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카터는 미군 철수를 압박카드로 썼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박 전 대통령은 핵 개발 검토로 맞받았다. 연합뉴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1981년 방미 당시 미국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두 가지를 요구받았다. 레이건이 전두환에게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통일교를 지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독한 기독교 복음주의자였던 레이건으로서는 당연한 요구 사항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두 번째 요구 사항. 그것은 바로 ‘핵 개발 포기’였다. 당시 전두환은 불안한 정치적 기반 탓에 미국의 지지가 절실했다. 그리고 레이건은 한국이 이 요구 사항을 받아들일 경우, F16기 지원 등 달콤한 선물꾸러미를 약속했다.
전두환은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일단 ‘국운’보다는 자신의 불안한 ‘입지’를 다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레이건의 요구 사항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목숨’을 걸고 진행한 한국의 ‘핵 개발’ 프로젝트가 사실상 올 스톱되는 순간이었다.
시계를 되돌려 1979년 1월 3일 해운대의 비치로 가 보자.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선우연 당시 공보비서관에게 “1981년 핵무기 제조를 완수할 수 있다. 그때 여의도에서 원자탄을 전 세계에 공개할 거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10·26사태 직전 한국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는 90% 이상 진행됐다는 뜻이었다. 만약 그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의도 광장을 지나가는 ‘대한민국 핵무기’를 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박정희가 핵 개발을 본격화한 것은 1972년의 일이다. 1969년 닉슨독트린과 베트남전 미군 철수가 논의되던 과정에서 한국의 ‘핵무기 무장론’이 급부상했다. 당시 분위기에서 ‘미군 철수’는 시간문제였다. 애초 박정희는 핵심 기술인 ‘재처리 기술’과 ‘핵 가공 기술’ 도입을 위해 미국 측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미국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무엇보다 동북아 핵확산을 우려해서다.
박정희는 어쩔 수 없이 눈을 유럽으로 돌렸다. 박정희의 특명을 받은 최형섭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은 1972년 5월 프랑스로 건너간다. 프랑스 SGN사와의 ‘재처리 기술’ 논의를 위해서였다.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협상에 돌입한 지 불과 3년 만인 1975년 4월, 재처리 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 및 공급 계약이 완벽하게 체결됐다. 1974년 1월에는 이병휘 당시 과학기술처 원자력국장이 벨기에로 건너가 ‘플루토늄 가공기술 제공 및 시험시설 설계’와 관련해 계약을 맺기도 했다.
박정희는 여기에 캐나다로부터 핵 개발에 용이한 CANDU형 원자로(중수로)를 도입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당대 최고의 무기중개업자 사울 아이젠버그가 연결됐었다. 1974년 5월 핵실험에 성공한 인도의 원자로 역시 아이젠버그가 연결해 준 캐나다의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개발도상국’으로 같은 처지에 있었던 인도의 핵실험 성공에 큰 자극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박정희의 이러한 기술 도입은 미국을 자극하게 된다. 1975년 주한 미 대사관이 워싱턴에 보낸 정보 보고서에는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은 이미 ‘초기 단계’(initial stage)에 들어섰다”고 평가했으며 같은 해 미국 국가 안보회의 비망록(1999년 공개)에도 “한국 정부가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면 동북아에 결정적인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한국의 핵실험 능력이나 운반 수단(미사일) 개발 노력을 단념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1975년 미국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는 굳이 핵 개발 의도를 숨기지도 않았다.
한국의 핵 개발 기술 도입이 정점에 도달했던 1975년 이후 미국은 박정희의 목줄을 죄기 시작했다. 1975년 로버트 잉거솔 당시 국무부 장관이 작성한 정책 건의서에는 ▲한국의 추가적인 원전 도입에 필요한 차관 제공과 기술 제공을 원천 봉쇄할 것 ▲한국에 재처리 시설 계획 포기를 요구할 것 ▲대신 지역 차원의 재처리 시설 이용을 제안할 것 등과 관련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밖에도 미국은 한국과 계약을 맺은 프랑스 벨기에 캐나다 등에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나이더 당시 미 대사가 직설적으로 ‘핵 개발’이나 ‘핵무기’ 등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더라. 다만 그는 반복해서 프랑스와 맺은 재처리시설 계약 포기를 요구했다. 그렇게 되면 핵폭탄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 생간이 불가능했다. 이는 결국 포기하란 말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했다.
결국 박정희는 미국의 전방위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프랑스 벨기에 캐나다 등과의 기술 도입 계약을 파기하고 만다. 1978년 박정희는 다시 한 번 프랑스와 재처리 기술 도입을 논의했지만 이마저도 지미 카터의 개입으로 실패한다.
박정희는 ‘우회 전략’을 선택한다. 기술 도입이 여의치 않자 비밀리에 ‘핵기술 국산화’라는 도박에 명운을 걸었던 것이다. 그는 비밀리에 운영했던 핵무기 개발팀을 해산하지 않고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을 발족한다. 재처리기술과 관련해서는 김철 박사(현재 아주대 명예교수) 등이 핵심 실무진으로 활약했고, 원자로 건설은 김동훈 박사가 책임자로 나섰다. 이들이 주축으로 진행했던 ‘핵기술 국산화’는 상당 수준까지 진척됐다. 김동훈 박사는 1979년, 연구에 착수한 지 5년 만에 4만kW 연구로 설계도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기부터가 미스터리다. 몇몇 인사들의 조각 진술 외에는 당시 한국의 ‘핵기술 국산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어느 단계까지 왔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나 ‘문서’가 국내에는 없다. 당시 국내 핵 개발의 총책이었던 오원철 전 제2경제수석 역시 몇 차례 언론 기고와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핵심 사안’과 관련해서는 끝내 묵묵부답을 유지했다. <일요신문> 역시 오 전 수석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핵 개발과 관련해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올해 아흔이 된 오 전 수석이 사망한다면 박정희의 총체적인 ‘핵기술 국산화’의 실체는 어쩌면 영영 묻힐 수도 있다.
1979년 당시 박정희의 금고에 보관돼 있었던 ‘핵 개발 문서’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오 전 수석은 지난 2010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 서재 뒤에는 금고가 있었다. 거기에 핵무기 관련 보안 문서가 담긴 두 개의 봉투가 있었다. 대통령 피습 이후 이 문서가 국가기록원에 넘어갔는데 이후 감쪽같이 실종됐다. 신군부를 거쳐 미국으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핵기술은 이미 소형화와 경량화 단계에 이르렀다. 발사체 기술 역시 한국보다 훨씬 우세하다. 핵탄두 탑재기술도 이제 완성 단계로 파악된다. 이러한 악재 속에서 현재 국내 보수진영 내에서는 다시금 ‘박정희 핵 개발’의 향수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핵보유 강소국을 꿈꿨던 박정희. 2013년 2월 25일 이제 그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한다. 과연 북핵 위기에 대처하는 그의 카드는 무엇일까. 내심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잠깐 - 원자로 종류 원자로는 크게 사용연료에 따라 ‘천연우라늄 원자로’와 ‘농축우라늄 원자로’로 나뉜다. 천연우라늄 원자로는 감속재에 따라 다시 ‘중수로’와 ‘흑연로’로 나뉜다. 천연우라늄 원자로는 모두 재처리를 거쳐 핵무기제조용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하다. 현재 북한의 원자로가 천연우라늄 원자로의 종류인 ‘흑연로’다. ‘농축우라늄 원자로’는 감속재와 냉각재로 ‘경수’가 쓰여 ‘경수로’로 불린다. 경수로는 순도가 나쁜 플루토늄만 생산되기 때문에 핵무기제조용으로 부적합하다. 현재 한국에서 운영되고 있는 9기의 원자로 중 월성 1호(중수로)를 제외한 8기의 원자로가 경수로다. |
두산중공업 창원공장의 비밀 여기서 ‘핵 개발’ 프로젝트 추진 두산중공업 창원공장은 지금까지도 대형 원자로 생산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산업시설로 남아있다. 사진제공=두산중공업 1975년 해외 기술도입이 물거품이 되자, 박정희는 ‘핵 개발 국산화’ 프로젝트에 본격 돌입하게 된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원자로를 만들 공장이 없었다. 원자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초대형 가공공장’이 필요했다. 실제 원자로 두께는 10cm가 넘는다. 이러한 강철을 원형으로 굴절시키고 용접하는 데는 상당한 규모의 시설이 필요하다. 1만t을 능가하는 초강력 프레스기는 물론 초대형 공작기계와 대용량 크레인도 필수였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당시 현대양행 창원공장(현재 두산중공업 창원공장)이었다. 경기도 안양을 지나가던 박정희가 정인영 당시 현대양행 회장의 공장을 보고 감격해 사업권자로 그를 택했다고 한다. 훗날 실제 이 공장에서는 국내 핵심 원자로인 영광 3~4호기, 울진 3~4호기 원자로가 제작됐다. 지금까지도 이곳은 대형 원자로 생산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산업시설로 남아있다. 재밌는 것은 박정희가 카터 행정부 인사가 국내를 방문할 때마다 이곳 창원공장을 꼭 보여줬다는 것이다. 암묵적으로 한국의 기술력(정확히 말하자면 원자로 제작 기술)을 미국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창원공장을 방문한 브라운 국방장관은 ‘원더풀’을 연발하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1979년 카터 미 대통령의 방한 당시에도 이곳 창원공장 방문이 예정돼 있었지만, 워낙 촉박한 일정(45시간) 탓에 취소되기도 했다. 훗날 이곳을 방문한 미 행정부 인사들은 창원공장과 관련한 보고서를 대거 올렸다고 한다. 카터 정부의 ‘주한미군 철수’가 취소된 데에는 일정 부분 창원공장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
실종된 ‘보안문서’ 존재 가능성 ‘원자력 마피아’를 주목하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핵무기 국산화’ 프로젝트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10·26사태 직후 박 전 대통령의 금고에서 사라진 문건을 포함해 당시 프로젝트를 설명해 줄 비밀문서는 실제 세상에 존재할까. 있다면 어디 있는 것일까. 한국의 핵 비화를 다룬 팩션 <모자 씌우기>의 저자로 잘 알려진 오동선 TV조선 PD는 이와 관련해 원자력 마피아 조직(원전 발전을 포함해 전략적 핵 개발을 옹호하는 핵 과학자들의 국제적 조직)에 주목했다. 오 PD는 “당시 설계도와 문건은 분명 존재한다. 국가가 직접 소유하고 있다기보다는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한 핵 과학자 중 일부가 이와 관련한 문건을 비밀리에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속한 원자력 마피아 조직은 그 어떤 조직보다도 끈끈하다. 이들은 비밀리에 국제적으로 기술적 교류를 진행하기도 한다. 아마도 당시 문건들은 이들 손에 있을 것이다”고 추측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
핵무장론 핵심은 일본은 있고 한국은 없는 재처리 시설 최근 국내에 ‘핵 무장론’이 부상하고 있다. 핵심은 재처리 시설 확보다. 재처리란 사용이 끝난 핵연료 속에 포함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화학적으로 회수하여 분리 및 추출하는 과정을 뜻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추출된 ‘재처리 플루토늄’은 핵무기의 재료가 된다. 현재 국내 핵연료 사이클 내에는 핵무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재처리할 수 있는 시설이 없다. 그런데 주변국 일본은 사정이 좀 다르다. 일본은 지난 1975년 도카이 지역에 재처리 공장을 건설했다. 한동안 미국의 반대로 시설 운영이 불가능했지만 집요한 설득과 외교술로 결국 재처리 시설 운영 승인을 받아냈다. 현재 일본은 한국과 같은 비핵 개발국에 속하지만 매년 상당량의 플루토늄을 확보하고 있다. 오동선 TV조선 PD는 “일본은 이미 핵 우경화로 가고 있다. 핵만 안 가지고 있다 뿐이지, 의도만 한다면 단시간 내에 개발할 수 있는 기술력과 준비가 이미 철저하게 돼 있다”고 지적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