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침없이 나가던 정의선 기아차 사장(사진)의 그룹 승계작업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 ||
재계 3세 그룹 중 누구보다 빠르게 승계작업을 마칠 것으로 예상됐던 그였지만 2006년은 누구보다도 아찔한 급반전으로 출렁거린 한 해였다. 연초부터 이른바 오너 ‘책임경영’으로 ‘정의선 효과’를 누리면서 증시의 새별로 등장했던 정 사장은 하반기 들어 현대차 비자금 사건, 기아차 실적 악화 등 악재가 겹치면서 어느해보다 괴로운 한 해를 마감해야 했다.
기아차는 지난해 3월 이전만 해도 오너인 그가 ‘책임 경영’을 한다는 점에서 주가도 승승장구하고 각 증권사의 추천도 쏟아지며 파죽지세의 기세로 내달렸다. 2004~2005년에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정의선 사장이 손대는 기업마다 성공, 미다스의손으로 불렸던 행복한 시절이 오버랩됐던 까닭이다. 게다가 정 사장이 기아차 주식 1.99%를 보유한 뒤 경영권 승계를 위해 주식 추가 매집에 나설 것이란 분석도 기아차 주가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절정은 2006년 1월 31일. 기아차 주가는 2만 8150원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해 3월 26일 대검 중수부의 현대차 글로비스 현대오토넷에 대한 기습적인 압수수색이 벌어지면서 기아차 주가는 몇 년 전 주가 수준으로 추락했다. 요즘은 1만 원대 방어도 힘겨운 듯 그 아래쪽으로 주가 그래프가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
기아차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보유하고 있는 현대차 기아차 글로비스의 주가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지난해 한때 정 사장이 보유한 주식의 시가총액은 1조원에 육박했지만 지난 1월 중순 정 사장의 주식보유액은 3300억 원대로 주저앉았다. 일년 동안 보유 주식의 가치 중 3분의 2가 허공으로 날아간 셈이다.
기아차 주가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정의선 기아차 사장의 경영평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현대차에선 후계자로 내정된 정의선 사장이 주식 보유뿐 아니라 능력면에서도 성공적인 전문경영인으로 평가받기를 원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가장 큰 내부 현안은 정의선 사장이 계열사를 지배할 수 있는 주식 확보와 이를 위한 현금 마련, 그리고 정 회장의 성공적인 경력쌓기(경영수업)다.
정몽구 회장이 영어의 몸이 되게 한 현대차 비자금 사건의 핵심도 사실상 2세 후계 구도를 짜면서 발생한 계열사 간 거래가 문제였다. 정의선 사장과 정몽구 회장의 계열사 지분 확보를 위한 ‘실탄’ 마련 과정이 문제가 된 것이다.
현대차 비자금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현대차는 진작에 2세 승계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겠지만 비자금 사건이 터지고 글로비스 주식 헌납 선언 등으로 정의선 후계 작업은 상당부분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글로비스 주식 매각을 통한 실탄마련 작업은 사실상 물 건너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비상장 계열사 지분도 당장 움직이기 힘들어졌다. 지분과 관련된 2세 승계작업은 중지된 것에 다름아니다. 정 사장 입장에서 다행이라면 지난해 하반기 정 사장에 대한 사법처리설이 사법당국에서 거론되기도 했지만 정몽구 회장이 모든 것을 떠앉고 감옥에 가면서 충격적인 상황에 대한 경험은 면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 사장을 둘러싼 환경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고 있다. 기아차의 매출 성적이 신통치 않은 점도 정 사장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2006년 기아차는 국내판매나 해외판매가 소폭 증가했지만 판매대수의 증가보다는 대당 판매가의 증가로 매출이 늘고, 판매관리비의 증가로 영업이익이 1252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IMF 이후 8년 만에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하지만 정의선 사장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정 사장은 지난해 기아차에서 가장 많이 출장을 다닌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기아차의 유럽생산거점인 슬로바키아 공장 건설을 독려하고 미국 공장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슬로바키아 공장은 지난해 12월 초부터 기아차의 유럽 공략 모델인 ‘시드’를 양산하기 시작해 결실을 맺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호재도 기아차에는 당장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해 12월 들어 기아의 경영실적 악화가 가시화하면서 증시에서는 정 사장이 기아차 경영진에서 빠지고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섣부른 추측이 나돌고 이것이 기아차 주가하락을 부추겼다. 기아차 실적이 정의선 사장에 대한 경영평가라는 점에서 현대차그룹에서 정 사장 보호에 나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한때 기아차 주가를 끌어올렸던 ‘정의선 효과’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 셈이다.
또 기아차 실적악화의 주범은 기아차의 주력 수입원인 RV 차종에 대한 국내수요 감소와 환율 악화 등 외부적인 요인의 영향이 컸지 해외 판매 실적이 악화됐기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기아차 경영진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얼마 전 현대차가 성과급 지급 문제로 파업사태를 겪자 뚜렷한 이유없이 기아차 쪽에서도 부랴부랴 성과급을 지급, ‘기아차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의혹을 키운 적이 있다. 이는 기아차 경영진이 내부에 크게 약점을 잡힌 게 아니냐는 설로 발전하기도 했다. 평지풍파를 일으킨 셈이다. 그러자 기아차에선 새벽 판촉 캠페인 등 분위기 반전용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지만 시장의 악화된 시각을 돌이키지는 못했다.
재계에선 정몽구 회장이 후계 작업 완성을 위해 어떤 카드를 내놓을지 주목하고 있다. 정 회장은 정 사장 보호를 위해 스스로 감옥에 갈 만큼 2세 구도 완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현대차 비자금 사건과 관련된 1심 선고는 2월 초. 재계에선 1심 선고 이후 현대차와 기아차에 대규모 인사가 있을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문제는 정의선 사장의 거취이다. 그는 슬로바키아 공장 양산 돌입 등 해외경영의 ‘성공적 완수’를 뒤로하고 전문 경영인으로서 현대차그룹의 핵심인 현대차 경영진으로 투입될 수도 있고 기아차의 고질적인 문제인 내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기아차 오너 경영인으로 책임 경영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정 사장이 언젠가는 현대차 경영진에 합류할 것은 확실하다. 그게 2세 승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또 현대차 수뇌부에서 정 사장의 성공적인 이력관리에 나설 것 역시 분명하다. 현대차에서 기아차 경영과 정 사장의 거취 문제를 어떻게 정리할지 주목된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