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외에도 1992시즌 KBO리그는 리그 창설 10주년을 넘기며 점차 무르익어갔다. 당시 400만 관중 돌파를 눈앞에 두며 규모를 키웠다. 이에 일요신문은 1992년 KBO리그 현장의 주역으로 활약한 92학번의 일원 정민철 현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으로부터 당시 이야기를 들어봤다.
먼저 그에게 황금의 92학번 선수 순위를 나열해달라 부탁했다. 여러 세대를 통틀어서도 명성을 떨쳐왔기에 이들 간의 '줄 세우기'는 일종의 놀이로 자리를 잡았다. 정 해설위원은 "고등학교 3학년 당시 기준으로 내 관점에서 1번은 휘문고 임선동이다. 2번은 경기고 손경수, 3번은 신일고 조성민, 4번은 광주일고 박재홍이다"라며 "다섯 번째는 다들 비슷비슷하게 경합이라고 본다. 차명주(경남상고), 나, 박찬호(공주고), 염종석(부산고), 안병원(원주고) 정도 나열하면 될 것 같다. 앞서 네 명보다 완성도는 떨어졌다. 물론 찬호는 '코리안 특급'이 됐지만 당시 기준으론 차이가 있다고 본다. 공은 굉장히 빨랐으나 제구가 좀 안 좋기는 했다. 종석이와 나보다 위로 평가받는 선수들이 많았기에 우리가 프로에서 곧장 활약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잘 알려져 있듯 정 해설위원은 1992년 빙그레 유니폼을 입고 화려한 데뷔 시즌을 치렀다. 데뷔 직후부터 강팀 빙그레의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 33경기 14승 4패 7세이브 145삼진, 평균자책점 2.48을 기록했다. 신인으로서 손에 꼽히는 성적이다. 빙그레도 정규시즌 우승,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다만 황금세대로 불리던 정 해설위원의 동기들은 대거 KBO리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고교 무대에서 주목받는 자원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그때의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그는 고교 졸업 직후 프로행을 택했다.
"나는 동기들처럼 어릴 때부터 야구를 잘했던 선수가 아니었다. 중학교 때는 전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래서 1년 유급을 했고 대학에서도 동갑내기들이 선배인 상황이 이어지는 것이 싫었다. 운이 좋게도 고등학교 2학년 때 빙그레의 입단 제의를 받았다. 3학년 때는 성적이 좋아서 고려대 입학 제안이 있었지만 내 마음은 프로에 있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프로 무대에 진출했지만 고졸보다 대졸 출신이 선호되던 시기였다. 그는 "같이 입단한 대졸 형님은 계약금 포함 총액 1억 원을 받았는데 나는 2500만 원이었다(웃음)"면서 "당연히 나는 스프링캠프도 못 가고 국내에서 훈련했다. 팀에서 기대받는 선수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시작부터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기에 프로에서의 생활 하나하나가 정말 소중했다. 뛰라면 뛰고, 던지라면 던졌다. 그때 훈련 강도가 굉장히 혹독했는데, 어린 내가 묵묵히 소화를 하니 감독님, 코치님들이 좀 기특해 하셨던 것 같다. 프로 타이틀을 달고 있었지만 오리걸음도 시키던 시절이다. 그래도 누구보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했다. 지금 돌아보면 '비슷한 기량이면 정민철에게 기회를 줘보자'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내가 투구 폼이나 메커니즘은 꽤 좋았다(웃음)."
극적인 데뷔 이후 이야기는 알려진 대로다. 데뷔 첫 승리부터 아홉 번째 승리까지 완투를 이어갔다. 빙그레 이글스의 '아기 독수리'로 불리며 단숨에 주목받는 스타가 됐다.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인기의 척도는 팬레터였다. 당시 팀에 장종훈 선배, 송진우 선배 등 스타들이 많았지만 팬레터는 내가 압도적으로 많았다(웃음). 원정 경기를 가서도 훈련을 하면 관중들이 인형이나 선물을 던져줬다. 원정 숙소로 밤새도록 전화가 올 때도 있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선수가 흔치 않았기 때문에 좀 신선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신인 정민철'은 당시 인기와 분위기를 즐기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감히 내가 어떻게 즐기겠나(웃음). 형들 심부름 다니기 바쁘던 시절"이라며 "구타 문화가 남아 있어서 경기 끝나고 집합하면 서른 넘은 선배들도 맞던 때다. 인기 좀 끈다고 절대 건방지게 행동할 수는 없는 분위기였다. 팬레터 같은 주변 상황은 달라졌지만 내 생활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 해설위원은 1992년 당시의 야구단 밖의 문화에 대해서도 회상했다. 그는 "팀도 무서웠지만 그땐 사회도 무서웠다"며 웃었다. 이어 "그때 야구장은 '19금'이었다. 경기에 지면 욕설과 음식물이 쏟아지는 것은 일상이었다. 옷을 다 벗고 망에 매달리는 분도 계셨다.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우리가 패했을 땐 관중들이 구단 버스를 깨부쉈다. 선수들 플레이도 빈볼이 난무하고 슬라이딩도 거칠었다. 프로야구만 그랬던 게 아니다. 때론 '낭만'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참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렇게 특출한 기록을 남겼음에도 1992시즌을 마친 뒤 정 해설위원에게 남은 타이틀은 없었다. 신인왕은 더욱 '괴물' 같은 기록을 남긴 염종석 현 동의과학대 감독이 가져갔다. 정 해설위원과 함께 '고졸 돌풍'을 일으킨 92학번의 일원이다.
이후로도 정 해설위원은 당대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혔으나 골든글러브, MVP 등의 수상경력은 없다. 이에 '상복이 없는 선수'로 불리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그는 "전혀 아쉬울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나를 스스로 돌아봤을 때 좀 낙천적인 성격인 것 같다"면서 "중학교 때까지 공식 경기에는 출전도 못했다. 고등학교 때는 유급을 해서 친구들을 선배로 대우해야 했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얼마나 어둠 속에서 보냈겠나(웃음). 그래서 나는 프로에서 기회를 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나 정말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1992년은 어떤 해로 기억이 남는지 물었다. 그는 "드라마 같은 1992년이었다"고 답했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나다(웃음). 내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그 정도로 믿어지지 않는 시간들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정말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됐다'. 시즌을 마치고 신병교육대에 입소했다. 한창 몇 개월 동안 주목받는 삶을 살다가 입소했는데 거기에서도 수많은 군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정말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