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벌집을 털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일당이 검찰에 붙잡혔다. 영화 <도둑들>의 한 장면. |
지난해 3월 15일 오전 10시경 부유층 밀집지역인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중견기업 오너인 A 씨 집에 장 아무개 씨(58) 등 4명의 괴한이 침입했다. 낮 시간에 안심하고 보안장치를 꺼뒀던 것이 화근이었다. 괴한들은 A 씨의 가족들과 가사 도우미 등을 협박해 현금 1억 원과 금괴와 고가의 패물, 30억 원 대 조선시대 백자 등을 털어 유유히 사라졌다. 하지만 일명 ‘이태원 떼강도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은 A 씨 측이 신고를 하지 않은 탓에 무려 8개월 후에야 세간에 알려졌다. 청운동의 부잣집에 침입해 강도행각을 하다 붙잡힌 주범 장 씨가 여죄를 추궁 받는 과정에서 8개월 전 범행을 자백한 것이었다.
주목할 것은 장 씨가 8년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장 씨는 지난 2002년 현대그룹 대북송금사건의 주역인 무기브로커 김영완 씨의 평창동 자택에서 180억 원대의 금품을 털었다가 붙잡혀 7년을 복역했던 인물이었다.
주범 장 씨와 일당들이 차례로 구속되면서 부유층들을 바짝 긴장시켰던 이 사건은 일단락된 듯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비록 현장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배후에서 장 씨 일당의 범행에 필요한 각종 정보들을 제공해온 공범 김 아무개 씨(45)를 검거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본업이 자동차 판매원인 김 씨는 수배 중임에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세일즈를 하며 사정기관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다녔다. 하지만 제 버릇 남 못준다고 했던가. 김 씨의 범죄본능이 되살아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충격적인 것은 새로운 범행을 계획한 김 씨가 접촉한 사람이 현직 경찰이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4월 김 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서울 양천경찰서 류 아무개 경사(54)와 만난 자리에서 새로운 범행 계획에 대해 얘기했다.
“형님, 나 조만간 큰 거 하나 할 것 같은데~”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그 유명한 N 사 알죠? 성북동에 N 사의 H 회장이 사는데 그 집에 현금이 그렇게 많다네? 평소 집안에 50억 원 정도는 쌓아두고 사나 보더라고요.”
“에이~ 큰일 날 소리~.”
경찰로 잔뼈가 굵은 류 경사가 보기에 그것은 성공 가능성 제로에 가까운 허황된 범행이었다. 보통 대기업 회장들이 모여 사는 부촌에는 경비가 철저히 되어 있는 탓에 외부인이 잠시만 어슬렁거려도 관리인이 제지를 하고 감시카메라 경보음이 집안으로 전달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 씨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자신이 꾸미고 있는 범행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형님~ 그러지 말고 내 얘기 한 번 들어보쇼~ 이건 그냥 된다니까. 인생 뭐 있소?”
자동차 판매원인 김 씨는 직업상 재력가들의 운전기사나 집사, 대기업 회사 관계자 등과 자연스레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이들을 통해 김 씨는 재력가가 거주하는 집 주소는 물론이고 현금 및 귀중품 규모, 집 안팎 구조와 사람들이 드나드는 시간, 금품 보관 장소, 경비 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한 것이었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김 씨의 범행 계획은 생각 이상으로 치밀했다. 이미 이태원 강도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기획한 바 있던 김 씨는 더욱 철저히 계획을 세웠다.
김 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범행 파트너를 모으는 일이었다. 김 씨가 류 경사에게 범행과 관련된 계획을 털어놓은 것도 범행에 현직경찰인 류 경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펄쩍 뛰던 류 경사였지만 김 씨의 얘기를 들어보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박봉인 데다가 주식투자 실패 등으로 4억 여 원의 빚이 있어 생활고를 겪던 류 경사에게 김 씨의 제안은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현직 경찰 신분으로 수차례 갈등을 하던 류 경사는 결국 김 씨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류 경사의 합류로 범행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경험상 완전범죄를 위해서는 역할분담이 필수적이었다.
우선 김 씨는 범행대상 선정 및 역할분담, 범행 날짜와 시간 등을 정하는 등 전반적인 기획책을 맡았다. 류 경사에게는 치안상황 및 단속 정보 제공, 대포폰과 대포차량을 마련하는 업무가 주어졌다.
범행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김 씨는 류 경사에게 총기를 가져올 것을 요구했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다”는 류 경사의 거절로 무산됐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삼엄한 경비망을 뚫는 것과 ‘꼬리’를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곳곳에 설치돼 있는 CCTV는 사각지대가 거의 없어 어떤 식으로든 정체를 노출시킬 수밖에 없었다. 또 설령 집안에 침입해 금품을 훔쳐 나온다 해도 집안 곳곳에 남아있을 지문과 족적 등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이에 김 씨는 파격적인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실제 범행현장에 신원조회가 되지 않는 중국인들을 투입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김 씨는 범행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특수부대 출신의 중국인 4명을 물색해서 국내로 입국시킨 뒤 1인당 200만 원씩 주기로 하고 고용했다.
일당들은 범행에 필요한 만능열쇠를 만드는 등 세부적인 작업에 착수했고 사전답사와 각자 맡은 역할수행 등 예행 연습 날짜까지 잡았다.
모든 것이 완벽해보였다. 계획대로 착착 실행만 된다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 H 회장 집에 있다는 50억 원 상당의 현금과 금품 등을 빼돌리기만 하면 이들에게는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었다. 김 씨 등은 강탈한 돈을 분배할 장밋빛 꿈에 젖어 범행날짜만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하늘은 이들 편이 아니었다. 이들의 야심찬 범행은 개시조차 못하고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유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모든 범행을 기획하고 총괄 지휘했던 김 씨 때문이었다. 이태원 떼강도 사건 등 범행에 각종 정보를 제공했던 김 씨가 그간 끈질기게 배후 공범을 추적해온 검찰 수사망에 포착된 것이었다. 결국 범행 예정일을 며칠 앞둔 7월 12일 김 씨는 검찰에 붙잡히고 만다.
휴대전화 음성녹음 파일을 복원한 검찰이 N 사 H 회장 자택을 대상으로 범행을 모의한 내용을 발견한 것이다.
휴대전화 통화내용에는 ‘특수부대 출신 중국인들을 데려와서 범행을 시키자’ ‘현직 경찰을 알고 있는데 끌어들이면 수월할 것 같다’ ‘총기를 가져오라 하면 좋을 것 같다’ ‘역할을 분담해 제대로 해보자’는 등 그간 김 씨가 준비해온 범행계획이 모두 담겨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토록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던 김 씨가 큰 실수를 했다는 점이다. 김 씨 일당이 범행대상으로 지목했던 H 회장의 집은 수개월 전부터 내부 리모델링 작업 중이었으며 H 회장 가족들은 이미 다른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H 회장의 집에 50억 원 상당의 현금과 금품이 있다는 정보도 사실과 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게 덜미가 잡히지 않아 범행이 성공했더라도 김 씨 일당은 예상했던 큰 수확을 얻지 못했을 거란 얘기다.
부산지검 동부지청 형사3부 김욱준 부장검사는 “강도 범행 대부분이 현장에 남긴 지문이나 CCTV를 통해 꼬리가 잡힌다. 김 씨 등은 이를 피하기 위해 지문 등으로 추적이 힘든 중국인들을 현장에 투입하려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특히 “정보제공책 총괄지휘책 현장지휘책 범행 및 도피지원책 등 세세하게 역할을 분담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범행이 성공했더라면 이들은 추적이 어려운 중국인들을 이용해 또 다른 추가범행을 공모했을 것”이라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