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새천년민주당(민주당 전신)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기 위해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했다. 일반당원과 국민의 참여를 통해 정당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당내 비주류 세력이 기득권 구조를 깰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경선 규칙은 대의원 20%, 당원 30%, 일반 국민 50% 등의 비율로 정해졌다. ‘노사모’라는 정치 팬덤을 등에 입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이후 정당들은 당원과 국민 투표 비율을 늘렸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 전신)은 온라인 입당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 결과 민주당은 약 111만 명(8·2 전당대회 기준)의 권리당원을 보유한 정당이 됐다. 뒤이어 국민의힘도 온라인 입당 시스템을 도입했고, 약 70만 명의 책임 당원(권리당원)을 확보했다.
정치권에서는 의원보다 권리당원들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들도 많다. 2021년 국민의힘 전당대회 때 2030 남성들이 조직적으로 국민의힘 당원으로 가입했다. 이들은 이준석 당대표 당선의 주역이 됐다. 21대 대선 때 국민의힘 당원들은 김문수 후보를 교체하려 했던, 이른바 ‘새벽 쿠데타’를 저지했다. 당시 권영세 비대위는 새벽에 기습적으로 대선 후보를 김문수에서 한덕수로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후보 교체 정당성 확보를 위한 당원 대상 ARS 투표에서 당원들은 ‘교체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당원권 강화의 수혜자다. 정치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대통령은 민주당 주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주류인 친문계(친문재인계)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 대통령은 당원들의 지지를 원동력으로 당권과 대권을 잡았다. 이번 민주당 당대표 선거에서도 ‘당심(당원 지지)’를 얻은 정청래 대표가 ‘의심(의원 지지)’를 얻은 박찬대 후보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거대 양당이 한목소리로 당원권 강화를 외치는 이유다. 정청래 민주당 신임 당대표는 ‘당원 주권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대의원과 권리당원이 똑같은 1표 행사 △지명직 최고위원 1명 평당원에서 선출 △평당원 중심 당원 주권 업무를 위한 당원 주권국 신설 △당원 교육 강화 △당원 포상제 확대 및 연말 전 당원 콘서트 실시 △당원과 국회의원 소셜네트워크 역량 지방선거 공천에 반영 △매년 당원 박람회 개최 등을 공약했다.
국민의힘 당권 주자들도 당원권 강화 공약을 내걸었다. 김문수 후보는 주요 당론 결정에 전 당원 투표를 적극 활용하고, 관련 내용에 대한 당원 토론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조경태 후보는 당원 소통 플랫폼 구축, 공천 기준·정책 방향 당원 참여, 일정 수 이상의 당원 제안 안건 최고위 논의 의무화 등을 약속했다.
서용주 맥 정치사회연구소 소장은 “당원이 (당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것은 맞다”고 했다. 다만 서 소장은 “단점은 너무 여론 추이에만 끌려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빅 스피커들에 의해서 여론이 주도되는 것들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심리적 내전’ 갈수록 심화
당원권 강화 흐름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불거진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는 곳도 적지 않다. 당원과 일반 국민 간 여론의 괴리, 당내 계파 갈등 심화 등이다.
2015년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당대표 선출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당시 영국 노동당은 ‘1당원 1표제’를 도입했다. 신규 당원들의 압도적 지지 속 코빈은 59.5% 득표율로 당선됐다. 코빈은 지지자들의 요구를 반영해 철도 국유화 등 급진적 정책을 폈다. 당내 중도파 세력은 코빈 지지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중도파 의원들의 노동당 이탈은 가속화됐다. 그 결과 2019년 총선에서 참패를 기록했다. 한 독자가 영국 진보지 가디언에 “정치 리더십의 완전한 실패가 모든 면에서 최종적으로 심판받게 된 것”이라는 의견을 보낼 정도였다.
한국도 유사한 장면들이 있다. 특히 강성 지지층의 무비판적 옹호, ‘좌표 찍기’와 같은 전방위적 공격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2020년 2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충남 아산의 한 전통시장을 방문했을 때 반찬 가게 상인이 ‘경기가 거지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문 대통령 지지자들은 이 상인의 신상을 털고 비난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민주당 당권을 잡은 후엔 비명계를 겨냥한 ‘수박(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 색출이 여러 차례 이뤄졌다. 비명계 의원들은 욕설이 담긴 문자 폭탄에 시달렸다. 이는 친명-비명의 갈등의 골을 더 깊게 만들었다. 2023년 9월 이재명 체포동의안이 통과되자 양측은 완전히 갈라섰다. 이후 22대 총선 공천 경선에서 대다수의 비명계 현역들이 탈락했다.
여론 괴리 현상도 나타났다.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에 지명된 강선우 의원의 갑질 의혹이 불거지자 민주당 강성 지지자들은 임명 강행을 원하는 분위기였다. 강 의원 사퇴를 종용한 박찬대 의원은 비난받았고, 임명 강행을 요구한 정청래 대표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일반 국민 여론은 달랐다. 조원씨앤아이가 스트레이트뉴스 의뢰로 발표한 7월 23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60.2%가 부적합하다고 응답했다.

정청래 대표는 ‘내란 옹호’ 정당과 협치는 없다는 입장이다. 정 대표의 발언 수위도 올라가는 모습이다. 정 대표는 8월 5일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서 “통합진보당 사례에 비춰보면 국민의힘은 100번 정당 해산감”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같은 날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KBS라디오 ‘전격시사’에서 “집권 여당, 다수당의 대표답게 소인배처럼 하지 말고 대인배답게 행동하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이러한 모습이 정서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할 것으로 우려한다. 대한민국은 ‘심리적 내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갈등이 심한 나라 중 하나다. 2022년 퓨어리서치센터가 공개한 조사에 따르면 19개 주요국 중 ‘다른 당 지지자 간에 갈등이 있냐’라는 질문에 ‘강하다’ 혹은 ‘매우 강하다’라고 응답한 비율은 한국이 90%로 가장 높았다. 미국은 88%였다. 이스라엘(83%) 프랑스(74%) 헝가리(71%) 순이다. 평균치는 60%대였다.
2024년 9월 발간된 논문 ‘정서적 양극화 줄이기: 상위정체성과 협치의 효과에 관한 두 개의 실험’에 따르면 국회의원 등 정치 엘리트가 협치하는 모습을 보일 때 정서적 양극화가 완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논문은 “협치는 단순히 여야 간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엘리트 간 협치는 우리 국민 사이에 형성돼 있는 정서적 양극화를 줄임으로써 분열된 국민을 통합하는 중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려스러운 것은 여야 강경 대치가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주당은 현 국면 귀책사유는 국민의힘에 있다는 입장이다. 민주당 원내지도부 관계자는 “협치는 중요하다”면서도 “국민의힘이 내란 세력과 단절하고 진정 어린 사과와 탄핵을 찬성했던 분들이 (당에) 들어와서 변화의 모습, 혁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정청래) 대표도 특별히 손을 내밀 명분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유력 주자인) 김문수 후보는 더 극우 세력 아닌가. 지금 봐서는 어렵다고 봐야 할 것”이라며 “국민들께서는 비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게 현 상황이다. 국민의힘 그것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은 과반 의석을 갖고 있는 집권당의 일방통행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정청래 대표의 연이은 강경 발언 역시 얼어붙은 정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하다. 국민의힘 한 초선 의원은 사석에서 “정 대표는 아예 우리와는 상대조차 하지 않겠다고 한다. 지금까지 한국 정당 역사상 이런 여당을 본 적이 없다”면서 “계엄 등에 대한 사과와는 별개로 여당이 이렇게 나오면 야당으로선 싸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