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동 일대 전경. 임준선 기자
대한민국 부촌이라면 너도나도 수도 서울의 성북동과 한남동을 떠올린다. 성북동은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 부촌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남동은 성북동에 이어 부촌을 형성해 지금까지 명성을 잃지 않는 곳으로 손꼽힌다. 1970년대 거물급 재계 인사들이 터전을 잡으며 부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한남동은 현재까지도 그 영역을 확장하며 성북동을 제치고 명실 공히 ‘대한민국 부촌 1번지’로 불리고 있다.
한남동이 오랜 시간 부촌으로 인정받는 데는 ‘회장님들이 선택한 명당’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뒤로는 남산이 받쳐주고 앞으로는 한강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세를 갖춘 한남동은 유독 대기업 ‘회장님’들의 저택이 많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을 비롯해 신세계그룹 이명희 회장, LG그룹 구본무 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회장님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에만 자리한다는 각국의 대사관도 30여개가 있다.
대기업 총수들과 대사관이 밀집해 있는 만큼 한남동은 겉보기에도 독특한 외관을 자랑한다. 철옹성같이 쌓아올린 높은 담벼락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감시카메라는 요새를 연상시킨다. 특히 최근 들어 북한의 남침위기가 고조되면서 부촌의 전쟁대피시설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맨 위는 이건희 회장의 ‘승지원’. 아래는 구본무 회장, 이명희 회장의 자택.
또한 재벌가 총수들의 경우 대부분 자택에 자가발전 시설을 갖춘 것으로 전해진다. 한남동의 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이곳 부촌 주택은 지하에 대부분 대피시설이 있는 것으로 안다. 재벌총수의 저택은 잘 모르겠지만 일반 부촌의 경우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최첨단 시설은 아니지만 유사시를 대비한 최소한의 시설이 갖춰져 있는 곳이 많다”라고 말했다.
한남동 주택은 매매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가용 부지도 부족해 이곳에 살고자하는 사람들을 위해 인근에 고급 타운하우스가 들어서고 있다. 오는 6월 분양전환을 앞두고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최고급 타운하우스 ‘한남더힐’과 호화주택이 즐비한 ‘유엔빌리지’ 내에 위치한 고급빌라 ‘헤렌하우스’가 대표적이다.
이곳으로 재계 3~4세뿐만 아니라 유명 연예인부터 전문직 종사자들까지 대한민국 ‘있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부촌의 규모를 키워가고 있다. 다만 한남동에 거주하는 주민들 사이에서는 ‘정통 한남동’이 아니면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한남동의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부자에도 ‘급’이 있다고 하지 않나. 한남동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대기업 사모님들은 인근 타운하우스로 이사 와 ‘한남동 부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쉽게 말해 격이 떨어진다는 말”이라고 전했다.
한남동이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으로 불린다면 수도권 부촌은 단연 경기도 성남시 서판교 운중동을 꼽을 수 있다. 이곳은 ‘탈 서울’을 꿈꾸는 자산가들이 대거 몰리면서 신흥부촌으로 떠오르고 있다. 인근에 수많은 신도시가 개발되고 있으나 유독 운중동이 부자들의 ‘러브콜’을 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빌딩 부자’ 신기옥 회장은 강남을 떠나 운중동에 자택과 사옥을 짓고 있다.
‘진정한 부자’라 불리는 수백억 원대의 재산을 축적한 중노년층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종합병원의 위치도 중요하다. 예기치 못한 위급상황을 맞이했을 때 ‘나를 살릴 수 있는 병원이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그들이 움직인다는 것. 운중동의 경우 10분 거리에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세브란스병원, 삼성서울병원 등이 있다.
서울 한남동처럼 운중동이 빼어난 명당이라는 점도 자산가의 발길을 붙잡는 데 한몫했다. 운중동의 J부동산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이곳을 찾는 자산가들은 풍수지리를 아주 중요시 여긴다. 운중동의 경우 운중저수지에서 샘솟는 맑은 물이 운중천을 통해 흐르고 뒤로는 청계산 국사봉이 에워싸는 완벽한 배산임수의 형태를 보인다. 개발 당시에도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핵’을 건드리지 않고 공사를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핵’이란 그 땅의 좋은 기운이 밀집해있는 장소다.
실제 운중동을 찾아가보니 ‘핵’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좋은 기운이 막히지 않도록 공원을 만들어 운중천까지 잘 흘러가게 했다. 공원에서 만난 주민들도 “이곳이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앞으로도 개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빌딩부자’로 불리며 강남을 주름잡았던 신 회장에게 강남을 떠난 이유를 묻자 “서판교의 미래가 훨씬 밝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지금은 물론 강남이 인프라가 훨씬 좋다. 하지만 심각한 교통체증과 환경오염 등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강남에 있을 이유는 없다고 판단해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라며 “자연친화적인 환경, 뛰어난 접근성, 완벽한 풍수지리에 주변도시 개발도 예정돼 있어 투자가치도 높다”고 설명했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강남 대형빌딩을 소유하고 있던 회장님 두 분도 이번에 건물을 팔고 운중동으로 올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운중동과 인접한 대장동과 하산운동도 ‘회장님 마을’로 주목받고 있다. 신세계그룹 정용진 부회장이 한남동 저택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남서울파크힐 주택단지’까지 완공되면서 ‘한국판 비버리힐스’로도 불린다. 삼양인터내셔널 허광수 회장, 제일모직 윤주화 공동대표, 삼성전자 경영지원실 이상훈 사장, 아주그룹 문규영 회장 등의 저택이 있는 이곳은 일반인들의 출입을 원천 봉쇄하기로도 유명하다. 인근의 한 주민은 “그나마 정용진 부회장의 집은 담벼락이라도 볼 수 있지 안쪽에 사는 회장님들 집은 구경도 못한다. 마을 진입로가 폐쇄돼 내부와 연락을 하지 않으면 경비원이 출입을 막아선다. 이곳에 살면서도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기 쉽지 않다”고 전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부자들의 깐깐한 선택 풍수지리 기본…번지까지 따져 “돈이 많으니 마음에만 들면 아무 땅이나 집을 구입할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얼마나 깐깐한지 모든 조건이 완벽해야만 결정을 한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회장님’부터 수천억 원대 자산가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본 서판교 J부동산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그들의 까다로움에 혀를 내둘렀다. 우선 자산가들이 부동산을 보러 올 때면 항상 대동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다름 아닌 지관. 10명에 9명은 지관과 함께 땅을 보러 와 풍수지리부터 수맥, 전자파 등을 모두 고려해 신중히 둘러본 다음 구입을 결정짓는다. 겉으로는 아무 흠이 없는 땅이라도 지관이 ‘기운이 좋지 않다’고 평하면 그곳은 후보지에서도 제외된다. 풍수지리까지 완벽하다고 해도 자신만의 징크스에 부합하지 않으면 계약은 없던 일이 된다. 행운과 재물을 뜻하는 숫자 7이나 8이 꼭 포함돼야 한다거나 ‘본 번지’만을 고집하는 회장님들도 수두룩하다. 예를 들어 주소지가 ‘용산구 한남동 770-1’일 경우 ‘770’ 본 번지 다음에 ‘1’이 붙는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는 식이다. 770번지가 중심이기 때문에 그런 번지만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
일반인은 꿈도 못꾸는 집값 “양도세만 수십억” 분양가가 최고 91억 원에 이르는 판교 산운 아펠바움. 서판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최고급 타운하우스인 ‘산운 아펠바움’은 분양가만 최소 30억 원에서 최대 91억 원에 이른다. 서판교 J부동산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여기는 자기 재산이 얼마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산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반인들은 돈 줘도 못 사는 집이다. 양도세만도 수십억 원에 이르는데 어떻게 살겠느냐”며 “주택가도 평당 1500만 원 이상에 거래되고 있어 웬만한 자산가가 아니고서는 매입할 엄두를 못 낸다”고 말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
성남시 공무원 ‘서판교 공포증’ 거물들 민원에 안절부절 서판교가 부촌으로 떠오르면서 성남시 공무원은 한 가지 공포증을 갖게 됐다. 워낙 ‘힘 있는 분’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이곳에서 민원이 발생하면 안절부절 못하는 것. 입주민들이 툭툭 던진 사소한 불편사항도 관리소를 통해 그대로 민원으로 접수되는 경우가 많아 ‘서판교’라는 지역구만 봐도 골머리가 아파온단다. 그도 그럴 것이 서판교를 대표하는 테라스하우스인 ‘산운마을 7단지’만도 전·현직 장차관들이 무려 10여 명이나 살고 있다. 물론 그들이 직접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 타운하우스 관리를 맡고 있다는 한 직원은 “아직 도시가 완공된 상태가 아니기에 크고 작은 공사들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편함으로 입주민들이 종종 관리소를 통하거나 직접 민원을 넣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시청에서 난감해하는 기색을 보인다. 아무래도 ‘보통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니니 신경이 쓰이긴 한가보다”라고 말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