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도박을 끊은 지금도 경륜이 개장하는 금요일이 되면 몸이 반응한다. 그만큼 그 기억이 강렬하다.”
10년 동안 경륜 도박을 즐겼다는 A 씨(31)는 도박중독자였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엔 직장 상사의 소개로 경륜을 시작했던 A 씨는 우연찮은 기회로 도박중독자임을 자각하게 됐다. 어머니의 소개로 한 중독센터에서 도박 중독자 상담을 하면서 “정말 심각한 중독자”라는 답변을 듣게 된 것. 충격을 받은 A 씨는 이후 도박 치유 모임인 ‘한국단도박모임’(www.dandobak.co.kr)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지난 9일 기자가 직접 찾은 한국단도박모임에는 도박을 끊고 나서 후유증을 호소하는 참석자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우울증이 온다거나 화가 불쑥불쑥 치민다는 것은 기본적인 증상이었다. 20년 동안 도박을 했다는 한 참석자는 “두통도 심하고 밤에 잠도 못자는 상태다. 20년 동안 나를 유지시켜 준 게 도박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도박을 내려놓고 나니까 허무주의가 와있는 상태”라고 토로했다.
도박중독재단 안상일 상담원은 “중독에 있어서 도박은 마약 다음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심지어 성관계도 도박이 주는 충동에 미치지 못 한다”며 “도파민이라는 충동 전달 물질이 도박을 할 때 몇 배로 분비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도박의 후유증이 그만큼 심각하기에 도박은 ‘끊는다’는 것보다는 ‘평생 참는다’는 개념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안 상담원은 “도박 중독 치료는 통상 회복률을 산출해내기가 어렵다. 언제든 도박 충동이 재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대부분의 도박중독자들이 이용하는 치유 센터로는 도박중독자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하는 ‘한국단도박모임’과 국무총리 산하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사감위)에서 운영하는 ‘중독예방치유센터’ 등이 있다. 이밖에 강원랜드에서 운영하는 ‘클락’, 국민체육진흥공단 경륜경정사업본부에서 운영하는 ‘희망길벗’도 대표적인 도박중독치료센터다. 안 상담원은 “센터에서 집단 상담을 하든지, 정신과 진료를 받든지 등 각자 성향에 따라 도박중독자들에게 맞는 치료 방법이 있다”라고 전했다.
도박중독재단 안상일 상담원은 중독에 있어서 도박은 마약 다음일 정도로 후유증도 심각하다고 설명했다. 오른쪽은 인지능력치료기계.
한편 도박중독자를 위한 센터가 곳곳에 존재하지만 늘어나는 도박중독자를 감당하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중독예방치유센터가 서울 부산 수원 광주 강원 등 전국에 5곳밖에 없고, 대부분의 센터가 만성적으로 ‘인력난’을 겪고 있다는 것. 임 상담원은 “경기도 센터만 해도 경기도권 전체를 담당하지만 상담 인원은 6명밖에 없는 상태”라며 “지방에서 올라오거나 2주에서 한 달 정도까지 기다리는 도박중독자들이 수두룩하다”라고 전했다. 지난해 1300여 명이 다녀갔던 서울 중독예방치유센터도 상담 인력이 6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은 마사회에서 운영하는 도박중독치료기관인 ‘유캔센터’가 올해 1월에 문을 닫게 되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유캔센터를 이용하던 도박중독자와 전문가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에 놓인 것. 마사회 관계자는 “유캔센터를 폐쇄한 이유는 지난해 12월 사행산업법이 개정됨에 따라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에 매출액의 1000분의 3.5를 중독예방치유부담금으로 부담한 것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사감위에 부담금을 내는 대신 치유센터를 운영하지 않겠다는 셈이다.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마사회가 기업적인 논리로 도박중독자들을 외면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반면 같은 부담금을 내는 강원랜드와 경륜경정사업본부는 그대로 도박치유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다.
역부족인 치유센터를 의식한 탓인지 사감위에서는 오는 6월경 재단법인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를 설립해 치유 서비스와 전문 인력 등을 확충할 계획이다. 현재 예산은 40억 원에 불과하지만 중독예방치유부담금으로 예산이 170억 원가량으로 늘어나는 만큼 서비스를 확대하겠다는 것.
도박문제해결범국민운동 김규호 사무총장은 “재단을 설립해 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환영하지만 이사 선임 과정에서 공정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며 “늘어난 예산을 도박중독자들을 위해 어떻게 효율적으로 쓸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라고 전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취재 뒷얘기 중국인 교포로 위장… 카지노 잠입하려다 ‘질질’ 컴퓨터에 앉아도 마찬가지다. 불법 인터넷사이트를 취재하기 위해 자주 그곳에 접속한 결과 악성 코드 탓인지 인터넷 접속만 했다면 성인물 팝업창이 쉴 새 없이 떠 컴퓨터가 다운될 정도였다. 취재 당시에도 몇 번씩 컴퓨터가 멈춰서 쓰던 기사를 날리는 잔혹한 일도 있었다. 도박 중독도 ‘나는 아니겠지’ 하는 방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았다. 몇몇 기자들은 취재를 하면서 도박 중독 증상을 아주 잠깐이나마 경험하기도 했다. 한 기자는 온라인도박 잠입취재를 위해 서울 강서구의 한 성인PC방을 찾았다. 1만 원을 충전하고 온라인 사이트에 접속해 포커 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을 하며 종업원들에게 성인PC방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었다. 궁금한 걸 다 묻지도 못했는데 1만 원을 전부 잃는 데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1만 원을 다시 충전했다. 운이 좋았던지 4만 원까지 딸 수 있었다. 돈을 모두 잃고 퇴장당하는 상대편을 보며 승리감에 묘한 짜릿함까지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딴 4만 원도 결국 게임 몇 판을 지니 바로 사라져버렸다. 그때 기자는 땄던 경험이 생각나 오기가 발동했다. 1만 원을 다시 충전하려고 했다. 그 순간, ‘이래서 도박에 중독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 ‘숨어 있는’ 도박꾼들을 수면 위로 올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한마디로 섭외전쟁이었다. 특히 사설 경마를 취재할 때는 술과의 전쟁도 치러야 했다. 음성적으로 행해지는 불법도박인지라 취재원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사돈에 팔촌까지 동원해 어렵사리 사설 경마 사이트를 운영해 큰돈을 번 사람을 섭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기자를 무척이나 경계했고 좀처럼 무거운 입은 열리지 않았다. 자물쇠 입을 무장해제시켜 준 것은 역시 ‘술’이었다. 기자들은 1차 저녁 모임을 조용하게 보낸 뒤 소개를 시켜준 사람들은 먼저 보냈다. 그리고 오후 8시부터 취재원에게 집중적으로 술을 권하며 ‘죽음의 레이스’를 벌였다. 2차 술자리가 끝나고 자리를 옮기고…. 몇 차례를 반복하다가 새벽 4시가 돼서야 만취한 그의 입에서 ‘사설 경마’라는 단어가 나왔다. 외국인 카지노는 내국인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직접 기자가 잠입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에피소드도 있다. 서울 곳곳의 외국인 전용 카지노만 3일째 돌아다닌 한 기자는 오로지 그 안에 한번 들어가 보겠다는 일념에 과도한 용기를 발휘하고 말았다. 낚시터 도박 취재도 아슬아슬함의 연속이었다. 시내에 있는 한 실내낚시터 입구에는 이벤트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사진 자료로 쓰고 싶은 마음에 휴대폰 카메라를 들어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낚시터 사장이 문을 열고 뛰어나와 “사진은 왜 찍으시냐”고 기자에게 묻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개인 블로그에 올리려고요”라며 어설픈 변명을 둘러댔다. 그제야 낚시터 곳곳에 설치된 감시카메라가 눈에 보였다. 실외 하우스 낚시터에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한눈에 받았다. 단골도 아니고 젊은 나이에 낚시터를 찾은 기자의 모습이 낯설었던 것. 게다가 평일에 정장을 입고 갔으니 누가 봐도 눈에 뜨일 법했다. 한 낚시꾼은 “젊은이 솔직히 말하게. 경찰 아닌가? 단속 나왔으면 나왔다고 말하라”며 압박을 가했다. 기자임에도 기자임을 밝히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을 그 낚시꾼은 알았을까. 소싸움 취재를 하던 여기자는 예기치 않은 소리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소싸움을 앞두고 준비가 한창인 경기장을 찾았는데 소가 기자만 보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 댔던 것. 시골에서 밭을 갈던 온순한 소만 봐왔던 기자는 소가 그렇게 큰 소리를 낸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기자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다니며 어찌나 소리를 지르던지 소 주인도 “우리 소가 아가씨가 마음에 드는가보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소가 소리를 내질러줘 주인의 주의를 산만하게 한 덕에 취재는 비교적 쉽게 이뤄졌으니 ‘광음’을 내는 소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도박공화국을 취재한 기자들은 대부분 도박이라곤 화투짝 그림 맞추기밖에 모르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취재 과정에 만난 꾼들과 중독자들의 실상을 접하고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강원랜드에서 만난 한 남성의 말은 도박이 인간의 본성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무서운 경고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도박욕’ 하나의 욕구밖에 없다. 인간이라면 기본으로 가지고 있는 식욕과 수면욕도 없고 심지어 성욕도 없다. 강원랜드 주변 숙박업소에서는 매일 밤 낯선 사람들끼리의 남녀혼숙이 이뤄지는데 아무런 사고가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게 사람이 사는 꼴이라 할 수 있느냐.”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