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일화 시간표도 늦출까’ 야권 단일화 압박이 세지면서 안철수 후보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10월 28일 투표시간연장 국민행동 출범식에 참석한 안철수 후보. 사진제공=안철수 |
냉랭한 분위기가 연출된 이유는 다소 앞뒤가 안 맞는, 혹은 뭔가 할 말을 다 못하는 듯한 박 본부장의 브리핑 내용 때문이었다. 광주를 방문해 지역 언론인과 오피니언 리더들을 만나고 돌아온 박 본부장은 “정권 교체에 대한 호남의 열망을 확인했다”며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고, ‘힘을 합치겠다.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답하고 왔다”고 전했다. 기자들의 질문은 ‘힘을 합치겠다’는 발언에 집중됐다. “힘을 합치겠다고 했는데, 민주통합당에서 1300만 명 투표 시간 연장 서명운동을 하겠다고 했는데, 같이 할 의향이 있느냐” “힘을 합치겠다고 했는데, 후보 단일화를 하겠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느냐”는 식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나 박선숙 본부장의 답변은 여전히 애매모호했다. 투표 시간 연장 서명운동에 대해선 “여야가 국회에서 풀지 못하는 일을 저희가 국민들과 함께 입법 제안권, 청원권 등 국민의 권리 차원에서 요구할 수 있고, 이 문제에 관심 있는 모든 분들과 함께해 나갈 것”이라고 답했다. 단일화 여부에 대해서는 더 알쏭달쏭한 얘기를 풀어놨다.
“저희 민원실에 여러 전화가 오는데, ‘혁신하지 않는 정치와 힘을 합치지 말라’는 전화도 한동안 굉장히 많았다. 최근에는 ‘정치 혁신과 정권교체를 이루려면 안 후보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전화가 많다. 이게 국민들의 심정이다. 정치가 국민들과 소통하고, 또 국민들의 마음을 모아가는 과정 없이 정치인들끼리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은 전 승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국민과 함께 가야 한다.”
이처럼 선문답 같은 얘기가 오가자 결국 기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박 본부장의 브리핑 내용을 두고 논란이 벌어진 이날 안철수 캠프의 모습은 최근 안 후보가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안 후보가 더 이상 후보 단일화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을 이어가기는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11월로 접어들면서 단일화의 파트너인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뿐 아니라 주변의 중재자들의 마음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당장 진보 성향 재야 원로들로 이뤄진 ‘희망 2013 승리 2012 원탁회의’가 1일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를 향해 “가치를 기초로 한 연대가 되기 위해서라도 정치혁신 방안에 관한 양측의 소통과 대화는 조속히 진행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원탁회의는 “이제는 구체적인 정치혁신을 위한 대화에 나설 때”라며 “지금은 무엇보다 대화의 틀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내 김근태계 모임인 민주평화국민연대도 같은 날 “문·안 두 후보가 대통합의 정신으로 단일화 협상에 적극 나설 것을 요구한다”며 “양 후보 간 합의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일 안에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선숙 본부장과 유민영 대변인 등 안철수 캠프 내 상당수 인사들을 배출한 김근태계는 두 후보의 단일화 과정에서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룹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더 이상 시간이 없다”며 “야권 단일화는 역사적 책무로, 실패하면 더 무서운 보수 수구화가 진행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예전 같으면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마이 웨이’를 계속할 수도 있을 법하지만 안철수 캠프도 더 이상 이 같은 외부의 재촉과 채근을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국회의원 정수 축소, 정당 국고보조금 축소, 중앙당 폐지 등을 골자로 한 안철수 후보의 ‘정치 쇄신안’이 역풍을 맞으면서부터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안 후보의 페이스대로 상황을 주도해 가려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는 10월 30일 유민영 대변인이 전날 선대본부 회의 내용을 전하면서 “단일화를 안 하겠다는 게 아니다. 다만 11월 10일까지 정책들을 준비해서 발표하겠다고 국민들께 약속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라는 안 후보의 발언을 공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는 사실상 ‘11월 10일까지만 시간을 달라’는 대외적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10월 29일 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회의가 무거운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고 전했다. ‘안철수 브랜드’를 알리기 위한 시간 확보가 필수적이지만, 더 이상 외부의 단일화 압박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인식이 공유됐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전략적 모호성’을 폐기하고 어느 정도 시간을 버는 데는 성공했지만 안 후보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는 양상이다. 잇단 여론조사에서 호남과 40대, 화이트칼라 등 안 후보의 주요 지지층에서 뚜렷한 민심이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호남에서 1위 자리를 문재인 후보에게 내주는 결과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뼈아프다. 김성식 공동선대본부장이 지난 1일 기자들에게 “여론조사 보도할 때 새누리당 지지층의 역선택 가능성을 잘 봐야 한다. 신중한 보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이 같은 분위기 변화를 반영한다. 문재인 후보의 상승세가 다 역선택 때문이라는 얘긴데, 결국 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진성준 대변인으로부터 “예의 없는 발언”이라는 반발을 불러왔다. 실제로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김 본부장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판단할 근거는 점점 약해지는 양상이다.
11월 10일까지 불과 1주일 정도 시간을 벌어놓은 안 후보로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지지율 하락세를 어떤 식으로든 뒤집어야 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짧고 계기도 마땅찮기 때문이다. 안 후보 선거캠프 관계자는 “안철수의 브랜드를 가장 드높일 수 있는 주제였던 ‘정치 쇄신안’이 여론의 호응을 제대로 불러일으키지 못한 게 뼈아프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정치 쇄신안으로 확실하게 새 정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면 단일화 국면에서 훨씬 더 수월한 싸움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안 후보는 호남을 비롯한 전략지역에 다시 한 번 공을 들이면서 정책 공약을 통해 주도권을 되찾는 쪽으로 대응책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박선숙 본부장과 유민영 대변인 등이 최근 잇따라 호남을 방문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안 후보가 5일 전북 익산을 시작으로 호남 방문 일정을 잡은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안 후보는 이와 동시에 자신의 ‘혁신 경제론’에 입각한 경제 성장 구상을 준비하고, 국방 및 안보 관련 정책 구상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 후보 캠프의 장하성 국민경제본부장은 “안 후보의 성장비전엔 중소기업 성장 뿐만 아니라 재벌이 아닌 대기업의 성장까지 담길 것”이라며 “거시적인 산업 구조를 바꾸는 내용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안 후보 캠프 관계자는 “정책 공약이야말로 무소속 후보라는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며 “릴레이 공약 발표를 통해 분위기 반전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
▲ 10월 29일 골목상권살리기운동 전국대표자대회에 나란히 참석한 안철수, 문재인, 박근혜 후보(왼쪽부터).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호남의 외면’ 진짜 심각하다
“40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호남까지 넘어갔다면….”
안철수 후보 선거캠프에서 일하는 한 실무자는 최근 한 언론사의 여론조사 결과를 접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안 후보 캠프에서 계속 부인해 온 ‘안철수 위기론’이 잇단 여론조사를 통해 확인됐고, 특히 위기의 징후가 호남 민심에서까지 확인되고 있다는 데 대한 충격이 큰 듯했다. 이 인사는 “지금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본선은 물론 단일화 과정에서도 이길 수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며 “뭐가 잘못된 건지 제대로 따져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추석 연휴 전 무지막지한 파상 검증공세도 무사히 돌파하면서 기존의 제3후보와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여줬던 안 후보가 이처럼 대선을 40여 일 앞두고 최대 위기를 맞는 양상이다. 오는 11월 10일 이후에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 후보 간의 ‘단일화 국면’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안 후보의 위기 징후는 심상치 않다. 지금 이런 흐름을 꺾지 못할 경우 그에게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 후보가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근거는 40대와 호남의 표심 변화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한국갤럽의 10월 넷째주(10월29~31일) 조사 결과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39%, 안 후보가 24%, 문 후보가 22%의 지지율을 각각 얻었다. 전체적인 수치 상 큰 변화가 없지만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상황이 발견됐다. 40대 응답자만 놓고 보면 박 후보가 32%, 문 후보 30%, 안 후보 23%의 지지율을 보였다. 호남에서는 문 후보 42%, 안 후보 32%, 박 후보 13%의 지지율을 보였다.
40대와 호남은 그동안 안 후보가 강세를 보여 온 계층이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결과는 충격적이다. 40대는 그 자체로 역대 선거에서 캐스팅 보트를 쥔 사례가 많을 뿐 아니라 중도, 무당파층이 유난히 많이 몰려 있는 연령대다. 이 연령대에서 박 후보와 문 후보에게 모두 밀렸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더욱이 추석 전까지만 해도 안 후보는 20~30대뿐 아니라 40대에서도 타 후보들을 압도했었다.
호남 표심의 변화는 더 큰 충격이다. 호남에서 밀릴 경우 본선에 진출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호남의 경우 광범위한 친노(친노무현) 비토 기류 때문에 문재인 후보가 고전을 면치 못해왔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안 후보가 문 후보에게 밀리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민심의 변화가 나타난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다각적인 해석을 내놓고 있다. 우선 안 후보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안 후보가 ‘무소속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정당이 없다는 사실은 대선 날짜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안 후보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무소속 후보가 주는 불안감, 불안정성을 불식시키기 위해 안 후보가 정책 비전과 인적 네트워크 등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다”며 “정책도 안 보이고, 도와줄 믿음직한 사람도 안 보이기 때문에 지지율이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분석과 달리 선거 구도의 변화가 민심의 변화 양상을 띨 뿐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 대학 정치학 교수는 “안 후보의 지지율에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박근혜 후보와의 양자대결 시에는 여전히 박 후보에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최근 안 후보의 지지율 변화는 조직 기반을 갖춘 문재인 후보의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상승한 데 따른 결과로 봐야 한다”며 “야권 지지층에게 안철수 말고는 박근혜에 맞설 대항마가 보이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문재인도 대항마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느 분석이 더 실제에 가깝든 당분간 박근혜 후보가 1위를 달리는 가운데 문 후보와 안 후보가 피 말리는 제로섬 게임을 벌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