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숙 씨가 최근 검찰에 탄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은 노태우 전 대통령 부부가 1993년 2월 25일 임기를 마치고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청와대 현관을 나서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검찰에서는 김 씨의 탄원서 접수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김 씨 변호인 측은 “현재 서울중앙지검에 접수해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고 접수 사실을 밝혔다. 그동안 비자금 논란에 대해 공개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노 전 대통령 측이 김옥숙 씨를 직접 내세워 정면대응에 나선 것을 두고 재우 씨와의 전면전을 선언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 13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씨는 채동욱 검찰총장 앞으로 한 통의 탄원서를 보냈다. 탄원서의 요지는 “검찰이 사명감을 갖고 노재우와 신명수에게 맡겨진 재산을 환수해 빠른 시일 내에 기필코 추징금을 완납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시기 간청드립니다”는 것이었다. 즉 노 전 대통령이 재우 씨와 신 전 회장에게 맡긴 비자금을 검찰이 나서서 찾아달라는 게 탄원서의 핵심이었다.
김 씨가 이러한 탄원서를 제출한 배경을 두고 갖가지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김 씨가 탄원서에 쓴 “추징금 완납은 노 전 대통령 개인의 의미를 넘어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역사에 대한 빚을 청산하는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는 내용과 “추징금을 완납한 이외의 재산에 대해선 단 1원도 노 전 대통령과 가족은 금전적 이익을 취하지 않겠다. 만약 남은 재산이 있다면 국가에 귀속돼야 할 것”이라는 내용을 들어 노 전 대통령 측이 추징금을 납부하려는 진정성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형제간이 재산을 두고 지난한 소송전을 벌인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 측이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시민경제사회연구소 홍헌호 소장은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의 재산을 적극적으로 확인하고 추징금을 집행할수록 노 전 대통령 측이 얻는 경제적 이익은 많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노 전 대통령 측은 재우 씨에게 120억 원, 신 전 회장에게 654억 원의 비자금을 맡겼다고 주장하는 상태다. 검찰이 탄원서의 내용대로 재우 씨와 신 전 회장에게 맡겨진 재산을 전부 환수할 경우 단순 계산으로 774억 원이라는 돈이 노 전 대통령 앞으로 떨어지는 셈이다. 노 전 대통령이 현재 남은 추징금 231억 원을 완납하더라도 최대 500억 원이라는 금액은 검찰의 추징금 업무와 관련 없이 노 전 대통령 일가 누군가의 손으로 떨어질 공산이 크다. 홍 소장은 “만약 환수하려는 재산이 다 살아있지 않더라도 실보다 득이 크다는 게 노 전 대통령 측의 계산인 것 같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김 씨는 앞서 말했듯 “단 1원의 금전적 이익도 취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탄원서를 통해 밝힌 바 있다. 노 전 대통령 일가가 정말 금전적 이익을 취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점은 탄원서에 서명한 이가 김 씨와 노 전 대통령의 장녀 소영 씨밖에 없다는 점이다. 노 전 대통령 동생 재우 씨 측 변호사 이흥수 씨는 “아들 재헌 씨가 서명에서 빠진 것은 재헌 씨를 휘말리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라며 “그만큼 김 씨가 외아들 재헌 씨를 챙기겠다는 뜻이 담겨있고 그게 바로 이번 탄원서 제출 사안의 핵심”이라고 전했다.
이번 탄원서를 주도한 김옥숙 는 이전에도 병상에 누워 있는 노 전 대통령을 대신해 재우 씨와의 소송전을 주도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2009년 오로라씨에스 주주를 상대로 낸 항소심 재판에서 김 씨가 증인으로 직접 출석해 회사 설립 과정을 조목조목 밝힌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흥수 변호사는 “오로라씨에스의 소유권을 지속적으로 주장한 이는 사실 노 전 대통령이 아니라 김옥숙 씨일 가능성이 높다. 병상에 누워있는 노 전 대통령은 사실 아무 것도 모른다. 이번 싸움이 형제 간 싸움이 아니라 형수와 시동생의 싸움인 것이 바로 그 이유다”라고 전했다.
재우 씨 측은 그간 언론 인터뷰를 통해 노 전 대통령과 재우 씨와의 관계가 돈독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노 전 대통령의 부탁을 재우 씨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이 들어줬다는 점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현재 재헌 씨 명의로 되어 있는 대구 팔공보성아파트나 연희동 자택 필지도 노 전 대통령의 부탁으로 재우 씨가 먼저 구입했다가 재헌 씨에게 명의를 넘긴 것이라는 것이다. 재우 씨는 항상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형님, 어떻게 할까요”라며 노 전 대통령의 의견을 묻곤 했다는 게 재우 씨 측 설명이다.
그렇다면 김 씨가 탄원서의 서명을 누락시키면서까지 재헌 씨를 챙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전언에 따르면 김 씨의 아들 사랑이 예부터 유별났다는 점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심지어 김 씨는 6공 시절 정치를 꿈꾸던 재헌 씨를 위해 고위 공직자들을 찾아다니며 재헌 씨를 인사시켰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올 정도다.
하지만 무엇보다 소뇌위축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등 병세가 악화된 노 전 대통령의 혹시 모를 사후를 대비해 비자금 정리를 아들 중심으로 하기 위함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결국 정리된 비자금의 최종 목적지는 재헌 씨를 향하지 않겠냐는 의견이다. 또 추징금을 완납하고 나면, 재헌 씨 등 가족들이 관리하고 있는 비자금이 있을 경우 그 돈이 무사해질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이흥수 변호사는 “김 씨 입장에서는 딸은 이미 재벌가로 가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며 “차명 부동산이 재헌 씨 소유가 됐듯 결국 재헌 씨를 챙겨주는 게 과제가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현재 김 씨의 탄원서는 서울중앙지검 민원실에 등록돼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홍 소장은 “비자금 정국인 현 시점에서 여론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서 김 씨가 탄원서를 제출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라며 “그동안 부족했던 검찰의 의지가 중요한 시점이 됐다”라고 전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