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2월 금호아시아나그룹 새 CI선포식에 참석한 박삼구 회장. | ||
얼마 전 대한항공은 미국의 브랜드 개발 전문업체 랜도(Landor)사를 상대로 ‘계약 위반으로 발생한 손해 110만 달러를 보상하라’며 중재신청에 나섰다. 지난 2003년 6월 랜도사와 CI 계약을 체결하며 ‘향후 4년간 다른 경쟁사(항공업체)와 유사한 계약을 맺지 않는다’고 합의한 것을 랜도사가 어겼다는 주장이다. 랜도사가 지난 2004년 9월 대한항공 CI 작업 종료 후 금호아시아나그룹과 CI 개발 계약을 맺은 것을 가리킨다. 금호아시아나는 지난해 초 새로운 CI를 발표했다.
한편 업계 인사들은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직접적인 보상요구가 아님에도 ‘대한항공이 사실상 아시아나항공을 겨냥한 것’이라 보고 있다. 국내 항공업계를 대표해온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신경전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이미 올해 들어 파리 노선 문제로 서로 얼굴을 붉힌 바 있다. 정부는 파리 노선 복수취항 허가를 대가로 프랑스 정부가 제시한 EU공동체 조항을 받아들인 바 있다. EU 소속 국가들은 한 국가나 마찬가지라는 취지 하에 국내업체가 프랑스 공항에 추가로 들어가는 대신 EU 소속 국가들 전체가 국내 공항에 들어올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가 관철된 것이다.
당시 대한항공은 정부가 ‘아시아나의 수익을 늘려주려다 결국 외국 항공사들의 국내시장 잠식을 자초한 격이 됐다’는 내용의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이에 대해 아시아나는 ‘공급이 늘어나면 소비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며 받아쳤다. 당시 대한항공의 주 비판 대상은 정부였지만 궁극적인 타깃은 아시아나항공이었다는 것이 업계 인사들의 평이다.
금호아시아나의 새 CI 발표는 이미 1년이나 지난 일이란 점도 호사가들의 입방아 메뉴다. 금호아시아나는 지난해 1월 1일 창립 60주년을 맞아 기업 이미지 개선작업의 일환으로 새 CI를 공개한 바 있다.
얼마 전 아시아나의 파리 노선 입성을 전후로 정부와의 갈등을 겪었던 대한항공이 아시아나를 겨냥한다는 평을 들어가면서 랜도사를 상대로 강경대응을 불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일각에선 대한항공 모기업인 한진그룹이 아시아나항공을 보유한 금호아시아나그룹에 대한 경계의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해 대한항공은 매출과 영업이익 규모에서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거뒀다. 그러나 아시아나항공 또한 지난해까지 3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며 재무구조를 안정적으로 개선해 가고 있다. 더욱이 지난해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재계 순위 8위까지 뛰어올랐다. 한진그룹보다 늘 한 수 아래로 여겨졌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10대 재벌 입성으로 재계 7위 한진의 턱밑까지 쫓아온 것에 대한 위기의식이 작용했다는 평이다.
대한항공의 랜도사에 대한 배상신청으로 빚어진 논란에 대해 금호아시아나 측은 공식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번 중재신청과 배상신청이 랜도사를 향한 것이라 굳이 논란에 휩싸일 필요가 없다는 자체판단이 있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또 랜도사 측에서는 계약 당사자가 항공사인 아시아나가 아니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전체적인 CI였다는 점에서 대한항공 측이 주장하는 ‘동종업계 계약 금지’ 조항에 걸리지 않는다는 주장도 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번 CI 논란은 금호아시아나 측에도 고민을 안겨주고 있을 법하다. 이미 금호아시아나는 새 CI로 약간의 내부 문제를 겪은 바 있다. 빨간색 화살표 모양의 새 로고를 옷에 부착하는 배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정장이나 근무복에 빨간색 배지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내부 비판론이 일어나 결국 은회색 배지를 따로 만드는 굴곡을 겪은 것이다. ‘외국회사에 비싼 돈 주고 만든 로고치곤 너무 단순하다’는 지적도 등장했던 바 있다. 오스트리아항공이 빨간색 화살표 모양의 로고를 이미 사용해왔다는 점 또한 논란거리가 됐다. 오스트리아항공의 로고 또한 이번에 논란이 된 랜도사가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뒷말을 낳기도 했다.
랜도사는 LG그룹의 CI를 담당했으며 최근 GS그룹의 CI 작업도 담당했는데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마다 표절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어 곤욕을 치르고 있다. GS의 로고는 국내 중견기업인 삼이실업의 로고와 유사하고 프랑켄슈타인 서체라는 글꼴 디자인을 거의 그대로 갖다 썼다. 프랑켄슈타인체의 S자와 GS의 로고의 차이라면 S자의 꼬리 부분을 좀 짧게 자르고 빨강 초록 파랑의 삼색을 부여했다는 정도이다. 때문에 GS 쪽에서 랜도사의 디자인을 채택하기 이전에 사전조사가 부족하지 않았느냐는 논란이 일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전력에도 랜도가 유독 국내 재벌그룹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한편 이번 CI 논란이 국내 10대 재벌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한진과 금호아시아나 간의 신경전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양측에 대한 비난론도 등장한 상태다. 양측은 지난 2002년 런던 노선, 2004년 상하이와 타이페이 노선, 2005년 시애틀 노선, 2006년 이스탄불과 미얀마 항공권 분배를 놓고 대립국면을 연출해 왔다. 지난해 9월엔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을 상대로 ‘비행운영 매뉴얼 저작권침해정지 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극한대립을 향해 가던 양측은 지난해 화해무드를 잠시 조성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 비행기를 도색해주는 방안이 모색됐던 것으로 업계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측 의견 차이로 무산돼 결국 아시아나항공이 중국에서 도장작업을 하게 됐다. ‘양측의 라이벌 의식이 애꿎은 외화 낭비만 초래했다’는 비난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양측은 서로를 향해 디자인 험담과 시장독점 논란 등을 제기하며 상호비방전을 펼쳐왔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