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4일 SK㈜는 공시를 통해 최태원 회장이 보유 지분 2.22%(104만 787주) 중 2.19%(103만 787주)를 블록딜(대량매매:주식을 대량 보유하고 있는 매도자가 시장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사전에 자신의 매도물량을 인수할 수 있는 매수자를 구하여 넘기는 것)을 통해 매각했다고 알렸다. 주식 매각 대금은 약 9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이번 거래를 통해 최 회장의 지주사 지분율은 0.03%에 불과하게 됐지만 SK그룹 지배력엔 당장은 큰 문제가 없다. SK그룹 지배구조는 최 회장이 지분 44.50%를 보유한 SK C&C를 축으로 ‘SK C&C→SK㈜→SK텔레콤·SK네트웍스→SK C&C’의 순환출자 형태로 이뤄져 있다.
지배구조 논란과 관련해 SK 측은 “(최 회장이) SK㈜ 지분을 대거 확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럴 만한 자금이 없다. 지금처럼 SK C&C를 통해 SK㈜를 지배하는 것에 법적인 문제는 없다”는 입장이다. 최 회장이 SK㈜ 지분율을 두 자릿수 이상 확보하려면 적게는 수천억 원에서 많게는 수조 원이 들기 때문에 SK C&C를 통한 지배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재계의 관심은 최 회장이 지주사 지분을 팔아가면서 마련한 거액의 용처에 쏠린다. SK 측은 “오너 개인 재산 문제라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새로운 투자,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나 생산성 있는 일에 투자하기 위한 유동성 확보일 것”이라 밝힌다. 그러나 재계에선 지주회사 체제 전환과 관련, 최 회장이 일부 자회사 지분을 사들이려 할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최 회장의 SK㈜ 지분 매각 직후 SK증권 주가가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려 주목을 받았다. 최태원 회장이 주식 매각 대금으로 SK증권 지분을 대거 사들여 대주주로 앉게 될 전망이 제기된 까닭에서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일반 지주사의 금융 자회사나 손자회사 소유가 제한돼 있으므로 지주회사제 전환 작업 중인 SK그룹이 조만간 SK증권을 매각해야 한다는 논리에서였다. 그러나 SK 측은 “(최 회장이) SK증권 지분을 굳이 사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라 단언한다. 일반 지주사의 금융 자회사 소유를 가능케 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국회통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최 회장이 지배구조 강화를 위해 SK C&C 지분을 사들일 가능성에 주목하기도 한다. 지난해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주가가 곤두박질칠 때 최 회장은 SK㈜ 주식을 단 한 주도 사들이지 않은 반면 SK C&C는 SK㈜ 지분율을 부지런히 늘렸다. 지난해 이맘때 25.42%(1193만 6735주)였던 지분율을 1년 만에 31.82%(1494만 4432주)까지 끌어올린 상태다. 만약 최 회장이 이번 주식매각 대금으로 SK C&C 지분을 추가 매집하게 되면 ‘최태원 회장→SK C&C→SK㈜’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더욱 튼실하게 다질 수 있다. 이에 SK 측은 “(최 회장의) SK C&C 지분율이 충분히 높은 만큼 추가 매입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고 밝힌다.
그러나 SK C&C를 상장하는 과정에서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지난 2007년 7월 지주회사 체제를 출범시킨 SK그룹은 지주회사 요건 충족을 위해 올해 6월까지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야 한다(정당한 사유가 있을 경우 유예기간 2년 연장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SK그룹이 택한 것은 SK C&C 상장이었다. 이 회사 지분 30%를 보유한 SK텔레콤과 15%를 가진 SK네트웍스가 거액의 상장차익을 챙길 수 있는 동시에 순환출자도 해소된다. SK C&C는 지난해 증시폭락으로 공모희망가액(주당 11만 5000원~13만 2000원) 실현이 어려워져 상장철회 신고를 했지만 증시 회복 여부에 따라 조만간 재추진될 전망이다.
그런데 상장에 따른 대규모 신주 발행이 이뤄질 경우 최 회장 지분율은 그만큼 낮아지게 된다. ‘신주 발행→SK C&C 지분율 하락→그룹 지배력 약화’를 염두에 뒀을 법한 최 회장이 SK㈜ 지분 매각대금을 활용해 SK C&C 주식을 미리부터 추가매집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재계에선 SK텔레콤과 SK네트웍스가 보유한 SK C&C 지분 일부를 최 회장이 사들이는 데 이번 SK㈜ 지분 매각대금이 활용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최 회장의 SK C&C 주식과 SK㈜가 보유한 자사주를 맞교환하게 될 것’이란 관측이 줄곧 제기돼 왔다. SK㈜는 현재 SK C&C 지분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주식 맞교환을 통해 지주사 SK㈜는 SK C&C 지배에 필요한 지분을 확보할 수 있으며 최 회장은 SK㈜ 지분율을 늘릴 수 있다.
SK㈜가 보유한 자사주는 648만 4246주(지분율 13.81%)다. 최 회장이 SK C&C 주식 890만 주를 보유한 만큼 SK C&C가 SK㈜ 주가의 85% 정도 가격으로만 상장돼도 최 회장은 주식 맞교환을 통해 SK㈜ 자사주 전량을 가져올 수 있다. 최 회장이 비상장 상태에서 SK C&C 주식을 낮은 가격에 추가로 확보해 놓으면 상장 이후 SK㈜와의 주식 맞교환이 더 용이해질 것이다. 결국 SK㈜ 지분 매각대금을 활용한 SK C&C 비상장 주식 추가매집은 훗날 최 회장이 추가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SK C&C를 통해 SK㈜를 지배하는 구조를 탈피해 ‘최태원→SK㈜→자회사들’ 형태의 이상적 지배구조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한편 SK그룹은 최근 최태원 회장 동생 최재원 SK E&S 부회장과 최 회장 최측근으로 꼽히는 정만원 SK텔레콤 사장을 등기이사 후보로 신규 추천했다. 최재원 부회장은 SK㈜ 등기이사 후보로도 추천된 상태다. 이변이 없는 한 3월 13일 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로 선임될 예정이다.
최태원 회장은 과거 외국계 자본 소버린자산운용의 주식 대량 매집으로 심각한 경영권 위기에 몰렸던 적이 있다. 그룹경영 전면에 동생과 측근을 내세워 ‘직할체제 강화’를 꾀한 최 회장 머릿속에선 소버린 악몽이 지워진 자리에 ‘지배구조 강화’ 밑그림이 한창 그려지고 있지 않을까.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