했다.
친윤계는 푸대접을 받았다는 메시지를 적극 발산했다. 윤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인 주기환 전 국민의힘 광주시당위원장은 당선권 밖인 24번을 받았다가 이에 불만을 품은 듯 사퇴했고 비례 명단 재조정 과정에서도 구제받지 못했다. 검찰 수사관 출신의 주 전 위원장은 윤 대통령과 여러 차례 함께 근무했으며, 둘은 매우 돈독한 관계다. 윤 대통령은 한 위원장에게 섭섭한 마음을 표출하는 듯 3월 21일 민생 특보 자리를 신설하고 이 자리에 주 전 위원장을 임명했다.
정치권에서는 한 위원장이 ‘쇄신 실패’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만큼 현역을 많이 살려준 것은 이른바 김건희 특검법 저지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용산에 대한 배려를 이만큼 많이 했는데 끝까지 희생만 하고 친한 세력은 전혀 못 챙기는 ‘열정 페이’ 지불은 이제 그만하겠다는 의도를 이번에 노출시킨 것으로 정치권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용산은 한 위원장의 이런 모습에 대해 과욕이라는 잣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여권 관계자들은 풀이하고 있다.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정도를 저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갈라서면서 독자적 자기 정치에 들어갔던 유승민 전 의원 사례를 소환하는 여권 관계자들도 꽤 있다.
때문에 이번 윤·한 갈등의 봉합은 일시 휴전으로 보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 시각이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 뜰 수 없듯이 권력은 분할하기 불가능한 구조여서 총선이 끝나면 다시 전투가 개시되는 게 불가피하다는 이유다. 윤 대통령과 한동훈 위원장 갈등은 국지전이 아니라 전면전이며, 앞으로 꾸준히 전개될 것이라고 점쳐진다. 임기가 3년이나 남은 윤 대통령으로선 미래 권력의 조기 출현을 용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평 변호사는 3월 22일 매일신문 인터뷰에서 “한동훈 위원장의 당무 독점과 전횡이 완화되고 다양성을 갖춘 팀플레이로 나가야 총선에서 해볼 만한데 한 위원장이 양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부정적”이라고 했다. 한 위원장이 이제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이고 윤·한 관계는 더 벌어지면서 여당의 현재 권력은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으로 읽힌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최경철 매일신문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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