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후보가 12월 5일 호남지역 첫 유세지인 여수 서시장에서 시장상인들과 악수하고 있다. 오른쪽은 문재인 후보가 같은 날 대학가 첫 유세지인 서울시립대에서 학생들과 포옹하는 모습. 이종현·박은숙 기자 |
▲ ‘빨간운동화’가 박근혜 후보 유세 전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이종현 기자 |
지난 12월 5일 11시 30분경, 여수 서시장에 박근혜 후보를 태운 차량이 도착하자 길목을 지키고 있던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측근이었던 이춘상 보좌관의 사망 이후 3일 만에 유세를 재개한 박 후보는 새누리당의 취약 지역인 호남을 첫 번째로 방문했다. 여수 시민들은 검정색 롱패딩에 빨간 목도리를 두른 박 후보가 모습을 드러내자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동시에 경호원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사복을 입은 예닐곱 명의 경호원들은 근접 취재를 위한 기자들과 박 후보 사이에 한두 사람만 들어갈 수 있도록 공간을 남긴 채 대열을 유지했다.
박 후보는 좁은 공간을 능수능란하게 다니며 시장 상인들과 인사를 나눴다. 상인들은 “(편지를 건네며) 너무 고우세요” “힘드시죠? 얼굴 너무 상했다” “TV랑 똑같으시다”라며 박 후보를 환영했다. 휴대폰으로 사진 촬영을 요청하거나 박 후보의 책을 직접 가지고 와 꺼내 보이기도 했다. 박 후보 역시 연신 웃는 얼굴로 “날씨가 화창하니까 오늘 좀 더 많이 인사드리고 가겠다” “아기 몇 살이나 됐어요? 빠이빠이는 할 줄 알아요? 빠이빠이” “장사하는 분들 살맛나게” 등의 살가운 인사를 빼 놓지 않았다.
그러나 호남 민심이 어디 그리 만만할까. 박 후보가 지나간 뒤 일부 상인들은 “거 참 시끄러워 죽겠네” “일본강제노동이 다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사람들 때문 아니었나”라고 수군거리며 박 후보의 방문을 호응해 주지 않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정치인의 시장 유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시식타임. 카메라 플래시가 가장 많이 터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날 박 후보는 유세차량에 오르기 직전 만두가게에 들러 찐빵 10개를 구입했다. 이 순간, 현장을 동행하던 조윤선 대변인은 재빨리 박 후보에게 다가가 만원권과 천원권 지폐 뭉치를 접어서 건넸다. 새누리당 대변인 측은 “예전에는 떡볶이나 어묵을 사 먹는 것도 사전 방문해 조율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모든 게 자연스럽게 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박 후보는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답게 경호 수준이 ‘대통령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항에서 출발 대기한 차량만도 8대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11대까지 늘어났다. ‘컨보이(경찰호송)’ 차량 두 대가 앞뒤로 이 대열을 이끌었고 3대의 취재단 버스와 전의경 차량 2대는 유세 현장에 먼저 도착해 길목을 지키고 서 있거나 기사 송고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새누리당 대변인실 관계자는 “인원이 비효율적으로 많은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지역에서 유세를 도와주려는 분들이 많은데 이를 거절할 수도 없지 않느냐. 전의경들이 배치되는 것도 좁은 곳에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안전상의 이유로 지자체에서 배려해 주는 것이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여수공항에서 박 후보를 위해 자동문을 열어두고 있는 모습이나 순천 유세 때 한 중년 여성이 꽃다발을 건네기 위해 기다리고 있자 경호원이 그것을 빼앗아 사전 검사를 하는 광경은 다소 지나쳐 보이기도 했다.
현장 분위기에 관계없이 박 후보는 내내 ‘선거의 여왕’다운 모습을 유지했다. 여수에서는 여수엑스포, 순천에서는 순천정원박람회를 연설 서두에 언급하며 지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날 여수-순천-목포-광주 4개 지역을 돈 박 후보는 캠프의 슬로건인 ‘국민대통합’을 강조하며 “호남의 상처와 눈물을 닦아드리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라며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이는 참여정부 시절 ‘호남 소외론’을 호남 유권자에게 되새기게 하는 전략인 듯했는데 연설 때마다 동교동계 출신인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회 수석부위원장, 김경재 기획특보의 소개를 잊지 않았다.
이에 화답하듯 김경재 기획특보는 여수 유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싸가지 없는 발언이나 하고, 호남 사람들을 한 맺히게 했다. 우리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라며 강도 높게 말했는데 이날 가장 ‘쎈’ 발언으로 회자됐다.
마지막 유세 현장인 광주. 비를 맞고 서 있었던 인요한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은 “시간이 없어 김밥을 먹으면서 유세 현장을 쫓아 다니고 있다. 호남에서 표가 많이 나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모든 유세 일정이 끝나고 광주역으로 향하는 취재단버스 안에서 대변인실 관계자는 “광주 유세 현장에 모인 인원이 경찰 추산 1000명”이라고 공지했으나, 이를 믿는 기자들은 별로 없어보였다. 사람 수로 세를 과시하던 ‘옛날식 유세’도 서서히 막을 내리는 모습이었다.
▲ 문재인 후보 도착 전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 ‘게릴라유세단’. 박은숙 기자 |
TV 토론 다음날인 12월 5일,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나타난 곳은 서울시립대, 한양대, 홍익대 등 서울 소재 대학가였다. 원래 계획했던 서부권(충청-호남) 집중유세를 전격 취소하고 돌연 대학가 유세에 나섰다는 점에서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다. 유세현장을 떠나기 전, 캠프 기자단 사이에서는 “청년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안철수 전 후보의 깜짝 방문을 염두에 둔 일정 아니냐”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지만, 깜짝쇼는 벌어지지 않았다.
당일 폭설로 인한 교통 혼잡 탓에 문 후보의 캠퍼스 유세는 여의치 않아 보였다. 문 후보는 원래 예정됐던 시간보다 한 시간 늦은 오후 4시가 돼서야 첫 유세 장소인 서울시립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학가 유세 시발점으로 서울시립대를 꼽은 이유는 무엇보다 처음으로 ‘반값등록금’을 시행한 상징성 탓인 것으로 보인다. 문 후보 스스로 현장에서 “서울시립대는 처음 반값등록금을 한 대학이다. 내가 반값등록금을 공약할 수 있게 용기를 준 곳이 이곳이다”며 친근함을 표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 후보의 단출하고 ‘콤팩트’한 유세 조직이었다. 이번 대선 유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빌린 그랜드카니발 한 대와 그 뒤에 따라붙는 제네시스 승용차 두 대가 전부였다. 대규모 차량을 이끌고 다니는 박근혜 후보와는 상당히 대조되는 장면. 기자와 만난 한 민주당 선거상황실 관계자는 “문 후보는 원래 유세 현장에 나설 때, 최소한의 인원으로 이동한다. 기동성과 전략을 고려해 아무리 많아도 차량 세 대를 넘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문 후보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캠퍼스 설원 위에서 20~30대 청년들이 주축이 된 시민캠프 ‘게릴라 유세단’이 분위기를 달궜다. 귀여운 동물 코스프레까지 준비한 ‘게릴라 유세단’은 경쾌한 로고송에 맞춰 율동을 춰가며 대학생들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대규모 ‘보트 몹’(vote mop·투표를 독려하는 일종의 플래시 몹)을 펼치기도 했다.
폭설로 인해 생각보다 모인 인원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문 후보를 보기 위해 300~400명가량 운집한 캠퍼스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곳곳에는 ‘여의도 텔레토비 문제니(인기 케이블 프로그램 SNL의 문재인 풍자 캐릭터) 노동인권 보장하라’는 내용의 피켓을 든 몇몇 학생도 눈에 띄었다. 유세단은 문 후보가 등장하고 퇴장할 때마다, 신해철의 히트곡 <그대에게>를 띄워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문 후보 본인도 학생들과 포옹과 악수를 건네며 적극적인 스킨십을 주저하지 않았다. 집중유세였던 홍대에서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 통역을 대동하기도 했다.
박근혜 후보가 기자와 후보 사이에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등 경호에 각별한 신경을 쓰는 것과는 달리 문 후보의 경호는 비교적 느슨했다. 학생들은 문 후보 바로 코앞에서 스킨십을 나눌 수 있었지만 주변은 혼란이 가중되기도 했다. 효율적이고 콤팩트한 유세 조직은 좋지만, 자체 경호 인력 부족으로 인한 혼잡, 주변 상인들에 대한 사전 양해가 전혀 없었다는 점은 무척 아쉬워 보였다.
문 후보는 이날, MB정권 심판은 물론 대학생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반값 등록금’과 ‘청년 일자리 창출’ 등 공약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는 현장에서 “2014년까지 모든 대학의 반값등록금을 실현하겠다. 이명박 대통령이 5년간 ‘부자 감세’로 깎아준 세금이 100조 원이다. 이거면 우리나라 사람 1인당 200만 원씩 나눠줄 수 있고 2000만 원짜리 일자리 500만 개는 만들 수 있다. 또 반값등록금을 20년 이상 할 수도 있다. 돈 없어서 반값등록금 못한다는데, 이게 말이 되나”라고 주장했다. 홍대 집중유세 현장에서는 인디음악의 고장이라는 그 지역 특성에 맞게 “지금 인디밴드, 독립영화가 주류문화를 뛰어넘고 있다. 내가 정치를 바꾸는 국카스텐이 되겠다”는 센스 있는 멘트도 준비했다.
문 후보가 유세 내내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은 투표 참여였다. 그는 홍대 집중유세 마지막까지 “지금 불공정 시합을 하고 있다. 여기 있는 분들은 물론 가족, 친구 손 이끌고 투표장 가자. 그런 간절함이 있어야 이긴다”고 강조했다. 마치 선관위의 투표참여 캠페인 현장에 나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 민주당은 핵심지지층인 20~30대 청년층의 투표율이 최소 70%를 넘어야 이번 대선에 승부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문 후보가 TV 토론 후 첫 유세장소로 대학가를 택했다는 점은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여수·순천·광주=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 박근혜 유세 지원자로 나선 김흥국 씨. |
▲ 문재인 유세 지원자로 나선 안도현 시인(왼쪽)과 도종환 의원. |
새누리당엔 ‘별’들, 민주당엔 시인들이
유세하면 역시 빠질 수 없는 게 유세현장 바람잡이들이다. 이러한 바람잡이가 사전에 얼마나 분위기를 띄우느냐에 따라 유세현장 분위기와 청중수가 확 달라진다. 12월 5일, 문재인 후보의 대학가 유세 현장에는 도종환, 최재천, 홍익표, 정호준, 은수미 등 현역 의원들이 대거 출동했다.
이들 중 현장마다 앞장서며 분위기를 띄운 ‘바람잡이 인사’는 시인 출신인 도종환 의원이었다. 도 의원은 문 후보가 도착하기 전, 미리 유세 장소에 나서며 학생들의 분위기를 띄우고 바람잡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의 입담은 정치권 안팎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서울시립대 기조연설 자리에서 “정권교체, 시대교체 적임자는 문재인이다”며 적극적인 지지호소에 나서는 한편 “문 후보가 원래 경상도 사나이라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 게다가 비서실장 하며 속을 썩어 이도 10개나 빠졌다. 발음이 많이 나빠도 이해해 달라”고 우스갯소리를 던져가며 학생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분위기가 절정에 올랐을 시점에는 자신의 대표작 ‘담쟁이’를 본인의 육성으로 직접 낭송했다. 분위기에 동화된 몇몇 학생들은 도 의원과 함께 ‘담쟁이’를 읊어 내려가기도 했다.
마지막 홍대 집중유세 현장에는 문 후보 등장 전, 김영경 전 청년유니온 위원장, 안도현 전 공동선대위원장 등이 기조 연설자로 나서며 지원사격에 나섰다. 특히 안 전 위원장은 “확 뒤비뿌까(뒤집어버릴까)” “허벌나게(크게) 밀어줄까” 각각 영·호남 사투리 버전으로 문 후보 지지를 호소하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한편 새누리당 유세 현장에서는 연예인들의 지원이 돋보였다. ‘누리스타’라는 이름으로 박 후보의 유세 현장을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은 가수와 탤런트, 개그맨, 스포츠 스타 등 120여 명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12월 5일 전남 유세에서는 배우 송재호 정동남 정호근 강만희, 개그맨 김종국 등이 함께 했다.
이들은 유세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의미를 두는 듯했다. 마지막 유세 현장인 광주 유세 현장에서 사회를 맡은 강만희 씨는 박 후보의 도착시간이 지연됨에 따라 준비된 레퍼토리가 떨어진 듯 “이제 곧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이곳 광주에 도착합니다”를 되풀이했다. 가장 호응이 좋았던 때는 지난번 유세 현장에서 ‘소양강 처녀’를 불렀다 선관위로부터 구두경고 조치를 받았던 설운도 씨를 소개할 때였다.
새누리당 캠프 관계자는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스타들이 함께해 유세 현장을 달굴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