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계 공주 대신 600년 전 방계 남성 혈통으로 계승’ 비판…여성 일왕 찬성 70% 넘지만 ‘정치적 부담’ 탓 외면
[일요신문] “79년 만의 개정에도 남성 중심의 왕위 계승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 일본 국회가 7월 17일 왕족 수 확보를 골자로 한 ‘왕실전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NHK에 따르면 왕실전범 본칙이 개정된 것은 1947년 이후 처음이다. 여성의 왕위 계승은 이번에도 인정되지 않았다. 대신 왕실을 떠난 옛 왕족 가문의 남계 남성을 양자로 받아들이고, 그에게서 태어날 아들에게 왕위 계승 자격을 부여하는 방안이 도입됐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다”는 비판과 함께 충분한 사회적 논의 없이 법안을 밀어붙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79년 만에 왕실전범이 개정됐지만 여성의 왕위 계승은 인정되지 않았다. 나루히토 일왕 마사코 왕후 아이코 공주(오른쪽). 사진=궁내청 인스타그램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여성 왕족이 결혼한 뒤에도 왕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까지는 일반인과 결혼하면 왕실을 떠나야 했지만, 앞으로는 결혼 이후에도 왕실에 남아 공무를 수행할 수 있다. 다만 배우자와 자녀에게는 왕족 신분이 부여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옛 왕족 가문의 남성을 양자로 받아들여 왕족 수를 보충하는 방안이다. 자민당과 일본유신회가 연립정권 합의문에서 ‘최우선 과제’로 제시한 내용이기도 하다. 대상은 배우자와 자녀가 없는 15세 이상의 남계 남성으로 제한된다. 양자로 들어온 당사자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지만, 이후 태어난 아들에게는 계승권이 인정된다. 당장의 왕족 감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기적으로 남계 남성 중심의 계승 원칙을 유지할 수 있는 장치까지 마련한 셈이다.
7월 17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에서 왕실전범 개정안이 찬성 184표, 반대 57표로 가결됐다. 사진=닛테레 뉴스 캡처마이니치신문에 의하면, 양자 후보가 될 수 있는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반인 신분이 된 옛 왕족 가문의 후손들이다. 나루히토 일왕과는 36~38촌 관계로, 공통 조상을 찾으려면 약 6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바로 이 지점이 논란에 불을 붙였다. 나루히토 일왕의 외동딸 아이코 공주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반면, 수백 년 전 갈라진 방계 혈통에서 태어날 아들에게는 계승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현지에서는 “직계 공주보다 먼 방계 혈통을 우선시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요미우리신문도 이번 개정을 두고 “국민과 상징적 일왕의 유대를 무시한 채 너무 많은 결함을 안고 추진한 난폭한 제도 변경”이라고 평가했다.
개정안의 출발점은 2017년이었다. 당시 국회는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 퇴위를 허용하는 특례법을 제정하면서 정부에 ‘안정적인 왕위 계승 방안’과 ‘여성 왕족 문제’를 폭넓게 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9년 만에 나온 답은 왕족 수를 늘리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여성의 왕위 계승은 아예 논의 대상에서 빠졌고, 그 자리를 옛 왕족 가문의 남성을 양자로 들이는 방안이 대신했다.
2006년 후미히토 왕세제와 기코 왕세제비 사이에서 태어난 히사히토 왕자 현재 일본 왕실의 유일한 남자 왕손이다. 사진=궁내청 인스타그램물론 이번 개정으로 모든 문제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개정법 부칙은 추가 입법 가능성을 열어뒀고, 국회도 안정적인 왕위 계승 방안을 계속 논의하기로 했다. 정치권의 태도와 달리 국민 여론은 뚜렷하다. 마이니치신문이 지난 5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여성 일왕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72%에 달했고, 반대는 10%에 그쳤다. 소셜미디어(SNS)에서도 나루히토 일왕의 외동딸 아이코 공주를 두고 “왜 공주는 일왕이 될 수 없느냐”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마이니치신문은 이처럼 높은 찬성 여론에도 정치권이 움직이지 않는 배경으로 ‘정치적 부담’을 꼽았다. 자민당의 핵심 지지 기반인 보수단체 ‘일본회의’와 ‘신사본청’이 남계 남성에 의한 왕위 계승 원칙을 강하게 지지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한 자민당 중진 의원은 마이니치신문에 “지지자들과 대화할 때는 ‘아이코 공주가 일왕이 되는 길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선거 유세차에 올라 그것을 주장할 용기는 없다”고 털어놨다.
여성 일왕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라고 해도, 그 여론이 곧바로 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왕실 문제는 물가나 임금처럼 유권자의 선택을 좌우하는 핵심 현안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자민당으로서는 핵심 지지층의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문제를 앞장서 꺼낼 정치적 유인이 크지 않은 셈이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아이코 공주를 두고 “왜 공주는 일왕이 될 수 없느냐”는 질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궁내청 인스타그램한때는 정치권에서도 여성 일왕을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은 전문가회의를 설치했고, “여성 일왕과 여계 일왕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당시 왕실에 오랫동안 남자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왕위 계승이 끊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 것이 배경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나루히토의 동생 후미히토 왕자 부부에게 아들 히사히토가 태어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개혁 논의는 사실상 멈췄고, 여성 일왕을 둘러싼 동력도 빠르게 식었다.
이후 자민당은 여성의 왕위 계승 문제를 되도록 꺼내지 않는 쪽을 택했다. 보수층의 거센 반발이 예상되는 데다 왕실 구성원 개인이 정치적 논쟁의 한복판에 설 수 있다는 우려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이번 개정에서도 비교적 합의하기 쉬운 선까지만 나아갔다. 여성 왕족에게는 결혼 뒤에도 왕실에 남을 길을 열어주고, 옛 왕족 출신 남성에게는 왕실로 돌아올 통로를 마련했지만,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길은 열리지 않았다.
NHK는 이번 입법 과정을 두고 “조용하고 차분한 논의를 원칙으로 한다던 당초 취지와는 거리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중의원 선거 압승 이후 정부·여당은 회기 내 처리를 목표로 법안을 밀어붙였고, 국회 막판에는 다른 법안 처리를 위한 여야 협상의 카드로 활용됐다는 것이다.
ANN이 7월 18~1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다카이치 내각 지지율이 49.2%로 출범 이후 처음 50% 아래로 떨어졌다. 사진=ANN 뉴스 캡처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뒤 여론은 냉담하다. 7월 18~19일 마이니치신문이 실시한 조사에서 다카이치 내각 지지율은 한 달 전보다 10%포인트(p) 하락한 41%를 기록했다. 지난해 10월 내각 출범 이후 최저치다. “개정 왕실전범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응답은 19%에 그친 반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응답은 45%였다.
아사히뉴스네트워크(ANN)의 조사에서도 다카이치 내각 지지율은 10.9%p 내린 49.2%였다. 아사히신문은 “왕실전범 개정이 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미친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분석했다. “충분한 논의 없이 주요 정책을 밀어붙인다는 다카이치 내각의 이미지가 이번 개정을 계기로 더욱 선명해졌다”는 평가다.
79년 만의 개정으로 일본 왕실전범은 큰 변화를 맞았다. 하지만 남계 남성 중심의 왕위 계승 원칙은 그대로 남았다. ‘왜 여성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가’ ‘왜 남계 남성만을 고집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끝내 쟁점이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