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 수출 환경 불확실성 제거, 자동차·조선 호재…투자 여력 미국 집중돼 산업 공동화 우려도
[일요신문] 지난 10월 29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 직전에 타결된 관세협상의 결과에 대한 셈법이 복잡하다. 일본 보다 나은 조건을 도출해 낸 협상 자체는 “잘 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에는 “그래도 부담”이라는 지적과 “그래도 국내 주식 시장에는 긍정적”이라는 기대가 엇갈린다. 강요 받은 투자인 만큼 당장 부담은 불가피하지만, 장기적으로 투자효과를 높일 여지가 없지 않다는 분석이다. 미국과 중국에 일종의 ‘양다리’를 걸쳤던 우리 경제의 구조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김용범 정책실장이 지난 10월 29일 경북 경주 APEC 미디어센터에서 한미 정상회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일본보다 낫지만 여전히 상당한 부담
이번 협상 결과 한국은 미국에 대한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현금 2000억 달러, MASGA(조선업 협력) 프로젝트 1500억 달러로 구성하기로 했다. 외환시장 부담을 감안해 현금 투자는 매년 200억 달러를 상한으로 정했다. 투자 구조도 한국이 출자하고 미국이 대응하는 형태로, 수익은 5 대 5 배분이 원칙이다. 투자 기간은 최장 20년이며 에너지·인프라·첨단기술 분야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정부는 투자 원금 회수를 위해 ‘상업적 합리성’도 명문화했다. 원리금이 보장되는 프로젝트만 추진하고 수익 배분 비율도 조정할 수 있다. 20년 내 원리금 미상환 시 한국에 유리하게 조정이 가능하다. 높은 이자율을 설정해 장기 투자 리스크를 보상하기로 했다. 우산(Umbrella)형 특수목적법인(SPC) 구조를 통해 특정 프로젝트 손실을 다른 프로젝트로 보전할 수 있다. 미국의 일방적 투자 요구 시 추후 협의가 가능해 한국의 의사결정 주도권도 확보했다.
일단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일본의 5500억 달러 패키지보다 원금 회수 가능성을 높인 구조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다만 3500억 달러라는 총 규모를 줄이지 못했고, 매년 200억 달러의 현금이 장기적으로 유출돼 외환시장에 부담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 기업의 투자 여력이 미국에 집중돼 국내 투자는 줄어 산업 공동화가 빨라질 가능성도 제기됐다.
#“불확실성 줄었지만 리스크 반영 불가피”
엇갈린 해석만큼이나 금융시장 반응도 애매하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협상 결과를 발표한 10월 29일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1.7원 급락하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불과 하루 뒤인 30일 원·달러 환율은 13원 이상 급등하며 전날의 낙폭을 웃돌았다. 코스피는 10월 29일 4084까지 오르고 같은 달 30일에도 4100을 넘으며 거래를 시작했지만 종가는 4086으로 낮아졌다. 외국인들은 관세협상 결과 발표 전인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1조 8000억 원 넘게 순매도했다. 시장 금리도 급등했다. 채권 금리 상승은 가격 하락이다.
지난 10월 29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공식 환영식을 TV로 지켜보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관세 협상 결과가 대미 수출 환경에 대한 불확실성을 제거한 점이 긍정적인 것은 분명하다. 증권가는 특히 대미 수출 비중이 큰 자동차 관세 인하로 약 4조 원의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해외 수주 비중이 큰 조선업은 MASGA(조선업 협력) 프로젝트 기대에 핵추진 잠수함 시장 진출 호재까지 겹쳤다. 그럼에도 시장이 갸우뚱하는 이유는 우리 경제와 기업실적에 미치는 효과가 엇갈리고, 단기적 부담과 장기적 효과에 대한 예측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의 해외직접투자액은 총투자액 기준 633.8억 달러였으며, 2024년에는 639.5억 달러로 집계됐다. 연간 200억 달러는 2024년 기준 약 31.3%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 중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기준 43.7%로 1988년 이후 최고치다. 연간 200억 달러는 GDP의 약 1.0%에 해당하는 규모다. 2023년 한국의 총고정자본형성(설비투자+건설투자) 약 505.8조 원(약 3900억 달러)의 약 5.1%에 해당한다.
한국은행은 국회에 최근 제출한 서면 자료에서 “단기적으로는 중간재·자본재 수출 등 성장 유발 효과가 있을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산업 공동화·고용 위축·인재 유출 등의 리스크도 있다”고 분석했다.
#대미 투자 주도 업종이 코스피 5000 주도
증시에 긍정적일 것이란 시각은 한은이 분석한 단기적 효과에 주로 기인한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의 실증분석 결과 대미 해외직접투자가 10% 상승하면 수출도 약 0.202%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현지에 설립된 법인이 한국으로부터 중간재·자본재를 조달하기 때문이다. 연간 200억 달러 투자가 지속되면 미국 현지 법인의 한국산 부품·소재 구매가 증가해 대미 수출 증대로 무역수지 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 미국 내 영향력도 커지고 특히 글로벌 첨단산업(반도체, 배터리, AI) 공급망에 깊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이에 따라 투자전략도 미국과의 시너지 가능성이 높은 업종에 집중하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조선과 방산(삼성중공업, 한화오션, LIG넥스원), 자동차(현대차, 기아), 반도체(삼성전자, SK하이닉스), 에너지(두산에너빌리티, 한전KPS), 2차전지(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등이다. 최근 증시 상승의 주도주들이다. 코스피 4000을 돌파하면서 5000은 물론 6000도 가능하다는 전망이 국내외에서 쏟아지고 있다. 코스피가 오르더라도 미국의 빅테크처럼 일부 기업과 업종 쏠림이 커지는 모양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빅딜 대신 불안한 휴전’ 미중 정상회담이 남긴 것
한미 정상회담에 이어 지난 10월 30일 열린 미중 정상회담 결과에도 시장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기본 틀이 만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발 무역전쟁 중 처음으로 열린 미중 정상회담 결과는 ‘종전’보다는 ‘휴전’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미, 대중 무역 비중이 큰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두고 분석이 엇갈린다. 전일 한미 관세협상 타결 직후 긍정적이던 시장 분위기가 관망세로 바뀐 것도 미중 협상 결과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0월 30일 부산 김해국제공항에서 미중 정상회담을 마친 후 악수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이번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중국에 대한 관세율(57%→47%)을 낮췄다. 대신 중국은 희토류 공급 제한을 1년 유예했다. 중국은 미국산 대두도 다시 사주기로 했지만 미국의 첨단 반도체 수출제한 조치를 풀지는 못했다. 수출을 늘려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야 하는 중국과 당장 희토류가 필요한 미국이 일단 타협한 모양새다. 관세율 인하 폭이 크지 않아 언뜻 중국이 더 내어준 듯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다.
이번에도 미국의 아킬레스건은 희토류라는 것이 확인됐다. 내년 치러질 미국 중간 선거에서 승부를 가를 경합주(Swing state)의 민심을 중국이 흔드는 데 대두가 효과적인 지렛대라는 점도 입증됐다. 무엇보다 희토류와 대두는 이번 협상을 앞두고 중국이 내놓은 팻감(바둑에서 상대의 돌을 따낼 수 있는 유리한 자리나 수)이다. 중국은 글로벌 무대에서 미국과 거의 대등한 위치라는 점을 각인시켰고, 의제 설정에서도 주도권을 행사했다. 반대로 호기롭게 중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을 시작한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이 만든 협상 테이블에 마지못해 앉은 모양이 됐다.
협상 결과가 임시적인 만큼 언제든 양측이 다시 맞붙을 가능성은 여전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4월 중국을 방문한다. 뒤이어 시진핑 주석도 미국에 가기로 했다. 트럼프가 내년 회담은 자신이 주도하겠다는 일종의 도전장이다. 수면 위에서는 대화를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주도권 공방이 치열할 전망이다. 미국은 최근 국내는 물론 호주와도 협력해 희토류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데 속도를 높이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수출통제에 맞서 인공지능과 반도체 최첨단 기술 자체 개발에 국가 차원의 총력 지원에 나섰다.
미중 정상이 휴전에라도 합의한 것은 우리 기업들에게는 다행이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미국이 대중국 관세율을 높이면 여전히 중국 관련 공급망에 크게 의존하는 우리 기업들에게도 불똥이 튄다. 휴전 기간 동안 희토류 조달을 비롯해 중국 관련 공급망 다변화를 위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미중 대결 구도로 글로벌 경제 질서가 재편되면서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시장에서 중국 제품의 경쟁력이 약해질 가능성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