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신임 사외이사들은 각 기업의 대선정국에 대한 능동적 대처에 조력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한편 각 기업이 처해있는 껄끄러운 상황을 돌파하는 데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들이 화려한 이력서를 자랑하는 사외이사들을 대거 영입해 ‘부족한 2%’를 채우려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삼성그룹 계열사인 제일모직은 지난 2월 28일 주주총회에서 윤영대 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을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기업 활동을 감시하는 공정위 출신 인사를 영입해 관가와 교감의 폭을 넓힐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기가 강병호 전 금감원 부원장을, 에스원이 김영섭 전 관세청장을 사외이사로 재선임한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풀이된다.
삼성그룹의 윤 전 부위원장 영입은 대선정국과 관련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윤 전 부위원장의 지난 1998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전문위원 활동 경력이 눈에 띄는 것이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정권교체와 새 정부 출범 과정에 관여했던 윤 전 부위원장의 경력이 삼성의 마음을 얻은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제일모직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으로 신규 선임된 예종석 한양대 교수는 현재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범여권의 대선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박원순 변호사가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로 활동하며 예 교수와 인연을 맺어왔다는 점을 눈여겨보는 시선도 있다. 박원순 변호사는 포스코의 신규 사외이사로 선임돼 눈길을 끌기도 했다.
재계 1위 삼성의 신규 사외이사진이 다분히 대선을 의식한 포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재계 2위 현대차의 사외이사 신규선임은 당장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비자금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현대자동차는 지난 3월 9일 주주총회에서 강일형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을 사외이사로 신규선임했다. 세무 전문가인 강 전 청장은 감사위원도 겸하게 돼 현대차의 세무 관련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 (왼쪽부터) 윤영대 전 부위원장, 임영철 변호사 | ||
현대모비스는 최병철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을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최 고문은 국세청 국세조세과장을 거쳐 대통령비서실 행정관과 법무비서실 국장 등을 지낸 인물. 재판을 받으면서 정부와 정치권 눈치도 살펴야 하는 현대차그룹의 입장에 맞는 전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SK 주주총회를 통해 공개된 사외이사 명부에선 조순 전 서울시장의 재선임이 눈에 띈다. 조 전 시장은 최태원 SK 회장의 장인인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경제부총리를 지냈으며 김영삼 정부 시절 당시 야당세력을 이끌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서울시장직에 입성했고 김대중 정부 하에선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명예총재를 지냈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여러 정권 때마다 권력의 핵심을 맴돌았던 조 전 시장의 존재감을 SK가 높이 사고 있는 셈이다.
SK텔레콤은 심달섭 전 재경부 관세국장을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정보통신부가 오는 7월부터 유무선 결합상품제 도입을 결정함에 따라 아직 유선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한 SK텔레콤의 향후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SKT는 인수 합병을 저울질하는 한편 KT 등 경쟁사 동향 파악을 위해 관가와 접촉빈도를 늘릴 것으로 예상된다. 대정부, 대관공서 업무에 강점을 보여온 SK가 심 전 관세국장 영입을 통해 대관업무 능력치 극대화를 노린 것으로 풀이된다.
유무선 통합서비스 시장에서 SKT와 격전을 치를 것으로 보이는 KT는 오명 전 과학기술부총리를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과학기술분야 고위관료 출신 인사 영입을 통해 격변하는 통신서비스 시장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 지난 2005년 3월 SK(주) 주총에 참석한 조순 전 서울시장. 조 전 시장은 올해 다시 사외이사로 선임되었다. | ||
LG생명과학은 심창구 서울대 교수를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심 교수는 현 정부 초기 식품의약품안전청 청장을 지냈다. 심 교수 영입은 업계 정책을 관장하는 관가의 동향 파악과 대응을 위한 포석으로 받아들여진다.
지난해 참여연대의 총수일가 차명주식 관리 의혹 제기로 참여연대와 갈등을 빚은 신세계는 이주석 전 서울지방국세청장과 황병기 전 감사원 사무총장을 신규 사외이사로 영입했다. 그밖에 SBS는 정해창 전 법무부 장관, 계룡건설은 김각영 전 검찰총장, 수산중공업은 진념 전 경제부총리를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해 정·관계에 대한 외연의 폭을 넓혔다.
일각에선 이런 화려한 경력의 사외이사들이 기업경영에 보탬이 되기보다는 총수일가의 안위를 위한 ‘병풍’으로 동원되는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사외이사들의 이사회 출석률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두산 주주총회에선 주주들이 출석률이 형편없던 사외이사 후보에 대해 반대의사를 밝히는 바람에 재선임 과정이 순탄치 않았으며 현대오토넷의 김앤장법률사무소 소속 사외이사 후보에 대해선 저조한 이사회 출석률을 근거로 주주들이 재선임 안건에 반대하는 일이 벌어져 사측을 당혹케 했다. 올해로 3년 임기의 LG전자 사외이사를 마친 진념 전 부총리는 사외이사 재임 첫해인 2004년 91%의 높은 이사회 출석률을 보였지만 2005년엔 62%, 2006년엔 71%에 그쳐 2005~2006년 이사회 개근을 한 나머지 LG전자 사외이사들과 대조를 이루기도 했다.
일부 사외이사들의 이런 저조한 출석률은 물론 ‘밖’에서만 열심히 활동해 기록이 안 남은 것일 수도 있다. 밖에서만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의 대표적 예가 로비스트다. 하지만 사외이사와 로비스트는 엄연히 다른 것이기에 논란이 되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