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없~다 17일 김대중기념사업회가 개최한 토론회에 박근혜 후보, 안철수 후보, 이희호 여사를 비롯 동교동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으나 문재인 후보는 불참했다. 문재인 캠프의 판단미스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남기신 꿈, 이제 저희가 실천할 때입니다. 햇볕정책의 성과를 계승하여 더 발전시키겠습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그 분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지난 17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주제로 김대중기념사업회가 개최한 토론회에서는 이처럼 주요 대선후보들의 ‘DJ 예찬’이 쏟아졌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발언의 주인공은 DJ의 후예를 자처하는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인 문재인 후보가 아니었다. 첫 번째 발언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두 번째 발언은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그 주인공이었다.
▲ 문재인 후보. |
현장에 있던 민주당 인사들, 과거 DJ를 모셨던 동교동계 인사들 사이에서 “이게 무슨 경우냐”는 말들이 오갔다. 박 후보가 과거 DJ의 비서실장 출신인 한광옥 전 의원을 대동한 채 일찍부터 자리를 지키고 안 후보가 ‘햇볕정책 계승’을 강조할 때 DJ를 배출한 민주당 대선후보는 엉뚱한 곳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박 후보와 안 후보가 DJ의 부인 이희호 여사,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 등과 나란히 선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선 “대형 사고”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문 후보가 이날 불참한 이유는 토론회 일정이 너무 늦게 전달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충북 지역에서 하루 종일 7개의 일정을 소화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는데, 육영수 여사의 고향인 이 지역이 박 후보의 강세 지역이어서 일정을 취소하기도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안 후보가 참석하는 줄은 알았지만 박 후보까지 가는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 안팎에선 이날 문 후보의 토론회 불참 해프닝이 집중력을 잃고 다시 흔들리는 듯한 문 후보의 최근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기류다. 이날 토론회가 오전 10시 시작된 만큼 의지만 있었다면 그 정도 일정 조정은 가능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한 재선의원은 “여러 일정과 행사를 놓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데 DJ 관련 행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문 후보 측이 간과한 것 같다. 가뜩이나 호남에서 안 후보에게 밀리고 있는데…”라며 혀를 찼다. 특히 문 후보의 영상 메시지도 불과 하루 전 부랴부랴 준비됐다는 얘기가 돌자 당내에선 “선대위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는 질타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추석 연휴를 거치면서 확실히 상승세를 탄 것처럼 여겨졌던 문 후보의 위기 징후는 이뿐만이 아니다. 좀처럼 자기 자랑을 못하는 문 후보가 드러내놓고 자신감을 표할 정도로 좋았던 분위기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계속 3위에 머무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이런 위기감이 파열음으로 분출되는 양상이다. 선대위 핵심 관계자조차 “지금은 일부 ‘튀는 발언’에 불과하지만 여기서 제대로 다잡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힘이 빠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을 정도다.
문 후보의 위기를 보여주는 두드러진 징후는 무엇보다도 당 소속 의원들과 지역위원장 등의 무관심이다. 문 후보는 127명의 의원들을 선대위에 모두 배치했지만, 의원들이 선대위에 녹아들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의원은 ‘선대위에서 뭘 맡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문자 메시지를 확인해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의원은 선대위 내에서 복수의 직책을 부여받았지만 회의에 참석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는 “국정감사 준비에 바쁘지만 그보다도 뭘 할 수 있는지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마음대로 인선하고, 그 결과를 문자 메시지로 통보하니 누가 일할 맛이 나겠느냐”고 되물었다. 의원들이 주로 배치된 선대위 내 각종 본부의 본부장을 맡고 있는 한 의원도 “국정감사가 끝나면 잘 굴러갈 것”이라면서도 의원들 모으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손학규 후보를 도왔던 사람들이 잇따라 안철수 캠프로 결합하고 있는 것도 문 후보의 위기를 보여주는 주요 징후다. 손학규 캠프 공보팀장을 맡았던 김경록 씨가 첫 테이프를 끊은 데 이어 강석진 언론특보가 자리를 옮겼고, 정책팀원 대부분도 한꺼번에 안철수 캠프로 이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내에선 “손 후보가 그들을 안 후보에게 보내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그들이 이동하는 걸 용인했을 것”이라며 “‘경선 불복’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 문 후보의 위상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증거”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한 고참 당직자는 “문 후보가 말로는 ‘용광로 선대위’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당을 제대로 끌어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당직자는 “대선후보 경선을 ‘친노(친노무현)의 승리’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문 후보가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다독이는 것이었다”며 “하지만 문 후보와 제대로 대화 한 번 못해 본 의원들이 허다하고, 당직자들은 더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파 의원을 뺀 민주당 의원은 기껏해야 70~80명 수준인데 후보가 전화 한 번 걸 여유가 없어서 당직자를 통해 문자 메시지로 선대위 인선 결과를 통보했다는 얘기냐”며 “가뜩이나 의원들은 물론 당직자들까지 문 후보와 안 후보 중 누가 ‘진짜 후보’가 될지 관망하고 있는데, 이런 식이면 문 후보가 단일화 경쟁에서 정당 후보의 이점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선거 경험이 많은 한 의원은 “이게 다 ‘이해찬-박지원 담합’ 때문”이라고 화살을 돌렸다. 이 의원은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문 후보를 대신해 선대위를 총괄 지휘하는 사령탑이 없다는 점”이라며 “선대위 덩치가 커졌음에도 여전히 ‘친노가 다 해먹는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는 후보를 중심으로 한 일부 실무진들만 움직이고 나머지 의원들이나 당 조직은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평소 같으면 당대표가 2인자 역할을 하면서 후보 대신 선대위와 당을 지휘해야 하는데 이해찬 대표는 ‘이-박 담합’ 책임론에 발이 묶였고, 이를 대체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대위 총무본부장을 맡은 우원식 의원과 초선의 황주홍 의원 등이 잇따라 공개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상황과 무관치 않다.
명분에 집착한 ‘수평적 선대위’ 구상도 실행 단계에 들어가자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선대위 관계자는 “날카로운 정세 분석과 고차원의 전략을 수립해 집행해야 할 컨트롤타워가 없다보니 일을 하고 싶어도 뭘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현안에 대응하는 것조차 벅찬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현장 기자들의 취재에도 애로사항이다. 일반적으로 주요 선거가 치러질 때 선대위원장이 그날그날 선대위의 메시지를 내놓고 선대본부장이 전략을, 정책위원장이 정책을, 대변인이 현안 대응을 맡아 왔다. 하지만 문 후보 캠프의 경우 선대위원장이 10명이나 되지만 이 중 ‘선대위의 최종 스피커’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전략과 정책, 공보 등 대부분의 업무는 우상호 공보단장에게로 쏠려 있다. 선거 경험이 많은 고참 기자들 사이에서는 “문 후보가 정책 공약도 가장 많이 발표했고 현장 일정도 가장 많이 수행하고 있는데도 뭐 하나 제대로 이슈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임팩트를 제대로 주지 못하고 백화점식 나열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오가고 있다.
문 후보 측도 최근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있는 듯하다. 추석 연휴 이후 꾸준한 지지율 상승을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정체되거나 오히려 상승세가 꺾인 것으로 나타난 여론조사 결과가 잇따라 발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새누리당 및 박근혜 후보 지지층을 빼고 안 후보와 야권단일후보 적합도 조사를 실시할 경우 문 후보가 안 후보보다 10%포인트 이상 뒤처지는 조사 결과도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민주정책연구원도 최근 전문가와 시민, 출입기자 등을 상대로 FGI(focus group interview·표적집단면접) 조사를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FGI 조사는 일반 여론조사에 비해 훨씬 심층적이고 다각적인 분석이 가능하다.
우상호 공보단장은 “빅3 후보 모두 지지율 정체에 빠진 지금은 축구로 치면 관중들이 모두 빠져나간 상태로 봐야 한다”며 “단일화라는 게임이 시작되면 다시 관중들이 몰려들 것이고, 그때부턴 문 후보의 장점이 국민들에게 더 많이 알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내 상황을 보면 우 단장의 전망은 지나친 낙관론으로 들린다. 실력이 향상되지 않은 선수들이 게임에 나선다면 게임 자체가 관심을 못 끌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공헌 언론인
왜 ‘김두관’이 오버랩될까
최근 안철수 선거 캠프 행을 검토했었다는 전직 민주당 의원 보좌관은 “마음을 접었다”고 말했다. 이미 안철수 캠프에 결합해 있는 동료들로부터 캠프 운영 상황과 방식 등을 전해 듣고는 ‘탈당이라는 부담까지 안으면서 모험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는 “안철수 캠프는 대선 캠프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이라며 “내적인 역량 부족을 ‘수평적 선거캠프’, ‘자생적인 포럼’ 등 좋은 말로 커버하고 있을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일부 민주당 쪽 인사가 안철수 캠프에 결합했다가 다시 빠져나왔다는 얘기도 들린다.
컨트롤타워 없이 제각각 굴러가는 듯한 캠프 운영 방식도 문제이지만, 민주당 사람들의 ‘안철수 회의론’을 증폭시키는 가장 큰 원인은 기대했던 것보다 준비가 안 된 것 같은 안 후보에게 있다. 한 3선 의원은 “안 후보가 민주당을 향해 ‘정치 쇄신’을 강하게 요구하기에 뭔가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의 밑그림이 있는 줄 알았는데 계속 원론적인 얘기만 하고 있다”며 “민주당과 차별화하려면 안 후보가 생각하는 정당의 모습, 국회의 모습 등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의원은 “김두관 후보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 때 ‘구체적인 공약은 천천히 밝히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내놓은 게 없었다”며 “안 후보가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자꾸 김 후보와 오버랩된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안 후보 말에 따르면 정책공약이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시점이 11월 10일이라는데 대선 40일 전, 후보 등록 15일 전에 공약을 내놓고 무슨 국민적 평가를 받겠느냐”며 “이는 ‘나 준비 안 된 후보요’라고 선언한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본격적인 단일화 국면에 들어가면 안 후보가 문 후보와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한 재선의원은 “민주당과 진보적 시민사회, 학계 등이 문 후보를 돕고 있는 것과 달리 안 후보는 사실상 ‘원맨쇼’를 하고 있다”며 “국정경험이 전무한 안 후보가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못 받는다면 결국 제3후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