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프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는 정일미는 “선수생활 때보다 더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며 의욕을 보였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여기 짚불장어가 유명해요. 후배들 장어 먹고 힘내라고 여기로 왔어요.”
부산 기장의 한 짚불장어구이집으로 안내한 정일미. 그의 옆에는 세 명의 후배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대학교 연구실에서 강의 준비를 하고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정일미는 여전히 골프채를 잡고 있었고, 새벽부터 후배들의 훈련을 도우며 자신의 골프도 함께 연습해 나갔다.
“강의 준비는 틈틈이 하고 있어요. 내일 학교에 가서 교수님들과 미팅도 있어요. 제가 잘해야 골프 선수들 욕 안 먹일 텐데, 부담도 많고 걱정되는 부분도 한두 가지가 아니네요.”
여자 골프의 최고참 선수였던 정일미. 그가 갑자기 교수로 신분 변신을 이룬 배경이 궁금했다.
“지난해 10월, 호서대에서 강의 초빙이 있었어요. 그때는 오랜만에 캠퍼스를 밟는 설렘에 강의보다는 대학생들을 ‘구경’하는 데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사실 준비도 부족했기 때문에 제가 학생들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나요. 그런데 그 강의가 학생들한테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고, 학교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신 것 같아요. 결정되기까지 마음 졸이며 기다렸는데 정말 운이 좋았어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정일미 로또 맞았다’고. 선수 생활할 때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학 전임교수 자리를 놓고 다른 후보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는 정일미. 그런데 경쟁을 하면 할수록 자신감이 떨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골프 외에는 대놓고 자랑할 만한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잘할 자신은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몇 차례 강의를 하며 학생들과 부대꼈던 시간들이 그리웠고, 무엇보다 대학 생활 자체가 즐거웠다는 것.
“제가 이대를 나오긴 했지만, 제대로 된 학교 생활을 해보지 못했잖아요. 운동과 학교 수업을 병행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생활했지, 친구들, 선배들과 어울리는 문화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어요. 그 한을 이제야 풀게 됐어요. 무엇보다 제 전공인 골프를 통해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축복, 그 자체인 것 같아요.”
정일미는 2011년 국내 복귀 후 심하게 흔들렸다. 무엇보다 체력적인 부분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순간, 나이를 먹는다는 걸 실감했다는 그. 새삼 서러움, 외로움 등이 급습했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필드 위 실력으로 나타났다.
▲ 정일미가 후배들과 짚불장어구이를 먹으며 건배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한국을 떠난 시간이 8년밖에 안 되는데 후배들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더라고요. 다들 잘 쳐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전 계속 제자리에 맴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후배들 보기 창피했죠. 그렇게 해서 지난해에는 아예 골프채를 놓고 지냈어요. 두 달 가량 골프채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놀았어요. 그렇게 놀아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신나더라고요.”
정일미는 국내 복귀 후 한동안 같이 라운드 할 선수가 없어 스트레스를 받았던 상황을 설명했다.
“후배들과 워낙 나이 차이가 많다 보니까 주위에 선수들이 없었어요. 제가 어려웠던 거죠. 어떨 때는 코스 한 번 돌고 다음날 대회 나간 적도 있어요. 나이가 사십 넘으니까 한 번 연습하고 나가면 코스가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웃음). 대회보다도 그 전에 누구랑 연습하러 나갈지에 대해 신경 쓰는 게 더 힘들었어요. 그때는 저랑 같이 골프 치자고 하는 후배,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하는 후배가 제일 예쁘고 고마웠습니다.”
정일미는 공식적으로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 강단에 서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KLPGA 무대와는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완전히 골프채를 놓지는 않을 거라고 말한다.
“학교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시니어 투어에 도전할 거예요.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 받지 않고 말 그대로 즐기면서 골프를 치고 싶어요. 학생들 앞에서 더블보기로 망신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잖아요(웃음).”
부산=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
“세리 살아있네…우승하니 내가 울컥”
2년 전 정일미와 인터뷰를 했을 때 그는 LPGA 투어 생활을 하며 얻은 가장 큰 소득으로 후배 박세리와의 우정을 꼽았다. 한국에 있을 때도 잘 지내는 사이였지만, 미국에서 동고동락하며 남다른 친분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정일미는 지난해 박세리가 KLPGA 무대에서 9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장면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고 말한다.
“한 편의 단편영화를 보는 듯했어요. 세리의 고생과 힘겨운 훈련이 그 우승으로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제가 우승한 것보다 더 기뻤습니다. 세리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알린 것 같아 울 뻔했어요.”
정일미는 박세리에 대해 고마움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세리는 하늘이 내린 선수예요. 이런 골프 스타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한 거죠. 세리가 골프 붐을 일으키며 (김)미현이나 저도 혜택을 많이 받았잖아요. 전 그런 부분에 대해 진심으로 고맙다는 얘기를 해줘요.”
정일미는 아직 박세리가 자신의 신분 변화를 모르고 있다며 미소를 짓는다. 누구보다 박세리가 축하와 기쁨을 함께 해줄 것이라고 믿지만, 자신의 입으로 말을 꺼내기가 쑥스러워서 연락을 못했다고.
“그래도 세리는 여전히 현역 선수로 활동하고 있고, 자신을 아껴주는 남자친구도 있고…, 저보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에요. 앞으로 같이 필드에서 만날 기회는 없겠지만, 서로의 길을 응원하고 격려해주고 싶어요.”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