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현 “2년간 부상으로 쉬어 더 치열하게 뛰어”…이회택 “일화에 라이벌 감정 느꼈다”
1992년은 프로축구가 '슈퍼리그'라는 이름으로 1983년 창설돼 10년차를 맞은 해다. 1980년대 후반부터 국가대표팀이 다시 월드컵 본선에 나서게 됐고 리그가 체계를 잡아가며 축구열기가 뜨거워졌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차범근·허정무 등 스타플레이어 출신 인물들이 프로 무대에서 지도자로 나서 관심이 더해졌다.
1992에 포항제철(포철)이 우승컵을 들었으나 이들에 대한 시즌 전 평가는 박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 최순호가 1991시즌을 마지막으로 그라운드를 떠났다. 기존 핵심 자원이었던 박경훈, 이흥실 등은 30대였다. 당시 팀을 이끌던 이회택 감독은 "그 해에 우승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미래를 바라보고 어린 선수들을 키워내려 했다"며 "노태경·최문식 등에게 기회를 주려 했고 그 선수들이 잘해줬다"고 말했다.
시즌 초부터 이회택 감독의 '마지막'이 예정됐다. 그는 시즌을 마치면 포철 감독직을 내려놓고 한양대로 가려 했다. 이 감독은 "모교이기도 했고 한양대와 이전부터 약속이 돼 있었는데 여러 사정 때문에 늦어지고 있었다"며 "허정무에게 지휘봉을 넘길 계획이어서 당장 우승보다 더 먼 곳을 보려고 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코치를 맡았던 허정무 전 감독도 팀이 일종의 '리빌딩' 과정에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승할 수 있는 전력은 아니었다.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았던 선수들을 재발견한 시즌이다. 박창현, 이원철, 이영상, 공문배 등 선수들이 골고루 잘해줬다"고 전했다.
허정무 전 감독은 다소 흥미로웠던 팀 분위기를 전했다. "1년 전인 1991년에 코치로 갔다. 당대 최고 선수들이었던 최순호·이흥실이 있었다. 그런데 팀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진 않았다. 청주상고 출신 선수들과 한양대 출신 선수들 간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이 있었다"며 "이게 전력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1992년은 판을 새롭게 짜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포철의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던 박창현 현 홍익대 감독에게 1992년은 더욱 특별하다. 그는 1992시즌 리그 21경기에 나서 7골 4도움을 기록했다. 리그 득점 5위의 기록을 남기며 연말 시상식 MVP 투표에서 2위에 올랐고 베스트11에 선정됐다.
"그때 감독·코치 선생님들은 기억이 흐릿하실 수 있다. 우승도 많이 해보신 분들이니까.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해 외에는 기억할 일이 많이 없어서 그렇다(웃음). 나는 부상이 많았던 선수다. 선수생활 중 수술만 총 10번을 했다. 1990년과 1991년을 통으로 쉬었다."
박창현 감독을 괴롭힌 것은 무릎 십자인대 부상이었다. 1990년 1월 부상, 재기를 노렸으나 번번이 부상이 재발하며 2년간 단 1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 그는 "다치는 게 반복되면서 일본에도 수술을 받으러 갔는데 당시 기술로는 일본에서도 후방 십자인대를 건드릴 수 없다고 하더라. 십자인대가 없어서 연골판이 자꾸 찢어졌는데 그것만 정리하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변변한 재활 프로그램도 없던 시절이다. 박창현 감독은 홀로 사설 헬스장과 수영장을 다니며 몸을 만들었다. 그는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한다. 너무 힘들어서 혼자 울 때도 많았다. 눈물이 줄줄 흐르더라"고 회상했다.
1992시즌을 앞두고 절치부심 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에서 진행됐던 포철의 전지훈련에도 참가하지 않고 국내에 남아 신인급 선수들과 함께 몸을 만들었다. 박창현 감독은 "당시 지금 김기동 FC 서울 감독이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6~7명의 어린 선수들과 함께 하루에 세 탕씩 운동만 했다"고 말했다.
대우도 나빠졌다. 박창현 감독은 "사실 시즌 전 감독님이 '그만해라'고 말씀하셨다. 실업팀 입단도 권유하셨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했다. 월급도 100만 원으로 깎였다. 신인 선수들과 같은 금액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회택 감독도 "그때 박창현이 2년 동안 경기를 못 뛰었다. 내 손으로 월급을 깎아야 했다.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다시 반등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리그가 개막하고 5월 말이 되면서 박창현 감독은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그는 "2군에 있으면서 연습경기를 치르며 감각을 되찾았다. 나중엔 영남대 상대로 4~5골을 넣기도 했다. 그런 보고가 들어가니 이회택 감독님께서 기회를 주신 것 같다"며 "날짜도 잊지 않는다. 5월 30일 현대(현 울산 HD)와 경기에 선발로 나갔다. 마치 다시 데뷔하는 느낌이었다.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경기 템포를 따라가느라 고생했다"고 전했다.
현대를 상대한 포철은 박태하 현 포항 감독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뒀다. 경기 종료 휘슬은 21시를 전후로 불렸으나 이날 밤에는 또 다른 역사가 쓰였다.
"내가 3년 만에 복귀한 날이기도 했지만 이날이 박태하 생일이었다. 나와 박태하를 포함해 권형정·이영상·홍명보 등이 한잔하러 숙소에서 몰래 나갔다(웃음). 그렇게 '탈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코칭스태프에 발각됐다. 이제 막 첫 게임 뛰고 탈출했다 붙잡혔으니 얼마나 혼났겠나. 그 와중에 명보는 별로 많이 안 혼나는 것 같더라. 그때도 명보는 슈퍼스타였으니까(웃음). 나중에 탕감해 주셨지만 처음엔 벌금 100만 원 처분을 받았다. 내 월급이 100만 원이었는데 눈앞이 캄캄했다. 어쨌든 죄송스러운 마음에 그날 이후로 더 치열하게 뛰었다."
개막 초반부터 리그 6개 팀 중 5위에 머물던 포철은 7월부터 점차 순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시즌 막판인 10월에는 리그 선두 일화를 위협하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이회택 감독은 "전 시즌과 조금은 달라진 선수단 호흡이 차차 맞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허정무 감독은 "우리 코칭스태프는 하던 대로 했다. 선수들이 잘 뛰어줬다"고 설명했다. 그라운드에서 뛰던 박창현 감독은 "그때 우리는 비교적 젊은 팀이었다. 많이 뛰는 축구가 여름부터 잘 먹혀들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K리그 레전드 외국인 선수로 평가받는 라데의 시즌 중 합류도 포철에 힘이 됐다. 박창현 감독은 "보스니아 전쟁 탓에 라데는 정말 축구화 한 켤레 들고 한국에 들어왔다. 심적으로 힘든 시기에 내가 영어를 좀 해서 대화 상대가 돼 줬다. 한국에 와서 축구가 늘었는데, 처음 왔을 때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고 말했다. 허정무 감독은 "우리가 공격수 숫자가 많지 않았다. 라데가 와서 그 해 많은 골을 넣지는 않았지만 흔들어주는 역할은 충분했다"고 평가했다. 함께 공격진을 형성한 박창현 감독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골을 넣어줬다. 크로스를 처리하는 능력이 좋았고 특히 큰 키가 아니지만 머리로 해결하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했다.
시즌 말미에 접어들며 일화와 우승 경쟁이 이어졌다. 당시 일화는 리그 창설 이후인 1989년 창단된 '후발주자'였으나 고정운·이상윤·신태용 등 스타들을 모으며 강팀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박창현 감독은 "잘하는 공격수도 많았지만 수비수들도 만만치 않게 강했던 기억이 난다"며 "지금처럼 VAR 있는 시대라면 그렇게 못 한다(웃음). 공을 안 차고 상대 공격수를 찼다. 일화 박종환 감독님이 무섭게 하셔서 그런지 수비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했다. 그 수비를 벗겨내면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사리체프 골키퍼가 버티고 있었다"고 말했다.
리그 종료까지 단 두 경기를 남긴 시점이던 29라운드, 우승 트로피를 두고 경쟁하던 포철과 일화가 포항에서 만났다. 이 경기를 박 감독은 "내 인생 최고의 경기"라고 말한다. 그는 "박태하와 라데의 어시스트를 받아 전반에만 두 골을 넣었다. 3-1로 이기면서 우리가 리그 1위로 등극했다"고 설명했다.
사령탑 이회택 감독은 당시 일화에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일화 감독이었던, 지금은 세상을 떠난 박종환 감독과 개인적 사연이 많다. 선수 때든 지도자 시절이든 그분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지기 싫어했다. 어떻게든 이기려고 애를 썼다. 1992년 마지막 맞대결은 3골을 넣으며 대승을 하기도 했고 순위가 뒤집혀서 특히 기억이 난다.”
정작 선수단 분위기는 달랐다. 시즌 막판 우승 경쟁이 이어져 일화를 의식했으나 평소 현대와 경기에 더 전의를 불태웠다고 한다. 박창현 감독은 “그때 현대 감독이 차범근 감독이셨다. 아무래도 우리 코치였던 허정무 선생이 경쟁의식이 좀 있지 않겠나. 현대를 만나서 이기면 팀 분위기가 유난히 좋았다”고 설명했다.
허정무 감독의 기억 속에는 리그 최종전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는 “일화전을 이겼다고 해서 우승 확정이 아니었다. 마지막 LG(현 서울)와 경기에서 승리해야만 우승을 할 수 있었다. LG가 정말 거칠게 나왔던 기억이 난다. 특히 포철에서 이적한 선수들이 좀 있었는데 복수를 하려고 했던 건지(웃음) 유독 강하게 상대하더라”며 웃었다. 포철은 시즌 최종전 2-1 승리로 우승을 확정 지었다.
연말 시상식은 포철 선수들이 주인공이었다. MVP를 두고 박창현 감독과 ‘집안싸움’을 벌인 끝에 홍명보 감독이 수상에 성공했다. 박 감독은 MVP 경쟁에서는 밀렸으나 당시에만 있던 ‘감투상’을 수상했다. 포철은 베스트11에 공격(박창현), 미드필드(박태하), 수비(홍명보) 부문에 각각 1명씩 배출했다. 박 감독은 “어렸을 때라 수상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나는 시즌 중간에 합류했기에 수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것이 팀원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그냥 팀이 이기는 게 좋았고 이기려고 열심히 했던 것뿐이다”라며 “지금 생각해보면 생애 한 번뿐인 기회였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볼걸 그랬다(웃음). 그때 허정무 선생이 이사하시고 집들이 하는데 기자들이 많이 온다고 나를 불렀는데 안 간다고 했다. 나는 그때 MVP 투표를 기자들이 하는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MVP를 수상한 홍명보 감독은 그 전에 “박창현 선배가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박 감독은 “그때 명보가 내 룸메이트였다. 예의상 한 말일 것”이라며 웃었다. 허정무 감독은 “우리 팀 선수들이 상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며 “지도자는 선수들이 좋은 결과를 얻으면 덩달아 좋다”고 말했다.
포철 구성원 모두에게 1992년은 잊을 수 없는 한 해로 남았다. 박창현 감독은 “그해 오버페이스를 했던 건지 1993시즌에는 몸이 다시 안 좋아졌다. 1992년은 나에게 최고의 해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992시즌을 마치고 이회택 감독은 팀의 지휘봉을 계획대로 허정무 감독에게 넘겼다. 허 감독은 “코치 생활을 하면서 우승을 경험하기 쉽지 않다. 향후 지도자 생활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던 시간들이다”라고 했다. 포철에서 마지막을 우승과 함께한 이회택 감독은 “아마추어 무대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시즌, 생각지 못한 우승컵을 들었다. 지금도 선수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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