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대북사업가인 김정태 안동대마방직 회장을 만나 개성공단 사태와 남북경협 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국내 대마사 제조 기술 특허 보유자이자 ‘대마박사’로 유명한 김정태 안동대마방직 회장(70)은 개성공단 건설보다 수년 앞서 이미 남북경협사업을 모색한 원로 대북사업가다. 지난 2005년 10월 북한의 심장부 평양에 남북합영기업 1호인 ‘평양대마방직’을 설립한 그는 지난 2008년 10월 거금 1500만 달러를 투자해 공장까지 건설했다.
하지만 막 첫 생산을 시작하려던 2009년 3월, 남북관계는 냉각됐고 당시 이명박 정부의 5·24 조치로 인해 북한 출입이 막혔다. 남북경협에 있어서 10년 넘게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는 최근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개성공단 사태와 남북경협의 위기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일요신문>이 지난 18일 그와 만났다.
―남북합영기업 1호, 평양대마방직은 현재 어떤 상태인가.
▲2009년 2월 28일, 마지막으로 올라가봤다. 그해 3월 31일, ‘유 씨 억류사건’ 이후 평양 입국길이 막혔다. 남북관계 망친 이명박, 현인택(전 통일부 장관), 원세훈(전 국정원장)이 다 주범이다.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줘야 하는데 1500만 달러(약 170억 원)에 달하는 투자금까지 다 날렸다. 설비 상당 부분은 이미 가동을 못해 중단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애초 대북사업은 어떻게 시작했나.
▲원래는 친분이 있는 한 신부님의 권유로 북한 주민들을 돕는 데서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중국에 떠도는 북한 아이들이 많았다. 이런 아이들에 500달러 지폐가 담긴 비닐봉투를 먹여 북한에 다시 돌려보냈다. 가는 길에 돈을 뺏기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이 돈으로 아이들은 북한에 다시 들어가 리어카를 사서 석탄 장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럼 한 식구 먹고 사는 거다. 그 당시 북한 아이들 70여 명을 그렇게 북한에 다시 들여보냈다. 그러다 이것만 갖고는 안 되겠다 싶었다. 북한 주민들에게 내가 갖고 있는 기술을 가르치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고민이 많았겠다.
▲결심할 때 가족회의까지 했다. 솔직히 실패할 수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모은 얼마 되지 않은 재산,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북한을 개방시킨다는 의미도 있었고 또 대마방직 사업이 남북경협에 적절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 사업 자체가 원료가 되는 대마 재배를 통해 북한 농촌도 살릴 수 있었고, 공장 가동을 통해 북한 노동자도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북한 당국에게는 외화벌이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가족들이 동의했다.
―회사 설립 전까지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텐데.
▲1999년부터 중국 투먼(圖們)에 대마를 시험 재배했다. 투먼은 두만강 변에 있는 접경 도시로 추운 북한과 기후와 토질이 비슷했다. 북한의 식량 사정상 어떤 땅이든 옥수수, 콩과 같이 이모작을 해야 하는 악조건도 시험에 적용했다. 첫 해는 절반이 얼어 죽을 정도로 성과가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듬해 재배에 성공했다. 파종 기간을 1개월 앞당기면서 재배기간을 단축시킨 게 주효했다. 이러한 데이터를 북한 농업과학원에 제공하면서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결국 ‘평양’이라는 북한의 심장부를 뚫었다.
▲공장 준공 때까지 내가 평양을 95번 다녀왔다. 이 사업을 위해 국내 기술자 등 한국 인원 1046명이 평양을 출입했다. 본격적인 사업 이전에 이러한 준비 과정에 든 비용도 어마어마하다. 사업 초기였던 2005년, 시험 삼아 500만 달러를 투자해 생산에 나서봤다. 원단을 가져와 북한의 재래식 생산시설로 상품을 만들어 봤는데, 질이 너무 떨어졌다. 결국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생산에 필요한 설비 16개 라인을 북에 올려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뭔가.
▲명색이 수도인 평양에도 산업 인프라가 전혀 없었다. 나쁜 정도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더라. 부품 하나 구하려면 2주가 걸렸다. 초창기 전압이 불안해서 생산라인이 일부 빼고 다 고장 나더라. 또 북한은 출입 자체가 힘들지 않나. 인프라는 부족해도 그나마 왔다갔다는 할 수 있는 방글라데시보다 못했다. 제조업 환경 자체로 보면 평양은 최악의 조건이었다.
―북한 당국의 감시는 없었나.
▲일이 몇 번 있었다. 사업을 본격화 하기 전인 2004년, 내가 데려간 국내 기술자 한 사람이 설비를 하고 있을 때다. 하찮은 부품 하나가 필요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그조차 못 구했다. 그 때 그 사람이 “도대체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은 거다. 순간 북한 노동자들이 멍해지더라. 이를 들은 북한 참사가 난리가 났었다. 다행히 그 사건은 잘 넘어갔는데 회사 설립 이후 2006년에는 우리 기술자 한 명이 호텔을 몰래 빠져나가 대동강에 산책을 나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그를 감시하는 참사가 놓친 것이다. 이 기술자가 강변에서 낚시를 하던 평양 주민과 말을 섞었는데 아마 심한 말이 오간 모양이었다. 결국 ‘추방’까지 고려되다 북한 당국에 ‘경고’를 받았다. 참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2008년 10월 공장이 완공됐다.
▲북한 당국도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나. 60년 만에 평양에 한국 기업이 들어왔으니. 우리 때문에 내각 총리 주재 회의가 스무 번 넘게 진행됐다. 우리 회사가 그런 것을 다 극복한 거다. 2008년 10월 결국 공장이 완공됐다. 원료인 대마도 평안북도 선천 600만 평 농지를 조성해 세팅이 끝난 상태였다. 그 때부터 생산이 가능했어야 했는데 연료체계에 문제가 생겼다. 북한에서는 연료로 가루석탄을 사용하는데 이게 재가 많다. 제품에 재가 막 쏟아지는 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증축이 필요했다. 이듬해 2월 중간에 이를 점검했고 한 달 뒤 바로 생산에 들어가는 찰나, 일이 발생했다. 정말 10년 고생해 쌓아 올린 게 하루아침에 무너진 거다.
‘대마박사’로 유명한 김정태 회장은 평양에 대마방직공장을 건설하기도 했다.
▲당시 집도 뭐도 다 날아갔다. 회사 자금을 쓸 수도 없었고 결국 내 돈으로 버틴 거다. 사업이 날아가니까 신경이 마비되더라. 잠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병원을 1년 넘게 다녔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평양 출입이 막힌 이후에도 중국 단둥(丹東), 개성공단 등지에서 평양 현지 회사 사람들과 접촉했다. 없는 형편에 중국 기술자와 설비까지 추가로 평양에 들여보냈다. 하지만 비용만 들 뿐 방법이 없더라. 임태희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이상득 의원까지 접견했지만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되레 정부가 우리와 관련한 악성루머까지 흘려 나를 곤란하게 만들더라. 이제는 희망이 많이 없어졌다.
―개인적으로 정부에 감정이 많겠다.
▲내가 제일 묻고 싶은 것이 이명박 정부에서 줄곧 주장하던 ‘잃어버린 10년’이다. 북한의 문호를 열어 남북경협을 처음 시작한 것은 보수정권인 노태우 정부다. 그들 논리라면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25년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개성공단 이전에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북한 남포 등 내륙공업단지에 이미 한국의 대우, 삼성, 엘지, 녹십자 등 수백 개 업체가 들어갔다. 남북관계가 최악이었던 시절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경협만큼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에 안겨준 외화 수입보다 노태우와 김영삼 정부가 벌어준 외화 수입이 실질적으로는 더 많다. 이를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이런 역사는 왜 다 빼먹느냐 이거다. 결국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성과는 다 보수정권의 바탕에서 시작된 거다.
―지금 당장 개성공단 폐쇄 위기에 닥쳤다. 전면 폐쇄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보나.
▲결과적으로 폐쇄까지 가진 않았지만, 북한은 이미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한 지난 2008년 12·1 조치 때 개성공단을 폐쇄하려고 했다. 그 당시 내가 만나던 북한 통일전선부 간부가 “아마 위에서 개성공단을 막을 것 같다”고 털어놓더라.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대뜸 “남쪽 파출부는 하루에 7만~8만 원씩 번다고 하더라. 그런데 우리 노동자들이 쌔빠지게 일해도 그 돈 못 받는다”고 하더라. 당시는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는데 그게 돌이켜 보면 결코 가볍지 않은 말이었다.
―북한 입장에서 개성공단으로 벌어들이는 이득이 크지 않기 때문에 포기할 수 있다?
▲개성공단은 넓은 의미에서 경협이지 실질적으로는 노동자 고용사업이다. 우리 기업이 땅만 빌려서 북한 노동자의 저임금을 이용하는 거다. 현재 북한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베트남만도 못하다. 요즘 베트남도 월 180달러(약 20만 원)는 받는다(개성공단 북한 노동자 월평균 임금은 144달러, 최저임금은 63.8달러다). 처음부터 임금을 적절히 높은 수준에서 책정했어야 북한에게 큰소리라도 치며 약발이 먹혔을 거다. 지금 그런 저임금 책정해 놓고 큰소리치는 우리 정부가 웃긴 거다. 북한 당국 입장에서는 차라리 중국 등 해외로 노동자들 보내 버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 그게 더 낫다.
―해법이 있겠는가.
▲정말 어려운 문제다. 딜레마다. 북한이 개성공단을 ‘볼모’로 이용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쉽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개성공단을 북한에 내줘서는 안 된다. 사실 현지 업주들은 지금까지 개성공단에서 많은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나처럼 10년 공든 탑이 무너진 것도 아닌데 솔직히 내 입장에서 그들을 보면 엄살이 좀 심한 것 같다. 이러한 경제적 이득보다는 군사적 문제가 오히려 더 크다. 개성공단이 폐쇄되면 북한은 다시금 군사력을 그곳에 투입할 수 있다. 그럼 서울이 위험해진다. 이를 염두에 두고 문제 해결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현재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박근혜 대통령도 어려워진다. 절대 전 정부가 했던 정치 초년병 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절대 민간경협이라는 경제적 영역에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 북한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얼마든 대립할 수는 있지만 경제적 ‘통로’는 남겨놔야 하지 않겠나. 잃어버린 10년을 보지 말고 25년이라는 남북경협사 전체를 봤으면 한다. 우리가 경제력으로는 북한에 40배 이상 앞선다. 이 힘만으로도 충분히 북한을 다룰 수 있다. 왜 비등비등한 군사력으로 맞서려고 하는가. 이는 어리석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위기에 처한 개성공단 현황 2·3 단계 지구 조성도 물건너가 개성공단 내에 북한 근로자들 근무 모습. 지금은 휴업 상태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벌써 2주째 길목이 막혀있는 남북경협의 상징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은 지난 며칠간 수차례 출경을 시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남북 당국은 묵묵부답이다. 기자와 통화한 입주기업협회 관계자는 “지금 당장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다”라며 “한국 언론은 물론 중국, 일본 인근 국가와 유럽, 심지어 남미 언론까지 문의를 해오고 있다”고 밝혔다. 장기화되고 있는 이번 개성공단 사태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상황. 입주기업들은 22일쯤 다시 출경을 시도한다고 밝혔지만, 실제 성사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지난 2000년 한국의 현대그룹과 북한의 조선아태평화위원회 합의로 시작된 개성공단 조성 사업은 2004년 리빙아트 냄비 생산을 시작으로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의 개성공단은 양측 합의에 의해 조성된 1단계 지구다. 2단계와 3단계 지구 조성사업은 지금으로써는 사실상 물 건너간 상태다. 1단계 지구 사업이 완료된 개성공단 총 면적은 3.3㎢. 현재 개성공단에 입주해 있는 국내 기업은 123개 업체다. 업종별로는 섬유가 72개로 가장 많고 그 뒤를 기계금속(23개), 전기전자(13개), 화학(9개) 등이 따르고 있다. 지난해 개성공단 총생산액은 4억 6950만 달러(약 5242억 원)를 기록했다. 현재 개성공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북한 근로자는 5만 명 수준으로 이들의 한 달 평균 임금은 144달러다. 하루 평균 한국인 체류인원은 700~80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