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의 문재인(왼쪽)과 노무현 전 대통령. 최근 새누리당은, 노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NLL 포기 시사 발언을 했다는 의혹과 차기 정부에 넘겨야 할 민감한 문건을 폐기할 것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잇달아 제기했다. 사진제공=청와대 |
NLL 논란으로 달궈진 ‘노무현 공방’에 또다시 기름을 부은 것은 얼마 전 공개된 2007년 5월 22일 노 전 대통령이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 영상물 대화록이다. 이로 인해 노 전 대통령이 차기 정부에 넘겨야 할 민감한 문건을 폐기할 것을 지시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이 의혹은 이미 논란이 된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시사 논란과 더불어 국기를 뒤흔들 만한 사안이라는 점에서 대선 핵뇌관으로 부상한 상태다.
특히 이번 파문은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직전 청와대 메인 서버 하드디스크를 봉하마을로 가져간 ‘전력’을 연상시키며 대선정국을 뒤흔들고 있다. 문제는 당시 수석비서관 회의에 문재인 비서실장도 참석했다는 사실. 오죽하면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번 대선의 승패는 죽은 노무현이 가를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이다.
이미 청와대 기록물 유출 관련 소동이 있었던 탓일까. 또다시 촉발된 청와대 기록물 폐기 논란과 관련해 여권은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언급한 데 이어 이한구 원내대표는 “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후보는 정상회담 대화록을 이명박 정부 누구에게 어떤 형태로 인계했는지 밝힐 책임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왜 10~30년 열 수도 없는 지정기록물로 묶어 놓았는지, 무엇을 감추려 하는지 밝혀야 한다”며 문 후보를 압박했다.
주목할 점은 최근 노 전 대통령이 퇴임을 9개월여 앞두고 정권인계 과정에서 주요 문건과 자료들을 은폐시키려 했다는 정황과 의혹이 잇달아 제기됐다는 부분이다.
이런 일련의 논란에 대해 문재인 후보 측 박광온 대변인은 “사실무근이다. 모든 국정기록을 다 남기라는 것이 노 전 대통령 평소의 지시 내용이었다”고 강조했다. 노무현재단도 “앞뒤 발언을 다 빼버리고 일부분만 인용한 악의적 날조다. 공개된 대화록은 차기 정부에 공개기록을 인계하는 과정에서 목록까지 공개해서는 안 되는 지정기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고 반박했다.
즉 모든 비밀 문건을 대통령기록관에 보낸 후 청와대에 남겨둘 사본 목록을 지울 것인지의 여부를 논의한 회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야권에서는 기록물 원본이 폐기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이번 논란을 여당의 비열한 정치 공세라 반격하고 있다.
이 와중에 최근 천영우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봤다고 주장, 정치권의 공방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즉 정상회담 대화록의 존재 사실에 무게가 실림에 따라, 이제는 자료 열람을 둘러싼 공방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는 노 전 대통령이 기록물을 유출한 전력이 있는데다가 퇴임 직전 대통령지정기록물 법령을 지정한 이유와도 직결돼 있다는 점에서 여야간 심상찮은 충돌이 예고되고 있다.
핵심은 유독 노무현 정부가 청와대 자료 보존 및 개인적 확보에 그토록 공을 들인 이유가 무엇인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업무나 국정운영과정에서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거나 특정 사안이 논란이 될 소지를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 2007년 남북정상회담차 평양을 방문한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
대화록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이 “(지정기록물로) 지정되면 목록까지도 쏙 빠져버린다? (직원들에게) 교육할 때 그런 점을 잘 설명을 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와 있다. 또 노 전 대통령은 “우리가 원서버를 두고 비밀로 지정할 것은 다 지정해서 이관(대통령기록관) 쪽으로 옮기고 나머지 중에 인계하고 싶은 것도 뽑아 가면 남는 것은 필요 없는 것이다. 남은 것을 오히려 복사본으로 개념을 전환해 버리면 된다”고 말했다. 이는 최근 “대통령기록관에 있는 자료가 원본”이라는 김충환 전 청와대 혁신비서관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으로 봉하마을로 가져간 하드디스크가 원본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점은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기록을 포함해 노무현 정부의 정상회담 기록물만 봉쇄돼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국가기록원 산하 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제1차 남북정상회담 관련 기록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들의 정상회담 기록들이 검색된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당시 회담기록은 목록조차 빠져있다.
흥미로운 것은 지정기록물을 지정한 이유가 노 전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과도 연관이 있다는 얘기들이다.
참여정부 출신의 한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말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전임 사장이 발행한 어음은 후임 사장이 결제하는 거다. 임기가 두 달 남았든 석 달 남았든 내가 가서 도장 찍고 합의하면 후임 사장이 거부할 수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면서 “이게 노 전 대통령의 전반적인 국정 운영 스타일이었다”라고 말했다.
그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의 대북관에 대해서도 이런 설명을 곁들였다.
“결국은 대북 문제도 자기 소관대로 진행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 아니겠나. ‘노-김’ 간 NLL 등 민감한 내용이 실제 이뤄졌는지는 대화록이 공개되지 않는 한 단정할 수 없지만 평소 노 전 대통령의 스타일상 자신의 집권 당시 있었던 민감한 국정운영에 대해 봉인해두고자 마음먹었을 거라는 정황은 충분하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이 차기 정권에서 자신의 국정에 대해 평가하는 걸 상당히 경계했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참여정부에 몸담았던 한 관료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털어 놓았다.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9월 혁신·기업도시 관련해서 ‘내 임기 중에 말뚝을 박고 대못을 박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추진했던 정책들을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어나가게 하고자 하는 바람이 강했다. 임기가 끝난 후 분란이 벌어지는 것, 국정스타일이 뒤엎어지는 것을 자존심상 허용치 못했을 수도 있다.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주요 국정사안 내용을 알 수 없도록 채워놓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비생산적인 기 싸움이자 정치 공세라는 의견도 있다. 특히 NLL 논란의 진원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 지정기록물에 대해 법적으로 비공개의 ‘쇠빗장’을 건 것은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라는 얘기가 나오면서 지정기록물 공세가 새누리당에게 부메랑이 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야권의 한 중진의원은 “새누리당과 일부 언론들은 노 전 대통령의 지정기록물 제도를 마치 엄청난 비밀이나 정권의 치부를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몰아가고 있다. ‘죽은 노무현’으로 민심을 흔들고 다시 정권을 잡으려는 새누리당의 수작은 정말 신물이 날 정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