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초 김병기 의원은 입장 발표 직전까지도 원내대표 사퇴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여권 관계자는 “김 의원은 원내대표직을 유지하면서 여러 의혹을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주변의 사퇴 요청에도 꿈쩍하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그러던 중 김병기 의원을 무너뜨린 결정적 계기는 김병기 의원과 강선우 의원 대화 녹취 언론 보도였다고 한다.
MBC 등 복수 언론 보도에 따르면 강 의원은 2022년 4월 21일 민주당 서울시당 공천관리위원을 맡던 당시 공관위 간사였던 김 의원과 공천과 관련한 금품 수수 의혹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김 의원은 강 의원에게 “1억, 이렇게 돈을 받은 걸 보좌관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 아니냐”고 물었고, 강 의원은 “의원님, 저 좀 살려주세요”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민주당은 돈을 준 것으로 지목된 김경 현 서울시의원을 둘이 대화를 나눈 다음날 강서구 서울시의원 후보로 단수공천했다. 이러한 육성 목소리까지 등장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생각하고 원내대표직을 내려놨다는 것이다.
이후 김 의원은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 동작구의원 두 명으로부터 향후 공천에 편의를 봐달라는 취지의 묵시적 청탁 대가로 각각 2000만 원과 1000만 원을 받은 뒤 3~5개월 만에 돌려줬다는 또 다른 공천헌금 의혹에도 휩싸였다.

김 의원은 1월 5일 유튜브 ‘뉴스토마토’ 인터뷰에서 “제명 당하는 한이 있어도 탈당은 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내가 정말 잘못했고 송구하다”면서도 “탈당과는 연결하고 싶지 않다. 당을 나가면 정치를 더 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당 안팎에서도 김 의원의 거취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선당후사’를 강조하며 탈당을 압박하는 요구가 있는가 하면, 윤리심판원을 기다리며 ‘소명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맞서는 반응이 나온다.
국정원장 출신 박지원 의원은 1월 7일 MBC ‘뉴스외전’에 출연해 “김 전 원내대표는 국정원 동료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었다”면서도 “눈물을 머금고 이제는 당에서 제명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 전 원내대표의 결백을 믿는다”며 “이제 경찰 수사를 받고 살아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 의원 사퇴로 공석이 된 원내대표직에 출마한 진성준 의원은 1월 7일 CBS라디오 ‘박성태의 뉴스쇼’에 출연해 “본인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측면이 있을지 모르지만, 당을 위해서 선당후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청래 대표 등 당 지도부는 윤리심판원 결과를 기다려봐야 한다고 말을 아끼고 있다. 문진석 원내대표 직무대행은 YTN라디오 ‘김영수의 더인터뷰’ 인터뷰에서 “지금 단계에서는 당의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당 감찰 결과를 토대로 윤리심판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겠단 것이 지도부의 입장”이라고 전했다.

이어 “김 의원은 친문과 친명으로 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재명 대통령 대선후보, 당대표 때 지근거리에서 일했다. 친명계 인사들에 대한 것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며 “김 의원을 대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송영훈 전 국민의힘 대변인은 1월 7일 동아일보 유튜브 ‘정치를 부탁해’에 출연해 “김 의원과 강 의원 녹음파일을 들어보면 너무 자연스러운 대화”라며 “녹음파일이 공개되는 순간 아마 민주당 의원들 중 많은 분들이 머릿속에서 ‘내가 김 의원 방에 가서 무슨 얘기를 했더라’ ‘내가 혹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한 적 없는가’ ‘공개되면 정치적 곤경에 처할 만한 것은 없었는가’ 떠올리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다보니 민주당 의원들이 김 의원 탈당 요구를 망설이고 서로 공을 미루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병기 의원은 26년간 국정원에서 근무한 ‘정보통’이자 인사처장을 지낸 인사관리 전문가다. 2016년 ‘문재인 키즈’로 민주당에 인재 영입되며 정치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2021년 20대 대선 민주당 이재명 후보 선대위 현안대응TF 단장에 임명되며 이 대통령과 연을 맺었다. 당시 이 대통령을 향한 마타도어 공세를 김 의원이 특유의 정보력으로 방어해 신임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대선 패배 후 당내 비명계 등이 이 대통령을 향해 전당대회 불출마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자, 김 의원은 반대 의견을 내며 이 대통령의 보궐선거 및 전당대회 출마를 권했다. 친명계 텔레그램 채팅방을 개설, 이 대통령의 당대표 선출을 위해 앞장섰다.
김 의원은 이재명 당대표 선출 뒤 1기 지도부에서 수석 사무부총장을 맡았다. 이 때부터 김 의원은 핵심 친명으로 분류됐다. 2023년 9월 이재명 당시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자, 당내에서 가장 강경하게 목소리를 냈던 친명계 인사이기도 했다.
2024년 22대 총선을 앞두고 김 의원은 공직선거 후보자 검증위원장과 공관위원회 간사를 맡아 공천을 주도했다. 당시 비명계는 이재명 대통령의 ‘사천 논란’을 문제 삼고 나섰다. 이수진 전 의원은 본인 지역구인 서울 동작을이 ‘전략 지역구’로 지정돼 컷오프되자, 반발하며 탈당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이 전 의원을 비롯해 공천에서 탈락한 많은 후보들이 공천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김 의원은 공천 물갈이를 밀어붙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민주당은 시스템에 따라 합리적 기준으로 경쟁력 있는 후보를 골라내고 있는 중”이라며 “환골탈태 과정에서 생기는 진통이라고 생각해주기 바란다”며 김 의원에 힘을 실었다.
이 대통령은 2024년 4월 총선 공식 선거운동 첫날 김 의원의 지역구인 서울 동작갑을 제일 먼저 찾아 지원유세에 나서며 특별히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22대 총선을 통해 친명계가 대거 국회에 입성하며 명실공히 민주당의 주류로 올라서게 됐고, 김 의원은 그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았다.

홍장원 쪽지에는 ‘이재명 대표, 우원식 국회의장, 한동훈 대표, 김민석 최고위원, 박찬대 원내대표, 정청래 법사위원장, 조국 대표, 김어준 씨, 김명수 전 대법원장’ 등의 이름이 있었다. 당시 김 의원은 “홍 차장 워딩 그대로 말씀드리겠다. ‘미친X 이로구나’하고 생각하고, 그 다음부터는 메모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홍 전 차장 폭로는 이후 윤 전 대통령 탄핵심판에서도 핵심 증언으로 다뤄졌다.
김 의원은 민주당 원내대표 선거 과정에서 일부 유튜브 방송에서 홍 전 차장과 출연해 유세에 나섰고, 의원들과 당원들의 압도적 지지 속에 원내대표로 선출될 수 있었다.
승승장구하던 김 의원은 정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 놓여 있다. 특히 그 불똥이 이재명 대통령으로까지 튈 가능성이 있어 여권 전체가 긴장하는 모습이다. 이수진 전 의원은 2024년 총선 전 김 의원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이 담긴 탄원서를 당시 당대표 보좌관이던 김현지 현 청와대 제1부속실장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윤리감찰단을 거쳐 공직선거 후보자 검증위원회로 가면서 사건이 유야무야됐다는 게 이수진 전 의원 측 판단이다.
당시 검증위원장은 김병기 의원이었다. 탄원서를 전달 받은 사람이 ‘이 대통령 최측근’ 김현지 실장이었다는 점 때문에 당청은 곤혹스러워 한다. 이 대통령이 친명 핵심 인사로 꼽혔던 김 의원 의혹을 인지하고도 묵인했을 수 있다는 의혹 때문이다.

민주당은 공천헌금 의혹을 묵살했다는 논란에 대해 선을 그으며, 논란이 이 대통령에까지 번지지 않도록 방어전선을 구축했다.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어떻게 (탄원서를) 접수해 처리했는지 기록이 중앙당에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이 건만이 아니라 당시 접수됐던 모든 건에 대한 접수와 처리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 당이 파악한 경과”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공천과 선거 때는 짧은 시간에 수백 건 이상의 탄원·민원·제보가 접수되는데 어떻게 잘 처리해야 했는지 이번에 돌아보게 됐다”며 “시스템을 잘 갖춰야겠다는 교훈을 얻고 있다”고 덧붙였다.
과거 민주당에서 공천관리 업무를 해봤던 한 당직자는 “공천과 선거에 들어가면 전국에서 상대 후보를 꺾기 위한 수없이 많은 탄원·제보가 들어온다. 시간과 인력이 한정돼있기 때문에 모든 걸 다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 그 중에는 음해와 거짓도 많다. 그런 걸 다 남겨 두진 않는다. 선거가 끝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폐기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 사례 중 하나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이수진 전 의원과 김병기 의원 갈등은 이 전 의원이 세게 문제 제기를 해서 정치권에서 관심이 쏠린 사안이었다. 그 정도 탄원서는 당 차원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했을 것이다. 진상조사를 하고도 정말 김 의원이 뭉갰는지, 탄원 내용이 큰 문제가 아니어서 처분하지 않았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