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이 10월 26일 도청의혹과 관련해 돌연 정수장학회를 압수수색했다. 기자들이 입구에서 검찰 직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이어 박 후보는 김지태 씨와 관련해 “김 씨는 4·19 때부터 부정축재자 명단에 올랐고 5·16 이후 부패 혐의로 징역 7년을 구형받는 과정에서 처벌받지 않기 위해 먼저 재산을 헌납한 것”이라고 응수했다. 기자회견 이후 야권과 김지태 씨 유가족들은 “박 후보가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사과를 요구하는 한편 법적 고발까지 고려하는 등 장학회를 둘러싼 갈등이 좀처럼 수습되지 않고 있다.
정수장학회 전신인 부일장학회는 정권의 강압에 의해 헌납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죄를 덮고자 스스로 바친 재물일까. 그 실마리는 2007년 발간됐던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일요신문>은 당시 발간된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를 입수 분석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정수장학회 논란의 시작과 끝을 추적해보았다.정수장학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공익재단이다. 1982년 1월 이름이 바뀌기 전에는 5·16장학회로 불렸고 그 전신은 김지태 당시 부산일보 사장이 만든 부일장학회였다.
부일장학회는 60년대 부산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장학재단이었다. 김 씨의 유가족들은 국정원 진실위 조사 과정에서 “1958년 설립돼 1962년 국가에 헌납하기 전까지 학생 1만 2364명에게 모두 1억 7300여 만 환을 지급했다”고 밝혀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불행은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김지태 씨가 부정축재혐의로 구속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해 12월 환수금으로 5억 4570만 환을 낸 김지태 씨는 이듬해 5월 국내재산도피방지법, 관세법 및 형법, 농지개혁법 위반 혐의로 다시 구속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는다. 이 과정에서 김지태 사장은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지분을 국가에 헌납하고 부일장학회 소유의 부산 서면 일대 땅 10만여 평을 정부에 무상으로 기증한다는 기부 승낙서를 쓰고 이틀 뒤 석방된다. 이것이 부일장학회 헌납 사건의 ‘드러난’ 개요다.
하지만 2005년 발족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국정원 진실위)는 “1962년 ‘부일장학회 헌납 사건’은 공권력의 남용에 따라 강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당시 발간된 진실위 보고서를 보면 “5·16 직후 부정축재와 관련해 처벌을 받은 기업인 가운데 재차 구속돼 재산을 내놓게 된 경우는 김지태 씨가 유일했다”라고 적시돼 있다.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유가족들은 본격적으로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을 요구하고 나섰고 지난 2010년에는 주식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국정원 진실위는 부일장학회 사건을 조사하면서 유가족을 포함한 부일장학회 관련자와 옛 중앙정보부 직원, 장학회 관계자들을 차례로 면담하며 구체적인 증언을 확보해 나갔다. 이 중 가장 확실한 증거는 김지태 씨가 1962년 사인한 기부 승낙서에서 발견된 오류와 가첨 흔적이었다. 김 씨는 구속 상태였던 1962년 6월 20(二十)일 기부 승낙서에 서명했지만, 서류상에는 석방 이후인 30(三十)일로 기재돼 있어 누군가가 ‘一’자를 가첨한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이에 따라 국정원 진실위는 “구속 상태의 서명은 김 씨 측의 반발을 살 수 있다고 판단한 중앙정보부에서 김 씨가 석방된 이후에 기부한 것처럼 꾸민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또 재산 헌납 과정에서 중앙정보부가 치밀하게 공작을 꾸민 정황도 포착된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김 씨를 구속하기 직전 그의 처인 송혜영 씨를 “해외여행 후 귀국할 때 7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와 고가의 카메라 등을 소지하였음에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구속했는데 이는 일본에 있던 김지태 사장을 귀국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이다.
또 진실위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인 박 아무개 씨가 김지태 씨에게 ‘군이 목숨을 걸고 혁명을 했으니 국민 재산은 우리의 것’이라며 ‘살고 싶으면 재산을 헌납하라’고 종용했던 점 등을 인정해 헌납 과정에서 상당한 압력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반면 2010년 유가족들이 낸 주식반환 청구소송 1심 당시 재판부는 “헌납 과정에서 강압은 있었지만 김지태 사장이 의지를 모두 잃은 상태는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또 “시일이 오래 지났기 때문에 재산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정을 내렸다. 박근혜 후보가 최근 기자회견에서 판결 내용을 잘못 인식한 것도 바로 이 부분(헌납 과정에서 강압은 있었지만)이다.
이 밖에도 보고서 내용 중 눈길을 끄는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 씨와의 ‘개인적’ 관계를 언급한 부분이다. 박 전 대통령이 5·16을 일으키기에 앞서 당시 부산일보 사장이던 김지태 씨를 찾아 ‘거사자금’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보고서에는 “박정희 장군이 자금 지원을 직접 부탁하기 위해 부산일보 사장 부속실에서 기다리던 중 김 씨가 급히 출타하며 그냥 지나치자, 박 전 대통령이 이를 문전박대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며 악연이 시작됐을 것”이라는 유가족 측의 주장을 담았지만 이 부분에 관한 별도의 조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에 따르면 김지태 씨가 설립한 부일장학회는 강압에 의한 헌납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지만 일각에서는 보고서 자체가 부일장학회 혜택을 입은 대통령(고 노무현 전 대통령) 정권에서 작성됐기에 편향된 부분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박 후보의 기자회견 이후 새누리당에서는 “김지태 씨는 자서전 <나의 이력서>에서 ‘내가 운영하던 부일장학회와 공익재단의 문화 사업이 5·16장학회의 공영제운영으로 넘어갔다. 나는 이와 같은 운영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또 만족스레 생각한다’고 남긴 글도 있다”며 기부를 직접 승낙했던 사안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당 자서전에는 정반대의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 자서전을 통해 김 씨는 “내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고 나선다면 우선 산하 기업체 간부들이 희생을 당하는 데다 기업경영이 엉망이 되어 종업원 수천이 실종하게 될 것이다” “석방된 연후에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버티었으나 막무가내로 어느 날 작성해 온 각종 양도서에 강제로 날인이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당시 상황을 기술했다. 실제 김지태 씨는 1962년 석방된 이후부터 1982년 사망하기까지 장학회 및 언론사 주식 반환을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
▲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추모식에 참석한 박근혜 후보.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4·9통일평화재단 안경호 조사실장은 “정수장학회를 사회에 완전히 환원하는 방식과 과정은 여러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점은 최필립 이사장 퇴진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이 이사장이기도 했던 박근혜 후보가 일정 부분 책임감을 갖고 적극적인 해결에 나서야 한다”라고 전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박근혜, 날조하지 말라”
-어제(10월 25일) 박 후보에게 사과를 요구한 기자회견은 어떻게 이뤄지게 됐나.
▲기자회견에서 아버님에 대한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보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특히 박 후보가 기자회견에서 4·19 혁명 때 시민들이 우리 집 앞에서 데모를 했다고 주장했는데 완전히 날조된 이야기다. 당시 우리 집이 큰 거리에 있었는데 부산 학생들과 시민들이 마산으로 시위하러 가는 모습을 집 안에서 한가롭게 구경한 기억이 있다. 이를 시민들이 우리 집 앞에서 데모한 것처럼 이야기한 것은 파렴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부정축재자인 김지태 씨 재산 환수는 당연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부정축재에 관한 것도 모두 근거가 없이 조작한 이야기다. 필요하다면 어떤 사람과도 이 문제로 토론할 수 있다.
-부일장학회 기부 당시 재산은 국방부로 귀속됐기 때문에 정수장학회와는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부분은 <정수장학회 30년사>를 찾아보라. “정수장학회는 부일장학회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분명히 나온다. 박근혜 후보는 10년 동안 이사장을 했는데도 장학회 역사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박 후보는 2005년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 정수장학회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지난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재론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장학회가 있을 때 이사장을 한 번도 안 했지만 박정희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마찬가지로 박근혜 후보 역시 부모님 때문에 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사람이다. 이번에 정수장학회 주식을 판다는 대화록만 봐도 누가 관련이 없다는 말을 믿어주겠나.
-현재 정수장학회 측과 주식반환에 관련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1심에서 패소했는데 이를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소송과 관련해서는 복잡한 사안이 많기 때문에 단정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에서 국가가 개인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소멸시효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전향적인 판결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기대를 걸고 있다.
-앞으로 정수장학회는 어떻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최필립 이사장을 비롯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람들이 전부 물러나야 한다. 그 뒤 새로운 이사진과 유가족들, 그리고 명망 있는 사람들이 모여 새롭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본다. [수]
김지태 친일·부정축재 의혹 따져보니…
기회주의자? 육영사업 후원자?
부산을 대표하는 기업인이자 언론인이었던 김지태 씨는 광복 직후 한국생사, 조선견직, 삼화고무 등을 만들어 부산의 제일 가는 기업인으로 성장했고 자유당 시절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서울엔 이병철(삼성그룹 창업주), 부산엔 김지태”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기업가로서 그에 관한 평가는 좀 엇갈린다. 1962년 2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 아무개 씨가 작성해 상부에 보고한 ‘정치인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부일장학회의 장려로 인해 국가에 큰 도움이 되며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반면 같은 시기 작성된 경찰 보고서에는 김 씨에 관해 “금권과 권력에 의해 변절하는 기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정치적 역량 강화를 위해 부산일보와 육영사업 등에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다”라고 상반되게 기술했다.
정수장학회와 관련해서도 일각에서는 김지태 씨가 부정축재한 재산을 기부받은 것은 정당했다는 옹호론과 함께 과거 친일 행적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이 세운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증여받은 땅을 통해 자산을 증식하기 시작했고 부정축재로까지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또 박정희 정권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낸 이기창 변호사는 최근 채널A와의 인터뷰에서 “부일장학회를 강탈당했다고 주장하는 유가족들의 주장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부일장학회 소유 재산이었던 부산 땅은 정수장학회가 아니라 국방부로 귀속됐다. 부일장학회는 정식 등록된 공익법인도 아니었고,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서로 기부하겠다고 나서는 분위기였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에 관해 유가족 측은 “정권 차원에서 친일 행적 및 부정축재 의혹은 샅샅이 조사했지만 드러난 게 하나도 없었다”라고 반박했다. 실제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김지태 씨의 이름은 수록되지 않았다.
정수장학회 공동대책위 집행위원장을 맡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백번 양보해 김지태 회장이 친일 행적과 부정축재를 했다고 치자. 그런 재산을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더 큰 친일파이자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헌납한다는 것이 타당한 소리인가”라고 반박하며 “유가족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김지태 사장과 그 유가족을 친일파, 부정축재자라 몰아세운 것은 분노해야 할 행위”라고 전했다. 한 교수가 속한 정수장학회 공대위는 최근 박근혜 후보 캠프 측에 정수장학회 관련 ‘끝장토론’을 제안한 상태다.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