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 남양유업 대표이사와 임원들이 지난 9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는 모습. 김 대표는 이날 밀어내기 관행을 제도적으로 고쳐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여러 업체가 얽힌, 외주 업무가 많은 직종일수록 갑을 관계에서의 갈등이 많다. 광고계도 갑의 전횡이 심하다고 한다. 광고대행사에 다녔던 김 아무개 씨는 “대기업의 광고회사가 광고 의뢰를 받으면 협력업체인 광고대행사들을 불러 지시사항을 내린다. 약속 시간도 자기들 업무시간에 맞춰 통보를 한다. 광고회사들은 거의 퇴근 전에 기획회의를 하고 퇴근하면서 회의 결과를 대행사에 넘겨준다. 그러면서 ‘내일 아침 보고시간 전까지 광고 시안을 받아보겠다’고 말한다. 그럼 대행사 직원들은 다음 날 아침까지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밤을 샐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는 “기업의 요구대로 광고 시안을 만들어 가도 이런저런 트집을 잡으며 한 번에 통과시키는 경우가 없다. 일종의 길들이기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광고 기획이 잡히면 광고회사에서는 대행사의 아이디어를 가로챈 뒤 대행사를 배제해버리거나, 보상금이라고 하면서 30만 원 정도를 쥐어줄 뿐이다. 그리곤 광고로 인한 혜택이나 성과는 갑인 광고회사들이 다 가져간다”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광고대행사가 언제까지나 약자의 입장에서 피해만 보는 것도 아니다. 대기업 광고회사로부터 지시를 받은 광고대행사는 또다시 디자인업체에 외주를 준다. 이땐 을이었던 광고대행사가 갑의 위치에 서고, 디자인업체는 을이 된다. 김 씨는 “광고회사에게 이미 손해를 본 대행사는 그 몫을 벌충하기 위해 디자인업체에 더 불리한 조건으로 일을 맡긴다. 그럼 디자인업체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갑을 관계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남양유업 사태를 보면 영업사원들이 소규모 대리점에선 갑의 행세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업사원들도 대형 유통업체를 상대로 하면 을로 변모한다. 식품업체 영업사원 송 아무개 씨는 “대형 유통업체를 담당하는 영업사원들은 매장에서 고객들의 눈에 더 잘 띄는 위치에 자사 상품을 진열하기 위해 대형매장 매니저들에게 을의 입장에서 눈치를 보고 로비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그래서 같은 영업사원이라도 대형 유통업체를 출입하는 직원과 대리점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표정 자체가 다르다”며 “영업사원들 사이에서도 서로 소규모 대리점에 가려고 눈치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대리점연합회 이창섭 회장이 2월 7일 남양유업 본사가 위치한 대일빌딩 앞에서 1인시위를 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회사 내에서도 ‘갑’인 회사가 ‘을’인 직원들에게 영업손실을 떠넘기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 제과업계는 ‘납품단가 후려치기’에 따른 영업손실을 영업사원에게 떠넘긴 고질적 관행이 문제가 됐다. 한 제과업체 부산지사의 전 직원인 박 아무개 씨 등 3명은 월 매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다른 영업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할인율보다 싸게 소매점에 물건을 넘겼다. 회사는 그러나 ‘판매부족금을 단 한번이라도 갚지 않을 경우, 일체의 민·형사상의 조치를 받아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매월 영업사원들에게 받았다. 그래서 영업사원들은 할인에 따른 손실을 100% 책임져야 했다. 박 씨 등은 2009년엔 판매부족금으로 6520만여 원을 회사에 물어줬고, 2011년에는 내부감사에 걸려 1억 5000만여 원을 회사에 내야 했다. 일을 할수록 오히려 불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한 박 씨 등은 결국 회사를 그만뒀지만, 오히려 회사는 변제금을 마저 갚으라며 박 씨 등을 상대로 소송을 내기까지 했다.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이 아무개 씨는 하루는 집에 일찍 퇴근해 쉬고 있는데 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부장은 “A 술집에 가서 B 씨의 술값을 계산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이 씨는 “알고 보니 우리와 거래하고 있는 대기업의 홍보팀 과장이 우리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지금 A 술집에서 2차로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라고만 말하고 그냥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곧 술값 계산하고 가라는 거였다. 부장도 상대하기 귀찮으니 밑에 직원을 시킨 것이다”라고 전했다. 또한 “가끔 거래처에서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직원의 경조사 소식이 문자로 온다. 알아서 축의금을 보내라는 뜻이다. 심지어 전화가 와 자기 집 이사 날짜까지 알려주는 사람도 있다. 상사들이 이런 잘못된 관행을 보고 바로잡으려 해야 하는데 모른 척 눈감고 묵인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영원히 갑의 위치에서 살 수만은 없다. 언젠가는 갑이 을의 위치에 설 수도 있는 게 인생의 이치다. 영업직으로 10년을 넘게 일해 온 윤 아무개 씨는 “절대적인 갑, 영원한 갑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갑에 있는 어떤 이들도 언젠간 다른 위치에 가서 을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을 더욱 신중히 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현재의 우월함에 취해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갑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먼저 든다”고 전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8일 “이번 남양유업 사태를 계기로 기업 간 발생하는 갑의 횡포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겠다”며 “서울우유와 한국야쿠르트, 매일유업 등 유업계를 비롯해 다른 업계로 조사를 확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배달 빠지면 보증금서 깐다
대리점 주인의 폭로로 밝혀진 남양유업 본사 영업사원의 폭언과 ‘밀어내기’ 관행. 이 때문에 대리점 주인은 을의 입장에서 피해를 입은 것처럼만 그려지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대리점주들에게 고용된 배달원들 역시 을의 위치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남양유업의 횡포 논란이 사회적 이슈로 불거진 지 이틀 뒤인 지난 5일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게시판에는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남양유업 본사와 대리점의 관계뿐 아니라 대리점과 배달 직원들 간의 갑을 관계 횡포도 심각하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남양유업 대리점에서 배달원으로 일했다고 밝힌 글쓴이는 “우유배달원으로 일하려면 대리점에 보증금 100만 원을 내야 하고, 이를 못 내면 월급에서 한 달에 20만 원씩 공제한다”며 “보증금은 배달원이 아프거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배달을 못 나가면 수당을 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배달원들은 하루 1만 원이 소중한 사람들한테 이건 심한 처사가 아니냐”고 토로했다.
사실 배달원들의 경우 근로계약서도 제대로 작성하지 못하고 불합리한 노동처우를 받아오는 등 이전부터 끊임없이 그 문제점이 제기돼 왔다. 기자가 만나본 한 우유배달원들은 “심한 대리점의 경우 실제로 배달원들에게 보증금을 받아 그들을 옥죄고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배달원 고 아무개 씨는 “눈이 오는 겨울에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다 얼음판에 미끄러져 깁스를 하게 됐다. 그런데 대리점 주인은 치료비는 못 내줄망정 오히려 ‘오늘 네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배달에 차질이 생겼다’며 ‘배달할 사람을 급히 어떻게 구하냐’고 화를 냈다. 월급은 당연히 받지 못했다”고 하소연을 했다.
또 다른 배달원 최 아무개 씨도 “본사의 영업사원이 왔다간 다음 날이면 대리점 주인의 신경이 더 날카로워진다. 그럼 짜증을 받아내는 건 배달원들을 비롯한 직원들의 몫”이라고 전했다. 갑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을에게 푸는 것이다. 그는 “대리점주의 답답한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도 을의 입장에서 당했을 때를 생각해 우리의 입장도 고려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을’이 자폭하면 ‘슈퍼갑’도 와르르
폭로로 여론의 폭풍이 몰아치니 ‘슈퍼 갑’들도 휘청거리고 있다. 비행기에서 진상을 부리고 승무원을 폭행한 포스코에너지의 왕 아무개 상무는 결국 사표를 쓰고 회사를 나갔다. 호텔 지배인을 폭행한 프라임베이커리의 강 아무개 회장은 회사 문을 닫아야 했다. 또한 지난 9일에는 영업직원의 욕설과 밀어내기 관행 논란과 관련, 남양유업의 김웅 대표가 직접 나와 기자회견을 열고 대국민 사과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이미지와 경영실적은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전문가들은 “포스코의 브랜드 가치가 2조 7000억 원 수준인데, 이번 왕 상무 논란으로 상당한 가치 하락이 있어 보인다”고 평가했다.
남양유업 역시 논란이 불거진 지난 2일 이후 주가가 13% 넘게 추락해 장중 97만 5000원까지 떨어졌다. 반면 유제품 시장에서 2위를 유지하고 있던 경쟁업체 매일유업은 주가가 6% 이상 급등하며 남양유업의 시가총액을 역전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이처럼 을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그들의 열악한 사정이 널리 알려지고 처우가 개선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사회경제적 약자인 을의 목소리에 여론의 약자인 ‘또 다른 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기업 마케팅팀의 한 관계자는 “SNS의 글들은 정확한 사실관계를 따지기 이전에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이럴 경우 잘못된 정보로 피해를 입는 기업이나 사람이 생겨날 위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부품 납품업체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들의 무리한 요구와 횡포 등 불법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데 우리 목소리는 아무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SNS 등 여론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