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그룹의 2세 승계 구도를 굳힌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왼쪽)과 정지이 현대 유앤아이 전무. | ||
재벌그룹들은 이들 2, 3세들이 지닌 역량을 들어 ‘능력에 맞는 인사’라는 점을 부각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가족 내에서 경영권 대물림을 하는 국내 기업 풍토를 감안하면 이들의 고속승진은 그룹 경영권을 향한 정해진 수순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 이들이 지분 확보나 대내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난제들을 거론하며 이들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국내의 대표적인 양대 재벌인 삼성그룹의 이재용 상무나 현대차그룹의 정의선 사장은 승계 과정에서 비롯된 문제로 그룹 핵심 인사가 검찰 조사를 받고 관련 재판이 진행 중일 정도로 진통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승계는 승계. 재벌가에선 ‘2세! 앞으로’라는 전진 명령을 내리고 있다.
2006년 승진인사를 통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재벌가 인사는 바로 신세계의 정용진 부회장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여동생 이명희 회장의 아들인 정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 아들 이재용 상무에 비해 경영일선 전면에 나서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관심을 끄는 것이다.
정 부회장은 지난 12월 1일자로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사실상 신세계 경영을 이끌게 됐다. 그는 얼마 전 미니이마트 추진을 발표하며 신세계 전체 매출액의 70~80%를 차지하는 이마트 사업 확대에 앞장서는 등 더이상 ‘베일 속 황태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정 부회장의 앞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공개석상에서 정 부회장이 맞는 단골 질문 중 하나는 월마트 관련 건이다. 신세계의 월마트 인수에 대해 공정위가 ‘4개 지역 매장 매각 조건’을 달아 이마트와 월마트의 합병을 조건부로 승인했고 신세계 측은 이에 대한 행정소송을 선언한 바 있다.
정 부회장이 맞이할 법정공방이 그리 수월치만은 않아 보인다. 여론의 눈치도 살펴야하는 까닭이다. 정 부회장은 아버지 정재은 명예회장으로부터 지분을 물려받는 등 지난해 신세계 지분을 9.32%까지 늘렸으며 광주신세계(52.08%) 신세계건설(0.80%) 등의 지분을 갖고 있다. 광주신세계 주가가 급등하면서 ‘광주신세계 지분을 저가에 확보한 정 부회장이 이를 신세계 지분 추가 매입에 활용할 것’이란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참여연대는 ‘정 부회장이 광주신세계 지배권을 헐값에 확보했다’며 편법증여 의혹을 제기해왔으며 참여연대-신세계 양측은 이에 대한 법정공방을 벌이고 있다. 얼마 전 참여연대가 ‘신세계 총수일가가 차명 주식을 관리했다’는 의혹을 제기해 양측 감정다툼의 골이 더욱 깊어진 상태다. 이런 와중에 신세계 측이 ‘거액의 상속세를 내겠다’고 발표한 것이 정 부회장 승진을 앞두고 여론을 달래기 위한 발언이었다는 평도 제기된 바 있다.
한편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승진인사도 세간을 깜짝 놀라게 했다. 현 회장 장녀 정지이 씨가 12월 28일 인사에서 현대 유앤아이 전무로 승진해 눈길을 끈 것이다. 2006년 3월 현대 유앤아이 실장으로 승진했던 정 전무는 불과 9개월 만에 임원직에 올라 보기 드문 초고속 승진 사례를 남겼다. 이를 두고 그룹 안팎에선 현 회장이 장녀인 정 전무를 일찌감치 그룹의 후계자로 삼고 경영수업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 2005년 박성용 명예회장 장례식에 모인 금호아시아나 2,3세들. 뒷줄 왼쪽부터 박삼구 회장의 아들 박세창 금호타이어 이사, 2남인 고 박정구 회장의 아들 철완 씨, 4남인 박찬구 부회장의 아들 준경 씨. 앞줄 맨 오른쪽이 고 박 명예회장의 아들 재영 씨. | ||
현 회장은 현대건설 인수를 위해 현대가 장자인 정몽구 회장의 도움을 간절하게 원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혼이 서린 현대건설을 인수해 정통성 논란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과 벌이는 현대상선 지분 전쟁에서도 현대상선 지분 8%를 가진 현대건설 인수가 절실한 까닭에서다. 그러나 일각에서 제기되는 ‘현 씨 현대론’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현대 주요계열사의 지분구조에서 현 회장 친정식구들이 대주주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부장적 문화가 강한 범 현대가 인사들, 특히 현 회장이 눈치를 살피는 정몽구 회장 측에서 정지이 전무의 비상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그리고 이것이 현대건설 인수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대우건설 인수로 10대 재벌에 진입한 금호아시아나에서도 박삼구 회장의 아들인 박세창 씨가 지난 12월 1일 인사에서 금호타이어 기획팀 부장에서 그룹의 전략경영본부 이사로 승진해 눈길을 끌었다. 박 이사는 금호타이어 부장으로 입사한 지 1년 만에 이사직에 올랐다. 박 이사는 장남인 고 박성용 명예회장의 아들 박재영 씨, 2남인 고 박정구 회장의 아들 박철완 씨, 4남인 박찬구 부회장의 아들 박준경 씨 등 3세들 중 제일 먼저 그룹 경영에 참여해 이사직에 오르게 됐다. 형제경영을 표방해온 금호아시아나에서 3남인 박삼구 현 회장의 아들이 초고속 승진해 경영전면에 나서게되자 향후 형제경영에 미칠 영향에 대한 재계 호사가들의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금호아시아나는 경영에 참여해온 4형제 부자가 계열사 지분을 균등하게 보유해왔다. 그런데 최근 인수한 대우건설 지분 관계에선 다른 점에 눈에 띈다. 박삼구 회장과 아들 박세창 이사, 그리고 박찬구 부회장과 아들 박준경 씨가 0.1%씩 나눠가졌다. 박철완 씨는 고인이 된 아버지(고 박정구 회장) 몫까지 받아 0.2%를 가졌다. 3형제 부자가 똑같이 0.2%씩을 나눠가진 것이다. 그런데 고 박성용 명예회장의 아들 박재영 씨는 대우건설 대주주 명부에 아직까지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가 해온 대로라면 박재영 씨는 고 박 명예회장 몫까지 받아 박철완 씨 경우처럼 0.2%를 소유해야 한다. 박철완 씨나 박준경 씨가 경영관련 공부를 하고 있는 반면 박재영 씨는 현재 미국에서 연극 영화 관련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향후 금호아시아나 3세 경영구도는 박재영 씨를 제외한 채 먼저 이사직에 입성한 박세창 이사와 박준경 박철완 등 사촌형제들 간의 3각 구도로 좁혀질 것이란 이야기도 일각에서 나돌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에선 지난 12월 14일 인사를 통해 정몽근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면서 아들인 정지선 부회장이 사실상 그룹을 이끌게 됐다. 정몽근 명예회장의 2선 후퇴와 함께 그동안 현대백화점을 이끌어오던 하원만 현대백화점 사장이 동반 퇴진한 것도 정지선 부회장 체제에 실어주기 위함으로 보인다.
정지선 부회장은 현대백화점 지분 17.11%를 가진 최대주주이며 정교선 상무는 현대 H&S 지분 21.34%를 보유해 업계에선 정몽근 명예회장의 두 아들이 회사를 나눠 갖는 식으로 정리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현대백화점은 현대H&S 지분이 하나도 없는 반면 현대H&S는 현대백화점 지분 12.44%를 갖고 있다. 정지선 부회장이 현대H&S지분 1.22%를 갖고 있는 반면 정교선 상무는 현대백화점 지분이 없다. 향후 재산 분할과 관련, 두 아들 간에 해결할 문제가 남아있는 셈이다.
대권을 이어받은 정지선 부회장의 앞날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롯데쇼핑이나 신세계 등 경쟁 유통업체들이 백화점과 할인점 등 자신만의 강점을 내세워 신규점포와 매출을 꾸준히 늘려온 반면 현대백화점은 지난 수년간 성장이 정체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때문에 증권가 일각에선 정지선 부회장이 신 성장동력을 조기에 마련하지 못할 경우 자칫 현대백화점이 마이너 유통업체로 전락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GS그룹에선 허창수 그룹 회장의 사촌형인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의 장남 허세홍 씨가 GS칼텍스 상무로 영입돼 눈길을 끌었다. 허 상무는 GS그룹의 지주회사인 GS홀딩스 지분을 0.85% 갖고 있다. 이는 허창수 회장 장남인 허윤홍 GS건설 대리의 0.51%보다 높은 수치다. 허 상무는 1969년생으로 1979년생인 허윤홍 씨보다 열 살이 많지만 GS의 모태가 된 LG그룹이 지분 분배와 경영권 승계에서 철저하게 장자 우선 원칙을 고수해온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얼마 전 허창수 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거액의 상속세 때문에 내 아들이 그룹을 물려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속내를 밝힌 바 있다. 허윤홍-허세홍 세대에서의 지분 분배가 어떻게 이뤄질지 세인들의 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한진그룹에선 지난 12월 28일 신년인사를 통해 조양호 회장의 장녀인 조현아 상무보와 장남인 조원태 자재부 총괄팀장(부장)이 각각 상무와 상무보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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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4년생인 장녀 조현아 상무는 한진의 핵심계열사인 대한항공 지분 0.02%를 갖고 있는 반면 1976년생인 장남 조현태 상무보는 0.03%를 갖고 있다. 장남보다 직급에서 앞서나가며 그룹을 대표하는 대외활동 보폭을 넓히고 있는 조현아 상무와 지분에서 근소하게 앞서있는 장남 조현태 상무보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한편 재벌가의 양대축인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은 2세 승계과정과 연계된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건과 관련된 선고공판이 1월 18일, 현대차 정몽구 회장의 1심 선고공판이 1월 말로 예정돼 있어 두 그룹에서 이를 전후해 큰 폭의 인사가 있을 것으로 알려져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