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대홍수’는 대홍수가 덮친 지구의 마지막 날,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최후의 희망을 향한 이들이 물에 잠겨가는 아파트 속에서 벌이는 사투를 그린 SF 재난 블록버스터다. 시놉시스만 보면 거대하고 압도적인 재난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간들의 처절한 생존기가 펼쳐질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뚜껑을 열고 보니 재난물의 외피를 쓴 SF이자 감정 서사에 가까워 “기대했던 재난영화가 아니다”라며 과격한 비난을 쏟아낸 시청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해외 시청자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작품은 공개 3주 연속 넷플릭스 비영어 영화 부문 시청 1위에 올랐고, 역대 최고 인기 비영어 영화 7위에 오르며 글로벌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도 저한테는 엄청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가 아니었어요. 어떤 특정 형식이나 장르를 빌려온 것일 뿐 이야기 자체는 ‘아이를 통해서 어른이 돼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거든요. 재난물이라고 장르가 구분돼 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그 이야기 속 상황에서 그냥 재난이 닥쳤다는 것 정도니까요. 이야기의 한 획은 분명해서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지만, 감독님이 쓰시는 대본 스타일이 조금 일반적이지 않았어요(웃음). 보통 이런 종류의 작품은 대본을 신 순서로 나누고 분류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번호 이런 것들로 암호처럼 쓰여 있었거든요. 그래도 두 번 정도 보면 이해할 수 있더라고요(웃음).”

“희조는 안나가 가고자 하는 현생 인류의 희망과는 반대의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 인물이에요. 그러다 보니 등장부터 서스펜스를 줘야 했죠. 공적 임무가 있는 동시에 개인적인 욕망도 존재하는데 그 부분을 감독님과 많이 얘기했어요. 임무는 임무대로 하면서도 왜 희조가 과거 자신을 버렸던 엄마의 모습을 이곳에서 보고 싶어 하는지 그 마음이 궁금하더라고요. 희조의 그런 신들은 미묘한 변화를 주면서 여러 번 찍었던 기억이 나요.”
후반부로 갈수록 ‘SF’의 색채가 더 진해지지만, 어쨌든 대홍수를 다루는 ‘재난’의 압도적인 물리적 배경 역시 이 영화의 중요한 축이었다. 박해수는 첫 세트장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한 단어로 ‘경악’이라고 표현했다. 배우들이 실제로 물에 잠긴 공간에서 연기해야 했던 이 현장은 규모와 환경 모두에서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요. 아파트 4층 정도 높이까지가 세트였는데 거기에 거의 2층까지 물이 다 차 있는 상태였어요. 저수지 하나에 아파트를 세워 놓은 느낌이었죠. 여기다가 파도 치는 기계까지 설치해서 물이 계속 넘실거리고 있었고요. ‘이렇게까지 만든다고?’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굉장히 안전한 현장이었죠. 물 안에 잠수부 분들이 계셔서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려 이동하면 다시 제자리로 데려다 주셨거든요(웃음). 그래도 쉽지 않은 촬영이었기에 감독님이 저희를 보면 항상 미안하다고 얘기해 주셨어요.”

“현장에서 (김)다미 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정말 많았어요. 저도 힘이 돼 주고 싶었는데 중반부부터는 안나가 진실을 알게 되면서 저보다 더 강해질 때가 있어서…. 그래서 최대한 현장에 자주 가려고 하고, 일부러라도 곁에 있어주려고 했죠. 사실 진짜 재난 영화는 남자들이 더 고생하는데, 저희 현장에선 반대로 김다미 배우가 강한 등 근육으로 저를 지켜줬어요(웃음).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고 촬영 종료 후 3년이 지났는데 감독님과 저, 다미 배우가 중간중간에 셋이서 정말 자주 봤어요. 볼 때마다 변함없이 깨끗하게, 정말 연기만을 위해 하루하루를 쓰는 친구로 남아있더라고요. 연기할 때도 정말 섬세한 것까지 놓치지 않는 걸 보며 ‘이래서 다들 김다미 배우를 좋아하는구나’ 싶었죠.”
이번 작품에서 SF 재난 블록버스터 장르까지 섭렵하며 박해수는 이제 ‘웬만한 장르는 다 되는 배우’로 완벽하게 자리매김에 성공했다. 특히 넷플릭스에서는 ‘넷플 공무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영화로는 ‘페르소나’부터 ‘사냥의 시간’, ‘야차’, ‘굿뉴스’(특별출연), 시리즈로는 전 세계적으로 압도적인 인기를 끈 ‘오징어 게임’에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수리남’, ‘악연’, ‘자백의 대가’까지 장르와 역할을 가리지 않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한국을 넘어 글로벌 시청자에게까지 얼굴을 각인시킨 몇 안 되는 배우라는 점에서 그의 이력은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2026년 보여줄 다음 행보를 기대케 한다.
“작품을 고를 때 제일 먼저 보는 건, 이걸 봤을 때 제 가슴이 떨리느냐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느냐에 대한 기대가 있으면 그 작품을 밀고 나가죠. 사실 2025년에는 ‘악연’, ‘굿뉴스’, ‘자백의 대가’, ‘대홍수’까지 연달아 나오다 보니 대중이 보기엔 피로감이 느껴질 것 같아서 우려되기도 했어요. 제가 생각해도 그렇겠더라고요(웃음). 그래도 이미 제 손을 떠난 작품들이고 저는 배우로서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요. 다만 아직 캐릭터를 더 구체적으로 만들기엔 부족하다는 것도 느꼈고, 더 많이 관찰하고 더 섬세하게 세공해야겠다는 것도 배운 한 해였어요. 2025년은 제게 분명히 발전하는 시기로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