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강력한 비자금 수사 의지에 반해, 연희동 주변은 ‘자신이 있으면 찾아보라’는 듯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요신문 DB
하지만 법조계 주변에서는 검찰의 이런 ‘우회전술’에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다. 먼저 검찰이 확보한 귀중품과 고가 미술품의 정확한 소유주와 구입경로, 자금의 출처 등을 파악해야 한다.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전두환법)이 지난 12일 시행됨에 따라 불법 재산에 대한 추징은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압류품의 실소유주가 전 전 대통령이거나 그 비자금으로 만들어진 재산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지난한 과제가 남아있다. 즉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재국 씨 등 친인척들에게 건너갔더라도 검찰이 현재 확보한 압수물을 사는 데 쓰이지 않았다면 환수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 의지도 초강력인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채동욱 검찰총장도 이번에는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총장 자신의 의협심이 강하고, 이번 사건에 강한 애착과 책임감을 보이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국정원 사건 등으로 상처를 입은 검찰의 위상 제고를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뭔가 해내야 한다. 초반에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갔다는 것은 앞뒤 안보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겠다는 결연한 의지 표출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검찰이 이번 수사에 대해 전재국 등 일부 자식의 구속과 관계 회사를 문 닫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두환 일가를 초토화시킬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전 씨 일가와 비자금의 관련성을 규명해내지 못하더라도 관계 회사들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회사 문을 닫게 할 것이란 얘기다.
검찰이 유례없이 강력한 수사의지를 밝히며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을 압박하고 있지만 연희동 주변의 반응은 시큰둥한 편이다. 전 전 대통령 측 한 관계자는 “(초법적인 비자금 회수 수사에 대해) 전 전 대통령이 너무 불쌍하다. 너무 압박하는 것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지만 실제 내부 분위기는 ‘아무리 공격해도 끄떡없을 것’이라는 쪽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에서 총무비서관 관련 일을 해온 전 전 대통령 측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별명을 모르느냐. 전두환 전 대통령은 ‘넣어둬’, 노태우 전 대통령은 ‘놓고가’였다.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은 받은 돈을 다 추징금으로 빼앗기지 않았느냐. 다른 측근들한테 맡기는 게 아니라 자기가 전부 가져갔으니 그 돈 전부 뺏긴 것이다(노 전 대통령의 경우 전 전 대통령처럼 측근들에게 분산 예치한 뒤 복잡한 돈세탁을 하지 않고 그냥 본인이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수 절차가 쉬운 편이었다)”라며 “근데 전 전 대통령은 돈 들고 오는 사람들한테 전부 ‘넣어둬’라고 했다. 측근들이 가지고 온 돈을 그들 주머니에 넣어두고 쓰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돈을 전달해주는 사람이든 비서관 등 측근이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돈을 맡겨두기 위해 ‘넣어둬’라고 했던 것이다. 잘 감춰두라는 얘기다. 자기도 얼마가 있는지 누구에게 맡겼는지도 모를 정도다. 그래서 지금도 전 전 대통령이 돈 필요하면 여기저기서 현금이 튀어나오는 거다. 전 전 대통령은 사람 관리 정말 잘 했다. 도움이 될 사람이든 아니든 자기에게 부탁이 들어오면 다 들어줬다. 아직도 그때 일 때문에 전 전 대통령한테 충성하는 사람이 많은 거다. 전화 한 통이면 돈 들고 오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전두환은 절대 죽지 않는다. 검찰이 아무리 들이닥쳐 봐라. 집에 현금 한 푼 없을 거다. 뭘 가져가든 그건 전 전 대통령이 일부러 둔 거다”라고 말했다.
검찰이 지난 18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 씨가 운영하는 시공사 사옥을 압수수색했다. 임준선 기자
최근 <한겨레>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3억~5억 원씩 쪼개 수백 개의 가명 및 차명 계좌에 넣은 뒤 평균 3개월마다 또 다른 사람 이름의 계좌로 옮기는 방식으로 세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그렇게 쪼개져 관리되던 자금이 2000억 원이 훨씬 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몇 달 만에 돈이 옮겨지면서 명의자만 수천 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계좌 명의자를 불러 조사하는 것이 무의미했다는 것이다. 1995~1996년 당시 검찰 수사팀은 ‘수십 명의 전담팀을 꾸려서 몇 년 동안 추적해야 자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밝힐 수 있을 정도라는 판단이 들어 더 이상 자금을 추적할 수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이 거둬들인 비자금을 일부 최측근들에게 ‘넣어둬’의 방식을 통해 몇 개의 큰 뭉칫돈을 운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대선자금 등 정치자금을 오랫동안 관리해본 경험이 있는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전 전 대통령의 성격상 뭉칫돈을 최측근에게 툭툭 떼어주며 알아서 관리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것으로 본다. 큰 뭉칫돈은 자신의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겠지만 수십억 단위 정도는 그것을 기록해 놓은 리스트가 있을 것으로 본다. 그것만 확보할 수 있다면 전두환 비자금 수사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은닉재산 환수를 위한 검찰 수사 대상에 차명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전 전 대통령의 측근들은 배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법조계 안팎에선 검찰 수사를 전 전 대통령과 그의 자녀들, 친·인척에 국한할 게 아니라 지난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내란·뇌물죄 수사 당시 조사받았던 전 전 대통령의 측근들로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사건을 전 전 대통령이 정치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는 이상 비자금 규명은 요원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앞서의 민주당 의원은 이에 대해 “전 전 대통령이 먼저 온 나라를 비자금 환수 정국으로 몰아가 국력이 낭비되고 있다는 점을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그래서 최측근들에게 심어 놓은 현금을 끌어 모아 추징금을 완납해야 한다. 회수방법이나 자금원 추적은 검찰과 정치적 담판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이번 사건을 법적 공방과 시간끌기로 또 다시 이어갈 경우 전 전 대통령은 역사 앞에 죄를 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게 된다. 오죽하면 ‘전두환 일가 3족을 멸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겠느냐.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정치적 결단을 내리고 추징금을 전부 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