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5년 5월 박성용 명예회장의 영결식에 참석한 가족들. 왼쪽부터 장손 재영 씨, 미망인 마가렛 클라크 박, 딸 미영 씨. | ||
그런데 최근 금호아시아나그룹 내 일어난 지분구조 변동을 통해 그동안의 형제경영 구도에 변화가 올 가능성이 예견되고 있다. 물론 당장 두산처럼 서로 헐뜯고 싸우는 골육상쟁이 벌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고 박인천 창업주 사후 고 박성용 명예회장, 고 박정구 회장, 박삼구 현 그룹 회장, 박찬구 화학 부문 회장 등 2세들 4형제와 이들의 아들들인 3세들에 이르기까지 유지돼온 공동분배의 틀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금호아시아나는 지난해부터 금호석유화학과 금호산업 등 두 법인을 양대 지주회사로 개편해 그룹을 꾸려왔다. 금호석유화학의 지분구조를 보면 총수일가 4형제 집안이 균등하게 지분을 나눠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인 박삼구 그룹 회장이 5.30%, 넷째 박찬구 화학 부문 회장이 5.30%를 갖고 있으며 박삼구 회장 아들 박세창 이사가 4.71%, 박찬구 회장 아들 박준경 씨가 4.71%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첫째인 고 박성용 명예회장 아들 박재영 씨와 둘째인 고 박정구 회장 아들 박철완 씨는 선친 몫을 물려받아 10.01%를 갖고 있다. 4형제 부자가 모두 10.01%씩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금호석유화학과 더불어 양대 지주회사로 군림하고 있는 금호산업 지분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금호아시아나가의 장손 박재영 씨가 지난해 11월 금호산업 주식 35만 5000주를 매각한 것이다.
매각 직전까지 박재영 씨의 금호산업 지분율은 4.47%였다. 박철완 씨(5.44%), 박삼구-박세창 부자(2.27%+3.16% =5.43%), 박찬구-박준경 부자(2.32%+3.11%=5.43%)보다는 다소 낮은 지분율이었으나 비슷하게 균형을 이뤄오고 있었다. 그런데 박재영 씨의 금호산업 지분 매각으로 종전의 4.47%에서 3.59%로 지분율이 낮아져 다른 형제 부자들과 차이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금호아시아나가 최근 인수한 대우건설 지분구조에서도 감지된다. 박철완 씨(0.02%), 박삼구-박세창 부자(0.01%+0.01%=0.02%), 박찬구-박준경 부자(0.01%+ 0.01%=0.02%)가 골고루 지분을 나눠가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박재영 씨의 이름은 대주주 명부에 올라있지 않다.
박삼구 그룹 회장이 얼마 전 지주회사인 금호산업 대표이사직을 내놓고 대우건설의 공동대표이사직을 맡을 정도로 총수일가가 애착을 갖는 대우건설의 지분구조에 박재영 씨는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것이다. 일각에선 박삼구 회장이 대우건설을 인수한 데 이어 대한통운 인수에도 집념을 보이고 있는 점을 들어 박삼구 회장이 향후 3세 경영 시대에서 대우건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인수기업군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겠느냐는 다소 섣부른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금호아시아나가 표방해온 형제경영과 공동 분배 원칙이 최근 들어 흔들리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박재영 씨는 금호산업 지분 매각대금으로 83억 6000만 원가량을 챙겼다. 한 재벌가의 장손인 박재영 씨가 돈이 급해서 지주회사의 지분을 급히 내다팔았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 박삼구 회장(왼쪽)과 아들 세창 씨. | ||
고 박 명예회장은 지난 2005년 5월 사망하기 직전까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일에 전력을 다하면서 ‘한국의 메디치’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고 박 명예회장 아들인 박재영 씨는 현재 미국에서 영화 관련 분야를 공부 중이다. 박삼구 현 그룹 회장 아들인 박세창 이사가 사촌 형제들 중 가장 먼저 경영일선에 나섰고 나머지 사촌들인 박철완 박준경 씨가 경영 수업 중인 것과 대조적이다. 이 때문에 선친과 마찬가지로 박재영 씨 또한 그룹 경영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가 나돌기도 한다.
일각에선 박재영 씨가 그룹 경영과 무관한 행보를 보이는 대신 선친의 혼이 서려있는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현재 재단 이사장은 박삼구 회장이 맡고 있지만 일각에선 “언젠가 재영 씨 몫이 될 것”이라 평하기도 한다. 현재 재영 씨가 공부하고 있는 분야도 이와 관련 있을 거라 보는 의견이다.
지난해 9월 금호석유화학에서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 금호산업 지분 5만 5860주를 증여했다. 이로써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금호산업 지분율을 0.53%까지 끌어올렸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 갖고 있는 금호석유화학 지분은 0.21%다. 이를 박재영 씨가 현재 갖고 있는 양대 지주회사 지분과 합해보면 다른 형제 부자들이 가진 지분 총액에 크게 부족하지 않은 규모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공익재단으로의 증여는 별도의 증여세가 부가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금호아시아나 총수일가가 증여세가 필요 없는 문화재단을 통해 차후 경영구도에서 빠질 박재영 씨에 대한 재산 나눠주기를 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금호아시아나가 형제경영을 표방해왔지만 이는 경영에 참여하는 형제들에 한해서였다. 5남인 박종구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은 위의 네 형들이 그룹 경영에 참여했던 것과 달리 아주대 교수를 거쳐 내무부 기획예산처 등 정부부처 관료를 역임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금호석유화학이나 금호산업 지분구조에 박종구 차장의 이름은 올라있지 않다. 만약 박재영 씨가 문화사업에 매진하면서 그룹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게 된다면 향후 재영 씨도 작은아버지인 박종구 차장의 경우처럼 그룹 대주주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재벌그룹 같은 가족경영 사례에서 가장 큰 숙제는 부의 대잇기다. 두산도 3대를 내려오며 재계에 남다른 우애를 자랑하던 가족화합 경영의 표본이었지만 잠겨진 갈등이 드러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LG는 4대를 내려오면서 세대가 바뀔 때마다 위성그룹을 분리시키는 방법으로 오너 그룹의 갈등을 사전에 막아내며 정체성을 지켜왔다. 현직 금호그룹 회장인 박삼구 회장의 행보가 그래서 주목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