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운데 선거 결과를 좌우하는 핵심 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 있으니, 이른바 ‘골프 카트 표심’이라고 불리는 은퇴자 마을 ‘더 빌리지스’다. 대부분의 인구가 65세 이상의 노년층이다 보니 사실 보수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이 많은 건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특히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는 모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78)의 손을 들어주었을 만큼 대표적인 친트럼프 성향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이상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81) 대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60)이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자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보수 텃밭인 이곳에서 과연 민주당은 승기를 잡을 수 있을까.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더 빌리지스’는 맨해튼만 한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선거철이 되면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어 민심을 파악하는 곳이다. 가장 확고한 정치 성향을 보이는 데다 투표율 역시 높은 노년층 유권자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버타운 부촌으로 꼽히는 이 지역의 인구는 현재 14만 5000명가량이다. 2021년 7월 1일부터 2022년 7월 1일까지 1년 동안에만 7.5% 증가하는 등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이런 까닭에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도시로 꼽히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중산층 이상의 백인인 데다 65세 이상이라는 점은 이 지역이 왜 공화당 우세 지역인지를 쉽게 가늠하게 한다. 거기다 더해 급속한 고령화로 인해 꾸준히 인구가 유입되고 있다는 점도 플로리다가 점점 보수화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러니 선거 때마다 공화당 후보들이 공을 들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 지금까지 유세차 이곳을 방문한 공화당 정치인들은 딕 체니 전 부통령, 미트 롬니 전 대통령 후보, 폴 라이언 전 부통령 후보, 세라 페일린 전 부통령 후보, 마이크 허커비 전 대선 후보, 공화당 대선 예비후보 마르코 루비오와 벤 카슨, 마이크 펜스 부통령 후보 등이 있었다.
대통령 신분으로 지역을 방문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 마을을 방문한 최초의 대통령은 조지 W. 부시였다. 2004년 연임에 도전한 부시는 당시 약 2만 명의 지지자들이 보는 앞에서 한 표를 호소했다. 2019년에는 연임을 노리고 있던 트럼프가 1000여 명의 지지자들 앞에서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로써 트럼프는 ‘더 빌리지스’를 방문한 두 번째 현직 대통령이 됐다.
트럼프의 방문은 그 후에도 한 차례 더 이뤄졌다. 2020년 10월 23일, 대선을 불과 11일 앞두고 트럼프는 론 드산티스 주지사, 팸 본디 전 플로리다 법무장관과 함께 ‘더 빌리지스’를 방문해 운집한 약 1만 명의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했다. 당시 트럼프는 이 자리에서 “나는 여기가 좋다” “이곳으로 이사해오는 것도 고려해보겠다”라며 농담을 했다. 트럼프의 마라라고 리조트가 위치한 곳 역시 플로리다주 팜비치이기 때문에 사실 이런 발언은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트럼프가 이렇게 플로리다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이곳이 그에게는 선거를 이기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핵심 지역이기 때문이다. 2016년 대선에서는 플로리다의 65세 이상 유권자들이 트럼프에게 몰표를 준 바 있었다. 당시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보다 무려 17% 더 많은 표를 얻어서 승리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당시 승기를 잡은 데는 플로리다에서의 압승이 결정적이었다고 분석했다. 2020년 선거에서도 트럼프는 비록 바이든에 밀려 재선에는 실패했지만, 플로리다주에서는 승리했었다. ‘더 빌리지스’가 위치한 섬터 카운티에서는 무려 6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올해 대선에서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에머슨 칼리지’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고령층 사이에서 해리스를 지지하는 비율이 트럼프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노인들이 공화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놀라운 결과다. 이런 달라진 분위기는 근래 들어 ‘더 빌리지스’ 마을에서 열리고 있는 지지자들의 퍼레이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지난 7월 말에는 해리스 후보를 지지하는 주민들이 골프 카트 500여 대를 몰고 거리로 나왔다. 비록 공화당 지지자들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이 모습을 본 민주당 성향의 주민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퍼레이드에 참가한 골프 카트에는 성조기와 함께 ‘해리스를 대통령으로’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 빨간색, 하얀색, 파란색 리본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운전자들은 그렇게 환호성을 지르고 경적을 울리면서 몇 시간 동안 마을을 돌아다녔다.
8월 23일에는 두 번째 집회가 열렸다. 전통적으로 친트럼프 성향이 강한 곳에서 해리스를 지지하는 골프 카트의 행렬을 담은 사진은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고, 동영상은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민주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인 하이메 해리슨은 2008년 버락 오바마의 선거운동 당시의 뜨거웠던 열기에 빗대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친 민주당 집회는 그동안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더 빌리지스’의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해리스 지지 행렬에 참여한 마을 주민인 포레트 맵슨은 “트럼프에게는 기회가 없다”라고 말했는가 하면, 수지 반하트는 “우리는 희망을 봤고, 출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며 벅찬 감정을 드러냈다.
그런가 하면 9년째 ‘더 빌리지스’에 거주하고 있는 과거 공화당원이었던 킴 페론은 지금은 마음을 바꿔 민주당에 투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나의 주된 관심사는 내 아이들이 계속해서 자유로운 나라,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이앤 에릭슨 역시 ‘뉴스네이션’ 인터뷰에서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는 공화당에 표를 던졌지만 이번에는 민주당에 표를 던질 생각”이라고 밝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공화당이 우세인 이곳에서 민주당이 쉽게 이기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다. 여전히 이곳은 트럼프 지지율이 높은 곳이다. 실제 해리스 지지자들의 집회가 열리자 친트럼프 성향의 주민들은 재빨리 반격에 나섰다. 지난 8월 3일, 주황색 머리에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있는 테디 베어 인형을 매달거나 트럼프 가면이나 트럼프 고무 오리, 혹은 트럼프 튜브 인형으로 장식한 골프 카트 수백 대가 길게 한 줄로 늘어선 채 행진을 시작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나는 범죄자에게 투표한다’라거나, ‘나는 무법자와 촌뜨기에게 투표한다’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나왔다. 3년 전 뉴저지에서 이주해온 톰 소여는 “해리스 집회에는 우리처럼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며 뿌듯해 하기도 했다. 2년 전 ‘더 빌리지스 MAGA 클럽’을 설립한 토미 제이미슨은 이날 집회에 모인 골프 카트 수가 1000여 대라고 추산했다. 이는 종전의 800대에서 200대가 더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였다.
퍼레이드에 참가한 브라이언 브룸은 “(트럼프는) 4년 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그 입증된 기록 때문에 나는 그에게 다시 투표할 생각”이라고 했다. 이처럼 은퇴자들이 트럼프를 여전히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경제 때문이다. 주민인 테리 래그스데일은 “우리들 대부분은 식료품비를 비롯해 모든 게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하고, 나는 트럼프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비슷한 의견을 밝힌 톰 와이즈먼은 “나는 노후에 고정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인플레이션은 매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며 한탄했다.
그렇다면 과연 플로리다는 정말 이번 선거에서 박빙의 경합주가 될까. 정치 전문가들은 아마도 그럴 듯하다고 말한다. 민주당과 공화당 역시 같은 생각인 듯하다. 민주당 측은 전당대회에 대한 높은 관심과 해리스 후보의 기세가 높아지자 플로리다를 다시 격전지로 둘 것을 검토하고 있으며, 공화당 측 역시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내 우위로 나타나고 있는 해리스의 지지율이 ‘매우 우려스럽다’고 보고 있다.
56개 골프코스 평생 무료…세계 최대의 실버타운 '더 빌리지스' 어떤 곳?
플로리다주 섬터 카운티와 마리온 카운티 사이에 위치한 ‘더 빌리지스’는 맨해튼만 한 크기를 자랑하는 은퇴자 마을이다. 억만장자 투자자 개리 모스의 부동산 개발업체인 ‘더 빌리지스 홀딩 컴퍼니’가 기획 및 건설한 곳으로, 1970년대 초 ‘오렌지 블라썸 가든’이라는 이동식 주택 공원이 시초였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팔린 집은 400채에 불과했지만,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급격한 성장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성공의 비결은 다양한 편의시설에 있었다. 골프 코스를 비롯한 레크리에이션 및 편의시설에 중점을 둔 형태로 발전하면서 은퇴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급기야 1990년대 초반에는 인구가 8000명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은퇴자 공동체 마을의 모범이 된 ‘더 빌리지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실버타운 공동체가 됐다.
‘더 빌리지스’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이유는 급속한 고령화와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고령층 증가 등 두 가지 요소가 맞물렸기 때문이다. 구매력을 갖춘 부유한 백인 노년층이 말년을 보내기 위해 주로 찾고 있는 까닭이다. 생활비는 편의시설 비용, 공과금, 세금, 보험료 등 월 1000달러(약 130만 원)가 조금 넘는다. 주택 가격은 2024년 7월 기준으로 평균 약 379만 달러(약 50억 원)다.
골프가 취미인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골프 코스는 9홀인 42개의 이그제큐티브 코스를 비롯해 챔피언십 코스, 스페셜티 코스, 퍼팅 코스 등 총 56개가 있다. 코스 이용료는 평생 무료이며, 골프 교육 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있다. 단, 코스에서 개인용 골프 카트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트레일 피’를 지불해야 한다.
주민 대부분이 골프를 즐기다 보니 마을 내 주요 이동 수단은 골프 카트다. ‘더 빌리지스’에 처음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풍경이 도로에 일렬로 서있는 골프 카트들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단지 내 거의 모든 곳은 골프 카트로 접근이 가능하며, 골프 카트를 타고 이동할 때는 일반 교통 법규를 준수해야 한다.
이 밖에 테니스 코트도 군데군데 마련되어 있으며, 피클볼, 소프트볼, 폴로도 즐길 수 있다. 활동적인 운동이 취미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서는 수채화 그리기부터 정치적 논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2700개 이상의 클럽과 커뮤니티가 마련되어 있다. 이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클럽은 ‘더 빌리지스 목공 클럽’이다. 넓은 목공실에서 회원들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설계하고 제작할 수 있다.
평생교육 클래스도 인기 만점이다. 누구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미술사를 공부하고, 사교댄스나 요리를 배울 수 있다. 레스토랑과 쇼핑센터도 곳곳에 입점해 있으며, 매일 밤 마을 광장에서는 무료로 공연과 쇼를 즐길 수 있다.
이곳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연령 규정을 따라야 한다. 가족 구성원 가운데 최소 한 명이 55세 이상이어야 하며, 19세 미만은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거주할 수 없다. 19세 미만의 손자나 손녀들의 방문 가능일 수는 연 최대 30일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