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코 하청업체 오성(위)과 납품했던 대형 종이슬리브(안쪽 대롱). | ||
통화내용은 포스코 하청업체가 포스코로부터 불공정 거래를 당했다고 상담한 내용이었다. 문제는 공정위 담당 사무관의 말. “상대방은 포스코같이 막강한 대기업들이에요. 변호사를 써도 수십억짜리 변호사가 지금 덤빈단 말이에요.” “이런 포스코 같은 대기업 돈이 많잖아요. 로비하기 좋아요…(중략) 왜냐면 돈만 주면 다 하거든요…(중략) 국회의원부터 시작해가지고 청와대도 마찬가지고요. 저기 특히 언론은 더 심합니다. 포스코 같으면 얼마나 그 자금이 많겠어요.”
공정위 직원이 ‘포스코 같은 대기업은 이길 수 없으니 아예 이길 생각도 하지 마라, 그 배경에는 막강한 자금으로 국회, 청와대, 언론에 로비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공정위 직원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지만 배경이 된 하청업체의 사연은 어찌된 셈인지 금세 잊혀지고 말았다. 문제의 당사자인 납품업체 ‘오성’은 소형 기계부품 납품 회사로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구두계약을 해 생산설비를 늘렸다 납품이 이뤄지지 않아 피해를 본 경우”라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포스코의 전·현직 임직원 모임인 ‘중우회’의 또다른 위상과 역할도 도마 위에 올랐다. 임직원들이 포스코를 퇴직한 후 계열사 임원 혹은 포스코 납품업체의 임원으로 이직할 수 있도록 신분을 보장해 주거나 그들 업체의 안정적인 납품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는 의심을 사고 있는 것이다.
1989년 광주에서 설립된 오성은 포스코에 소형 기계부품을 납품하던 회사였다. 오성은 1998년 포스코 냉연부로부터 종이슬리브(sleeve:두루마리 화장지의 종이대롱처럼 얇은 철판을 감을 때 쓰는 대롱) 개발을 의뢰받았다.
당시 포스코 냉연부는 철슬리브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고객사인 중국의 철강회사 무석마쓰시다가 종이슬리브 사용을 요구해 오성에 개발을 의뢰한 것이다. 철판을 슬리브에 감았다 펴면 처음 100m는 주름이 져 폐기하게 마련인데, 종이슬리브는 쿠셔닝 효과로 폐기되는 부분이 30m로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오성은 그동안 소형 종이슬리브를 납품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형 종이슬리브 개발 의뢰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계열사인 포철기연이 철슬리브를 납품하고 있던 상황이라 머뭇거리던 오성은 포스코 측 팀장이 구두로 안정적인 납품을 약속해 개발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오성은 포스코 냉연부가 안정적인 납품을 위해 월 1만~1만 5000개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와 15일간의 재고분량을 확보할 수 있도록 요구해 11억 원을 들여 양산설비를 완공했다.
그렇지만 98년 개발의뢰한 종이슬리브는 2001년 5월에야 월 300개가 납품되고 2002년 6월부터 월 1200개가 납품되었다. 2003년 포스코의 냉연부장이 바뀐 뒤 오성이 이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자 재테스트에 들어갔지만 납품량에 변화는 없었다. 오성에 따르면 초기 약속한 납품물량은 연간 33억 원어치 물량인데 8년간 13억 원어치밖에 납품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2005년 8월 포스코는 ‘철강시장 악화 및 생산공정의 부하로 인한 테스트 불가로 종이슬리브 테스트는 무기한 연기함’이라고 결론내렸다. 오성 측은 “포스코 자체의 테스트 결과도 종이슬리브가 강도가 더 세고 품질도 우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품질 불량 때문이라고는 하지 못하고 다른 이유를 대고 있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포스코는 이에 대해 ‘종이슬리브를 사용하면 철슬리브와 함께 이중으로 공정을 관리해야 하므로 관리비용이 늘어나고, 주름진 롤과 슬리브를 폐기하기 위해 용광로에 넣을 때 종이는 불순물이 된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오성 측은 “아마도 철슬리브를 납품하는 계열사인 포철기연이 손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처음부터 우려는 했지만 현장 간부들이 구두로 납품을 약속했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다. 내부 사정 때문이기는 하지만 결국 대기업 때문에 하청업체의 기술과 설비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현재 오성은 포스코를 배임, 사기, 영업기밀 누설로 고발한 상태다.
한편 이와 관련해 포스코 전·현직 임원 모임인 중우회가 거론되고 있기도 하다. 박태준 전 회장부터 현직 임원까지를 망라한 모임으로 서울 대치동에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일반 직원들은 따로 동우회를 조직하고 있지만 회사 차원에서의 지원과 처우에 있어서 차이가 크다.
오성 측은 “아무래도 중우회가 계열사로 재취업이 가능하도록 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현직 직원들도 중우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포철기연의 사장은 대부분 포스코 출신이고, 포철기연으로부터 하청을 받아 철슬리브 제조를 맡은 태임공업 대표이사도 중우회 인사다”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에 대해 포스코는 “오성 측의 얘기는 사실과 다르다. 모든 계약은 전자경쟁입찰로 투명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구두계약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우회의 경우 박태준 명예회장도 현재 경영에 간섭하지 않고 있는 등 회사 경영과는 무관하다”며 반박했다.
한편 공정위원회는 녹취록에서 국회를 비하했다는 장본인으로 지목된 사무관의 거취에 대해서는 “현재 사실 관계를 파악중이다”라고 답변했다. 사안을 조사중인 감사관실은 “조사가 진행 중이라 뭐라 말할 처지가 아니다. 다만 오성 측이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법적 절차를 밟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데, 국회나 언론에 제보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연히 포스코 쪽에서 방어적으로 나올 테니 조사가 더 힘들게 된 점은 유감이다”라는 입장이다.
우종국 기자 woobea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