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4회 농심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이호범(오른쪽)과 중국의 탄샤오가 대국하고 있다. |
한-중-일 삼국지로 불리는 농심배는 한 팀 5명의 단체전이면서 연승전이라는 재미 때문에, 우승 상금 2억 원은 다섯이 나누면 각 4000만 원 정도여서 다른 세계기전에 비해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래도 세 나라 프로기사들이 선호하는 대회이며 팬들의 인기도 높다. 한 번 이기면 질 때까지 계속 둘 수 있어 해마다 ‘연승 스타’가 탄생하곤 한다. 3연승하면 보너스 1000만 원을 받고 이후 1승을 더 올릴 때마다 1000만 원씩을 추가로 받는다. 4연승이면 2000만 원, 5연승이면 3000만 원인 것.
올해는 특히 예년과 달리 세 나라가 비슷하게 신진들이 선봉에 나서 불을 뿜고 있다. 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한국 : 최철한(9단·27) 박정환(9단·19) 김지석(8단·23) 이호범(3단·20) 이동훈(초단·14)
중국 : 셰허(9단·28) 왕시(9단·28) 천야오예(9단·23) 장웨이제(9단·21) 탄샤오(7단·19)
일본 : 다카오 신지(9단·36) 안자이 노부아키(6단·27) 무라카와 다이스케(7단·22) 후지타 아키히코(3단·21) 이다 아쯔시(3단·18)
우리 팀에 농심배의 신화 이창호 9단이 보이지 않는다. 14회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10번을 우승했는데, 우승의 견인차는 매번 이창호 9단이었다. 이 9단은 또 거의 매번 우리의 마지막 보루였다. 중국과 일본이 몇 명 남았든 마지막 남은 이 9단 한 사람을 넘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일-중 수퍼대항전’이란 게 있었다. 이 ‘수퍼대항전’을 확대한 것이 우리 ‘진로배’였고, ‘진로배’를 계승한 것이 농심배다.
우리 팀에서는 이세돌 9단도 안 보인다. 현 랭킹 1위 박정환이 있고 최철한, 김지석도 든든하긴 하나 이창호 이세돌이 빠져도 과연 괜찮을까,
염려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투톱 ‘양 이’가 빠진 자리에 이호범과 이동훈 새내기 ‘양 이’가 들어선 형국이 재미있다. 이동훈은 나현 변상일 등과 함께 이미 여러 번 소개된 바 있는 ‘어린 왕자’ 그룹의 한 사람, 믿을 만하다. 이호범은? 잘 두는 후배들이 많이 생기는 바람에 크게 각광받지는 못하고 있지만, 바둑계 동향에 정통한 소수 마니아들이 다크호스로 점찍고 눈여겨보고 있는 청년이다.
두 사람 모두 실력의 보증서로 통하는 ‘한국리거’다. 올해 한국리그는 신안천일염과 한게임이 챔피언 결정 3번기에서 만났는데, 이동훈은 김지석과 함께 한게임, 이호범은 이세돌의 신안천일염 소속이다. ‘양 이’는 또 유명한 ‘양천대일’ 도장의 선후배. 양천대일 원장은 김희용 씨, 프로기사가 아니다. 국내 바둑도장은 허장회 양재호 최규병 유창혁이 통합한 ‘충암도장’을 비롯해 장수영 도장, 권갑룡 도장 등 프로기사들의 도장이 휘어잡고 있지만, 그 틈새에서 이들과 대등하게 겨루는, 독특한 컬러의 투지만만한 아마추어 원장의 도장이 양천대일이다.
중국도 구리, 쿵제가 빠져 있다. 그래도 중국은 자신있어하는 눈치다. 일본은 심기일전을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인다. 다카오는 낯이 익고, ‘관서기원’ 소속의 무라카와도 근래 우리나라에서 열린 세계대회 오픈전에서 두세 차례 본선에 올라가는 것으로 일본을 수렁에서 건져 주는 한편 ‘관서기원’의 존재를 알린 수훈 선수. 이마무라 도시야(9단·46) 유카 사토시(9단·40), 그리고 최근 1~2년 사이 깜짝쇼를 연출했던 사카이 히데유키(8단·39)의 뒤를 잇는 관서의 재목이다.
안자이 노부아키, 후지타 아키히코, 이다 아쯔시, 세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 후지타는 올해 일본 신인왕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경력, 이다는 요즘 한창 촉망받고 있는 최고 신예로 알려져 있다. 안자이는 재일교포 송광복 9단(48)의 제자다. 송광복, 이름이 광복(光復)이다.
1차전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먼저 맞붙었다. 중국은 지난해 한국 안국현(현 3단·20), 일본 하네 나오키(9단·36) 한국 강유택(현 5단·21) 일본 유키 사토시를 꺾어 4연승을 기록해 ‘괴물’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현재는 중국 3관왕으로 랭킹 1위에 올라 있는 팀의 막내 탄샤오, 일본은 팀의 최고참 다카오 신지가 선봉이었다. 탄샤오의 무난한 승리였다는 평이다. 탄샤오와 맞선 우리의 선발은 막내 이동훈. 막내끼리의 대결에서 이동훈은 반집으로 분루를 삼켰다. 다음은 일본도 막내 이다가 등장했는데, 역시 탄샤오의 승리. 탄샤오가 기세를 탄 것 같았다.
그러나 네 번째 무대에서 이호범 대 탄샤오의 일전에서 이호범이 초반에 다소 불리해진 흐름을 좀처럼 바로잡지 못하다가 중반이 저물 무렵, 탄샤오의 실착을 낚아채 역전승, 4연승을 저지했다.
<1도>가 문제의 장면. 이호범이 흑이다. 우리 검토실은 “흑이 덤을 내기 어려워 보인다. 탄샤오가 4연승할 것 같다”면서 가라앉는 분위기였는데, 여기서 탄샤오가 중앙 백1 자리 패를 따내고 흑2로 잇자 백3쪽을 밀었다. 다음 백A면 흑 넉 점이 잡히므로 백3이 선수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그러나…
<2도> 상변의 흑1이 순간의 방심을 놓치지 않은 기민한 역습. 승착이요, 역전타였다. 여기가 큰 자리였다. 흑7까지, 백이 먼저 2로 잡는 것과 비교하면 안팎 12집이 넘는다. 백은 <3도>처럼 상변 백1, 3을 선행해야 했던 것. 그러고도 백9까지 중앙 좌우 대마를 모두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중앙 백 대마는 백9 다음 A와 B가 맞보기. 백B, 흑C, 백D로 한 집이 생긴다. 백B 때 흑이 D로 들어오는 수가 없으니까. 다크호스 이호범이 2차전에서도 계속 활약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