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전공부1-그랜드슬램
소렌스탐은 “당시 나는 지금의 박인비와 같은 입장이었다.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렸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또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게 잘 안 됐다”고 술회했다. 또 박인비에 대해서는 “나보다 나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골프채널>에서 소렌스탐의 파트너로 일하고 있는 케이 코커릴(전 US여자아마추어챔피언십 우승자, 전 LPGA 멤버)도 “박인비는 잘 극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워낙에 차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인비는 미LPGA에서 시즌 첫 2개 메이저대회를 연속 우승한 7번째 선수다. 3연속 우승은 1950년 베이브 자하리아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시즌 첫 3연속 메이저 우승은 미PGA까지 포함해도 대기록이다. 우즈의 3연속 우승은 2002년 브리티시오픈 3라운드에서 강풍에 날아갔고, 미LPGA의 팻 브래들리는 1986년 US여자오픈 첫 날 76타로 무너졌다. 1972년 잭 니클라우스와 1960년 아널드 파머도 아쉽게 실패했다.
1년에 4개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는 ‘(캘린더)그랜드슬램’은 골프에서 남녀를 통틀어 단 한 번 나왔다. 미PGA에서 1930년 보비 존스의 기록이다. 2000년 US오픈부터 이듬해 마스터스까지 4개 메이저대회에서 연속 우승한 ‘타이거 슬램(타이거 우즈)’, 1953년 3개 메이저대회(마스터스, US오픈, 브리티시오픈)에서 우승한 ‘호건 슬램(밴 호건, 당시 PGA 챔피언십은 브리티시오픈 예선과 겹쳐 출전할 수 없었다)’이 있지만 엄밀한 의미의 그랜드슬램이 아니었다. 만일 박인비가 US여자오픈과 에비앙마스터스, 그리고 브리티시여자오픈까지 우승한다면 골프의 성인 바비 존스를 넘어서는 사상 초유의 5개 대회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2013년부터 미LPGA 메이저대회는 5개). 또 설사 US여자오픈 우승에 실패해도 여자골프 사상 첫 한 시즌 4개 대회 그랜드슬램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 사전공부2-우즈와 동급
박인비가 지난 4월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우승 후 스윙코치이자 약혼자인 남기협 씨(왼쪽서 두 번째)와 함께 포피 폰드로 몸을 날리는 세리머니를 했다. AP/연합뉴스
ESPN의 골프평론가 폴 에이징어도 박인비의 ‘극강 퍼팅’을 상세히 언급하면서 “만일 타이거 우즈가 전성기의 퍼팅감각을 되찾는다면 타이거 우즈와 2위 그룹과의 차이는 그랜드 캐년만큼이나 크다”고 언급했다.
영국의 <골프투데이>는 ‘박인비의 캐디백에는 무엇이 들었을까?(What’s in the bag of Inbee Park?)’라는 기사를 통해 박인비가 사용하는 클럽을 자세히 소개하기도 했다. 이는 우즈 등 미PGA 스타플레이어에 쏟아지는 관심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박인비의 2013년 성적은 우즈를 능가한다. 12개 대회에서 5승을 거뒀으니 우승확률(41.7%)은 우즈(44%, 9개 대회에서 4승)와 비슷하다. 아니, 메이저 무관인 우즈에 비해 메이저 2승을 포함한 박인비의 우승품질이 더 높다. 도박사들은 이번 US여자오픈을 앞두고 박인비의 우승확률을 5대1(1달러를 걸면 5달러를 받는다)로 우즈의 US오픈 우승확률과 일치시켰다. 또 한 시즌 최고의 선수를 가리는 포인트(미LPGA는 롤렉스, 미PGA는 페덱스)를 봐도 박인비(221점, 2위 92점)는 우즈(2380점, 2위 1964점)보다 훨씬 더 큰 격차를 유지하고 있다.
# 롱런 요건1-퍼팅
박인비의 퍼팅은 미국에서도 교과서로 통한다. 지난해 7월 에비앙 마스터스 경기 모습.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AP/연합뉴스
박인비도 “퍼팅은 감각이 중요하다. 내 감각이 원래 좀 좋은 듯하다. 스윙은 심각하게 고민한 경우가 있었지만 퍼팅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다.
즉, 박인비는 원래 퍼팅이 좋았다. 슬럼프 기간에는 샷이 나빠 성적이 나지 않으니 조명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지금처럼 샷이 안정되니 가려졌던 신기의 퍼팅이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는 것이다.
현재 박인비는 미LPGA에서 온그린 시 퍼팅수 1위, 라운드당 평균퍼팅 2위를 달리고 있다. 그린을 놓친 후 어프로치 후 1퍼팅으로 홀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있어 사실 전자가 더 의미가 있다. 박인비는 지난해 에비앙 마스터스에서 4일간 퍼트수 98개를 기록했다. 퍼팅에 관해 최고로 평가받는 우즈도 72홀 기준으로 100개 밑으로 친 적이 없다. 타이거 우즈보다 나은 것이다.
박인비의 퍼팅그립은 ‘크로스 핸디드(cross handed·역그립)’이다. 일반적인 오버래핑 그립과 달리 왼손이 밑에, 오른손이 위에 있는 그립이다. 프로선수의 경우 10명이면 1~2명꼴로 사용한다. 그런데 박인비의 퍼팅이 화제를 모으자 최근 미LPGA에서는 폴라 크리머 등 톱랭커들까지 역그립으로 바뀌는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미LPGA에서 퍼팅의 달인으로 통하는 미야자토 아이(일본)는 박인비가 자신의 퍼팅 자세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말을 듣고, 정색을 하며 “말도 안 된다”고 받아쳤다. 박인비의 라이벌로 꼽히는 스테이시 루이스(28)는 “올해 LPGA 투어 우승컵은 박인비의 퍼팅에 따라 그 주인공의 얼굴이 바뀐다”고 말했다. 심지어 전 세계 1위 청야니(24·대만)은 “박인비에게 4m 이내는 무조건 컨시드를 줘도 된다”고 퉁을 쳤다.
미PGA 티칭프로이자 유명한 골프칼럼니스트인 수잔 웨일리는 박인비의 퍼팅에 대해 “아름다움 그 자체다. 마치 흐르는 물과 같고,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다. 퍼팅에 관한 한 무조건 그를 따라하면 된다”고 극찬했다. 이미 미국에서도 퍼팅의 교과서로 통하는 박인비의 퍼팅인 것이다.
# 롱런 요건2-생활
그런데 이제 25세인 박인비는 미LPGA의 한국선수들이 부러워하고, 미국 언론에서도 높이 평가할 정도로 투어생활이 행복하다. 바로 스윙코치이자 약혼자인 남기협 씨와 투어생활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인비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011년 약혼자와 투어생활을 시작하면서 플레이가 잘 되기 시작했다. 그는 내 스윙, 멘탈, 그리고 모든 것에서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골프월드>의 책임편집자, <골프다이제스트>의 시니어 라이터인 론 시락도 “박인비는 스윙코치이자 약혼자인 남기협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 덕분에 필드에서도 다른 선수와는 달리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6월초 웨그먼스 LPGA 챔피언십 당시 박인비가 약혼자와 함께 연장전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 가장 큰 승리의 원동력이 됐다고 분석한 미국 언론도 있었다. 박인비는 올 시즌 후 결혼할 예정인데 그 후에도 남 씨와 함께 투어생활을 계속할 계획이기에 향후 투어생활에 달라질 것이 없다.
박인비는 믿음직한 약혼자 외에도 투어생활에 여러 이점이 많다. 중학교 1학년 때인 2001년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US여자주니어챔피언십 우승 등 AJGA에 좋은 성적을 냈다. 처음에는 영어가 서툴러 일부러 3퍼팅을 해 우승하지 않기도 했지만 이제는 영어뿐 아니라 미국문화에 익숙하다.
# 롱런 요건3-멘탈
박인비는 퍼팅과 함께 마인드 컨트롤이 뛰어나다. 2008년 최연소(19세) US여자오픈 우승을 달성한 후 4년간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렸다. 기술적으로 샷이 오른쪽으로 밀리면서 도대체 성적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온 뒤 땅은 더 굳어진다고 했다. 일본에서 우승컵을 수확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더니 2012년부터 스윙이 안정되자 미LPGA 투어를 강타한 것이다. 참고로 이런 스윙의 안정화에는 남기협 씨가 큰 도움이 됐고, 또 남 씨가 늘 함께 있는 까닭에 예전의 스윙불안이 다시 찾아올 가능성은 아주 낮다.
정일미 교수는 “사실 퍼팅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버디찬스를 많이 만든다는 점에서 박인비의 안정된 스윙도 대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인비는 원래 성격도 말수가 많지 않은 차분한 스타일이다. 여기에 스윙이 안정되니 극강의 퍼팅과 함께 약점이 없어진 것이다. 박인비는 올 시즌 5승 중 3번을 역전승으로 장식했다. 경쟁자들은 이렇다. 비슷한 퍼팅라인에서 박인비는 넣는데 자신은 실패한다. 이것이 2~3번만 반복되면 ‘멘붕’에 빠지는 것이다. ‘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도 이런 플레이 스타일에서 비롯됐다.
박인비는 “나는 정말 즐겁기 때문에 골프를 한다”고 했다. 이런 평정심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금세 무너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박인비의 롱런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자골퍼로 평가받는 아니카 소렌스탐은 38세에 은퇴했다. 타이거 우즈는 38세인 지금도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미LPGA에서 큰 존경을 받는 줄리 잉스터(53·통산 31승)는 자녀를 3명이나 뒀지만 아직도 경쟁력 있는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25세의 박인비는 자신의 시대를 길게 끌고 갈 더없이 많은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