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S의 황태자’ 김현철 씨(왼쪽)는 아버지에게 고급정보를 보고해 무한신뢰를 얻었지만 ‘박경식 테이프’사건으로 인해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최형우 전 장관(오른쪽)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아직까지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일요신문 DB,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특히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는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는 한국 정치의 불치병이다. 이명박 정권 또한 ‘형님’이자 2인자 행세를 했던 이상득 전 의원이 현재 영어의 몸이 돼 있다. 정권 때마다 되풀이되는 ‘2인자’들의 비리와 전횡은 경제난에 고통 받는 국민들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기고 있다.
<일요신문>은 18대 대통령 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역대 정권 2인자의 최후’라는 연재를 기획했다. 정권 때마다 반복되는 2인자들의 권력 사유화와 구속의 악순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역대 정권의 2인자 관리 실패 사례를 다뤄보고 해결책은 없는지 탐색해보고자 한다.
김현철(金賢哲:1959년 3월 8일~).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정치가 꿈”이라고 말해왔던 그는 평범한 샐러리맨(쌍용증권) 생활을 그만두고 1987년 아버지를 대통령 자리에 올려놓고자 유세에 뛰어든다.
당직자를 잘 믿지 않는 YS를 대신해 김현철은 직접 사조직 꾸리기에 나선다. 친구들과 여론조사기관인 ‘중앙조사연구소’를 만들었다가 이를 ‘민주사회연구소’로 바꾸고 그 유명한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나사본)’으로 업그레이드한다. YS는 공식 라인에서 올라온 보고보다 현철의 보고를 더 믿었다고 한다.
나사본이 방송국 앵커들만 쓰던 프롬프터를 YS 앞에 내놓으면서 효과를 보자 세간에서는 “YS가 갑자기 똑똑해졌다”는 이야기가 회자됐다. 현철 덕이다. YS 정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조직이 민주산악회(민산)와 나사본인데 민산은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나사본은 현철이 주도했다. 현철은 또 YS의 선거기획을 맡은 ‘동숭동팀’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YS가 대통령이 된 직후 동숭동팀 인사들을 청와대, 경찰, 군, 안기부 등 요직에 앉혀 ‘비선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얻어진 별명이 ‘소통령’(小統領)이다.
87년부터 이어져 온 ‘대통령제 5년 단임제’. 제왕적 권력이 임기 시작부터 레임덕이 일 때까지 약 3~4년간 이어진다. 이 기간 현철은 소통령이자 ‘소산’(小山:YS의 아호는 ‘거산’(巨山))이었다. 홍준표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는 2년 전 “전두환 때는 양녕대군 전경환 씨가, 노태우 때는 LP(리틀 프린스) 박철언 씨가, YS는 소산이, DJ 때는 홍삼트리오가, 노무현 때에는 봉하대군 노건평 씨가 설쳤다”고 했다. 실세 현철도 역대 정권의 숨은 2인자였다.
현철은 일요일마다 청와대로 갔다. YS와 함께 가족예배를 보고 점심을 먹었다. 이 자리에서 현철은 일주일간 수집한 각종 ‘고급 정보’를 아버지에게 보고하고 칭찬을 들었다. 그가 동숭동팀을 ‘정보의 길목’마다 배치했으니 그의 정보가 얼마나 따끈따끈한 것이었는지 대충 상상이 간다. 문제는 그의 ‘정보보고’가 각 관련기관 수장이 보고하기 전에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YS는 그 뒤 손바닥 들여다보듯 이미 아는 것을 보고받았고 보고를 받으며 귀를 후볐다. 모두가 ‘아들보다 못한’ 부하들이니 한심하기 짝이 없게 보였을 것이다. 공권력의 권위가 무너질수록 현철은 아버지로부터 ‘무한신뢰’를 받았다.
하지만 그런 ‘현철의 힘’을 ‘내리막길’로 들어서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국정농단사건’으로 비화한 ‘박경식 테이프’다. 현철의 나이 당시 서른여덟, 아버지를 잘 둔 덕에 권력의 단맛을 3년이나 누린 ‘YS의 황태자’ 현철은 박경식 비뇨기과 원장에게 뒤통수를 맞는다.
박경식은 비뇨기과 원장실에 CCTV를 설치해 환자들을 테이프로 녹화해 왔다. 어느 날 현철이 왔다. 그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전화로 YTN 사장 인사문제를 이야기했다. 당시 YTN 사장으로 거명된 사람은 김우석 전 내무장관. 현철은 수화기에 대고 당시 미림팀으로부터 받은 도청자료를 본 듯 이야기하며 ‘아무개와 아무개랑 만나서 얘기를 해봤는데’ 등등 누가 보아도 인사 개입에 나서고 있다는 대화를 이어간다.
이게 언론에 공개되면서 현철의 말로는 처참하게 구겨진다. YTN 사장 인사에까지 감 놔라 배 놔라 했으니 그의 ‘인사 개입’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가늠하느라 정치권이 바빠졌다. 국무총리 인사에 개입했느니, 장군 승진에까지 손을 썼느니…. 그러면서 당시 정치권에서는 ‘도청으로 흥한 자 도청으로 망한다’는 우스갯소리가 회자했다. YS 당선 뒤 “모든 권력은 소통령으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고 “청와대보다는 현철에게 줄을 서는 게 빠르다”는 말도 있었는데 이 ‘실질적 2인자’ 현철은 한보사건에 연루돼 구속 수감된다. 현직 대통령 아들로 구속되는 첫 사례였다.
2004년 9월이다. 검찰은 현철이 17대 공천을 앞두고 조동만 전 한솔그룹 부회장으로부터 선거운동 명목으로 9차례에 걸쳐 영수증 처리를 하지 않고 20억 원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수사하다 이를 증명하는 각서 하나를 찾는다. 발뺌하던 현철은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는데 검찰이 긴급체포하는 과정에서 작은 ‘사건’이 일어난다. 검사실에서 조사를 받던 현철이 변호사를 만나고 가족과 통화하고 나서 검사실에서 서성거리다 여직원 책상 위에 있던 송곳을 들고 복도로 뛰쳐나가 자신의 복부를 다섯 차례나 찌른 것이다. “살고 싶지 않다”고 외치면서 말이다. 어떻게 되었냐고? 강남 성모병원으로 이송된 그를 진단한 결과, ‘상처는 1cm가량의 상처 두 곳과 0.3cm가량의 상처 세 곳으로 가벼우며, 이 정도 상처는 구치소 수감에 큰 지장이 없다’였다. 그렇다. 현철은 ‘살고 싶었던’ 것이다.
현철은 아직 정치권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정치권의 중심과 변방을 오가며 구설에 오른다. 지난 7월 현철은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에 대해 “이회창 씨의 아들 병역문제보다 훨씬 큰 논란거리가 있다. 사생활 부분이라 뭉뚱그리겠다”고 했는데 인터뷰가 이어지자 “(YS가 박근혜를) 부도덕한 인물로 본다”든지, “박 후보도 2007년 경선 당시 ‘DNA 검사를 받겠다’고 했는데 그 이상의 얘기들이 더 나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근혜 후보 진영으로부터 법적 대응을 받게 된다. 그의 이런 이야기를 한나라당 때나 새누리당 때 3번이나 공천을 받지 못한 ‘앙갚음’이나 ‘괘씸함’의 발로라고 지적한다면 무리일까.
“이제는 양지에서 활동하고 싶다. YS의 아들이 아닌 자연인 김현철로 살고 싶다”면서도 현철은 아직 아버지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YS의 그림자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지난 8월 박근혜 후보가 YS를 찾아 지원을 요청했을 때 굳어 있던 YS의 표정이 전 신문지면에 보도된 적이 있다. 현철은 “박 후보가 찾아왔을 때 아쉬운 점이 많았다.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했으면 더 효과가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아무래도 과거에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상당히 어려운 일을 많이 겪으셨는데 아버지에 대한 사과나 위로를 곁들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그는 지난 4·11총선 때 낙천한 뒤 새누리당을 탈당한 상태다. 그러니 지금 현철은 ‘백수’다.
최형우(崔炯宇:1935년 10월 15일~). 그는 ‘YS의 오른팔’ 김동영과 함께 ‘좌동영 우형우’로 불릴 만큼 잘나가던 2인자였다. 하지만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은 지난 1997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지금까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정계를 떠난 것은 그 때부터다.
하지만 그는 YS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이며 상도동 가신그룹에서 첫 번째 인물이었다. 부산공고를 졸업,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그는 1971년 8대 국회에서 야당인 신민당 소속으로 당선된 뒤 9, 10대 연이어 3선이 된다. 1981년 YS가 설립한 민주산악회에서 일했는데 앞서 밝혔듯이 민산은 YS의 최대 사조직이었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YS의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동래을 지역구에 당선되고 나서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를 맡는다. 울산 지역구를 버리고 YS를 위해 ‘부산에서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그때 최형우는 지역구를 옮기면서도 가족에게 한마디 상의도 안 했다. YS의 부인 손명순 여사가 최형우의 부인 원영일 씨를 찾아가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린 것을 두고 “YS보다 YS 대통령 만들기에 더 적극적인 사람이 최형우”라는 말이 나왔다.
최형우는 1992년 14대 총선에서 5선이 된다. 1993년 김영삼 정권에서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을 맡았고 12월 내무부 장관이 된다. 같은 생활권에 속하는 시, 군을 도·농통합시로 통합하는 행정구역 개편을 실행한 것이 그의 최대 치적이다.
사실 부산이 현재의 시세까지 성장한 것은 최형우의 힘이 컸다. 1994년 1월 최형우 내무장관은 발령 낸 지 두 달도 안 된 김기재 기획관리실장을 차관보로 재발령 낸다. 당시 내무부에서는 행정구역을 개편하면 시·군 통합으로 고위 공직자들의 보직이 없어진다며 반대했지만 ‘오른팔’ 최형우는 밀어붙였다. 최형우 한마디면 안 되는 것이 없을 때였다. 그는 부산 동래을을 연제구로 바꿨다. 어찌 보면 동래구에서의 자신의 정치 기반을 위한 것이었지만 이후 연제구가 행정중심단지로 개발되면서 부산시민이 오히려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경남 양산군이던 기장읍 등 5개 읍·면을 기장군으로 만들면서 부산을 2대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실세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 같으면 여야가 싸우느라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최형우가 내무부 장관이었을 때다. 자기 차로 영동에서 압구정까지 가는 길이었는데 차가 너무 막혔다. 그런데 수신호로 정리하거나, 교통신호를 바꿔주는 경찰이 하나도 없었다. 최형우는 조금 괘씸했다. 경찰을 거느리는 수장이 행차하는데 차가 막히다니…. 하지만 최형우는 직접 경찰에 호통 치지 않고 말을 돌려 우회적으로 경찰에 자신의 ‘경고’가 들어가게 했다. ‘내무부 장관이 항상 (경찰)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나의 권력이나 권위를 남용하지 않고 너희에게 이렇게 나무라겠다’는 뜻이었다. 최형우는 권력을 쓸 줄 알았다. 김문수 경기지사가 얼마 전 남양주소방서 소속 소방공무원이 자신의 전화를 똑바로 받지 않았다고 좌천시킨 사건이 발생하자 이런 ‘최형우 정치력’이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최형우는 유일하게 YS에게 대들던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YS에 대한 의리도 대단해서 YS도 꼼짝 못했다고 한다. 최형우는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자당 시절 정무장관이었는데 그때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내 평생 꿈이 YS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고 압박했다 한다. 노 대통령이 퇴임 이후를 걱정하자 “도움을 받았는데도 각하를 제대로 모시지 않으면 제가 육탄으로 막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얼마 뒤 노 대통령이 “왜 나한테는 최형우 같은 사람이 없느냐”고 한숨지었다 한다.
최형우가 나사본 총괄본부를 맡고 있을 때다. YS의 부인 손명순 여사의 집안 동생뻘 되는 손주환이라는 사람이 YS 대통령 되기를 반대하자 그를 만났다. 최형우는 젓가락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YS가 대통령 되면 너희 가문의 영광이지 우리 가문의 영광이냐.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당신이 자꾸 반대하면 이 자리에서 눈알을 쑤셔 버린다.”
최형우는 YS의 집권을 반대했던 LP(리틀 프린스) 박철언을 만나서도 이랬다.
“너 조용히 하고 가만있어. 딴 데로 간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내부에서 쑤시려면 너도 다른 데로 가라. 자꾸 딴죽 걸면 내가 너 죽이고 나도 죽는다.”
YS의 실세 중 한 명은 ‘정치 백수’로 한 명은 ‘뇌졸중’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만약 이들이 권력의 중앙에서 여론을 모아 힘을 결집했다면 나라가 더 크게 발전했을 것이란 지적이 많다. 다른 정권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누리고 즐길 줄만 알았지 올바로 쓴 실세가 별로 없다.
최형우는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권력의 정점에서 소회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정계에서 은퇴한 것이 아쉽나”라는 물음에 “예”라고 답했다. 뇌졸중인 그는 예와 아니오만 한다고 한다. 1997년 쓰러질 무렵 최형우는 신한국당 대선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하지만 YS가 그를 반대했다는 말이 퍼지면서 그때 그는 분노했고 그 화가 그렇게 터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권력무상이다.
최기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