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희생활과학의 스팀청소기. 홈쇼핑에서 ‘대박’이 난 이 아이템은 순식간에 청소기 시장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왼쪽은 CF 장면. | ||
난데없는 스팀청소기의 출현과 정착, 성공을 지켜봐야 했던 대기업 가전메이커들은 그들의 난공불락 요새로 인정받았던 진공청소기 기능을 스팀 청소기에 결합시키면서 상황역전에 나서고 있다. 올해 여름부터는 ‘진공청소기+스팀청소기’가 하나로 합쳐진 스팀진공청소기가 가전업체의 화두로 부상하고 있는 것. 청소기 시장의 이런 변화는 레드오션도 생각하기에 따라 블루오션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레드오션이 되어 경쟁이 치열해지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지만.
현재 스팀진공청소기를 판매하고 있는 곳은 LG전자, 한경희생활과학, 유닉스, 한국하비비 등이다. 특히 LG전자와 한경희생활과학은 백색가전의 제왕 자리와 스팀청소기 전문메이커의 자존심을 건 상황이다.
TV홈쇼핑을 통해 스팀청소기를 히트상품으로 만든 한경희생활과학은 지금도 월 12만 대를 판매할 정도다. 아직까지 경쟁력을 갖춘 후발업체조차 없는 상태다. 스팀청소기라는 아이디어로 어엿한 전문 중견업체로 성공한 것.
그렇지만 스팀‘진공’청소기는 LG전자가 먼저 출시하면서 선수를 쳤다. 한경희생활과학이 스팀청소기를 주력으로 밀고 있는 사이 새로운 시장을 공략한 것이다. 5월 말 스팀진공청소기인 ‘스팀싸이킹’을 출시해 3개월 만에 1만 대를 판매하고, 현재 월 4000대 이상 판매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LG전자는 “청소기 시장을 통틀어 30만 원 이상의 고급청소기 시장규모가 월 2000대 미만인 것을 감안하면, 스팀싸이킹의 신장세는 고급청소기 시장규모를 키우며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바람몰이에 한창이다.
한경희생활과학도 8월 스팀진공청소기를 출시했다. LG보다 한발 늦은 출시에 대해 한경희생활과학은 “스팀진공청소기는 예전부터 개발을 해 놓았지만 지금도 스팀청소기가 잘 팔리고 있는 상황이라 굳이 스팀진공청소기를 주력으로 밀 필요성이 없어서 출시를 미뤄왔던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스팀청소기가 잘 팔리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진공청소기능을 합친 제품을 내놓을 필요는 없지만 후발업체들까지 가세하면서 스팀진공청소기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9월부터 판매를 개시한 한경희생활과학의 스팀진공청소기는 아직 본격적인 판매량이 집계되지 않고 있지만 월 3만∼4만 대 이상 팔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LG전자의 새 모델 ‘스팀싸이킹’. | ||
한편 LG전자는 프리미엄급 가격대로, 한경희생활과학은 합리적인 가격대로 승부를 걸고 있다. LG전자의 스팀싸이킹(V-KS820MJA)은 36만 9000원, 9월 출시한 스팀싸이킹Ⅱ(V-KS785MJA)는 31만 9000원으로 30만 원이 넘는 프리미엄급 제품이다. 한경희생활과학의 스팀진공청소기는 19만 8000원(SV-3000), 15만 8000원(SV-5000)이다.
LG전자는 “30만 원 이상급 고가 청소기 시장은 연간 2만 대 규모로 주로 유럽산 수입청소기(일렉트로룩스)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스팀싸이킹은 ‘스팀+진공청소기’라는 새로운 블루오션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경희생활과학의 판매량에는 못 미치지만 프리미엄급 시장에서는 독보적인 히트상품이라는 것.
LG전자는 자사 제품이 비싼 이유를 강력한 흡입모터와 첨단 편의장치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집진 필터가 헤파13급으로 0.3㎛ 먼지를 99.9%까지 걸러줄 수 있고, 스팀예열 시간을 경쟁사 제품의 3분의 1로 줄였다고 한다. 진공청소기 노하우가 뛰어난 LG전자로서는 스팀청소기보다는 진공청소기 기능에 더 주력했던 것. 스팀 기능이 없는 일반 싸이킹 제품도 20만 원이 넘는다.
한경희생활과학은 진공청소기능보다는 스팀청소 노하우를 더 살렸다. “LG전자 제품은 순간적으로 가열하는 방식이라 예열시간이 짧지만, 우리 제품은 보일러 방식으로 내부에 물을 끓여서 스팀이 나오는 방식으로 차이가 있다”는 설명이다. 꼭 필요한 기능만 갖추어 무게를 줄이고, 가격을 낮췄다고 한다.
또 한경희생활과학은 자사 제품에 습식 모터를 썼다고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스팀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습기에 내구성이 있는 습식 모터를 썼다. 아무래도 습기가 빨려 들어가 전기부품에 닿으면 쇼트나 누전, 화재위험이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LG전자는 “누전이나 화재의 위험이 있다면 KS검사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엄격한 국내 안전 기준을 모두 충족했기 때문에 그런 우려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미 전기 밥솥 사고로 ‘충분히’ 고생을 한 LG전자로서는 안전에 만전을 기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두 회사는 서로를 경쟁상대로 보지 말아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주력 제품이 공략하는 시장이 다르다는 이유다. LG전자는 높은 기술력으로 프리미엄급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면, 한경희생활과학은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전략으로 TV홈쇼핑 판매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헤어드라이어 등의 미용용품 전문업체인 유닉스도 올해 3월 스팀진공청소기 래픽스(Rapix)를 출시했다. 기존 제품만으로는 성장에 한계를 느낀 유닉스는 업종 확장을 모색하던 중 20년 전 삼성전자와 금성전자(현 LG전자)에 청소기를 OEM으로 납품한 경험을 살렸다. 또 헤어드라이어에 쓰이는 가열기에 대한 노하우를 스팀기능으로 살렸다. 가격은 한경희생활과학 엔트리급 모델인 SV-5000과 같은 15만 9000원이다. 출시 이후 월 2000대 수준으로 팔리고 있다고 한다.
MP3 플레이어 시장을 선점했던 모회사는 구매력과 부품확보에 유리한 대기업이 시장에 본격 진입하자 순식간에 시장을 내줬다. ‘스팀청소’라는 아이디어 하나로 등장한 전문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승부가 이번에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주목받고 있다.
우종국 기자 woobea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