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성이 지난 7월 18일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디 오픈 첫 라운드 첫 홀 러프에서 탈출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김형성은 17세의 늦은 나이에 골프를 시작했다. 못해도 열 살, 아니 걸음마를 하면서 채를 휘둘렀다는 천재들이 즐비한 프로의 세계에서 진귀한 골프 입문이다. 그가 골프를 시작할 때 또래들은 주니어무대에서 이미 빛을 발했다. 각종 대회 우승에 국가대표상비군 선발 등 화려하기만 했다. 그의 골프시작은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늦게 시작했는데 골프로 밥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늦은 만큼 빨리 따라잡기 위한 길을 택했고, 무조건 노력하는 것이 해법이었습니다.”
김형성은 아예 주니어 무대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목표는 프로인 만큼 프로무대를 일찍 준비하는 것이 그나마 늦은 스타트를 만회하는 길이었다(결과적으로 이는 현명한 방법이 됐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프로테스트에 응시, 세미프로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긴 안목을 가지고 바로 군입대했다. 병역을 마친 후 골프에 올인하기 위해서였다. 2003년 제대 후에도 집안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아는 사람이 없는 일산으로 가 1년이 넘게 주말 골퍼들을 지도하며 돈을 모았다. 무명의 세미프로가 본격적으로 투어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경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프로선수 중 상금이나 후원으로만 생활할 수 있는 선수는 소수에 불과해요. 많은 프로들이 레슨으로 먹고 살지요. 저도 그런 과정을 거친 것뿐이에요.” 김형성은 자신의 고생에 대해 극히 담담했다.
2부투어를 거쳐 1부투어로 올라온 김형성은 좋은 기량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우승을 놓치는 아픔도 겪었다. 하지만 2006년 제50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하며 무명신화의 서곡을 썼다.
“출발은 늦었지만 성공은 더 빠를 것”이라는 다짐은 이후 계속됐다. 주니어 시절 잘나가던 또래들은 우승은커녕 아직 1부 시드도 확보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본격적인 인생역전이 시작된 것이다.
2008년 2승을 거두며 한국 최고의 선수(그해 KPGA 대상 수상)로 우뚝 선 김형성은 바로 시선을 해외로 돌렸다. 최종목표인 미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일본투어를 선택한 것이다.
#도전…막히면 다른 길로
10년 전만해도 철저하게 무명이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김형성의 목표는 한결같았다. 세계 최고의 무대인 미PGA에 진출해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2009년부터 일본투어(JGTO)에서 뛰면서도 기회가 되는 대로 미PGA대회에 나갔다(세계랭킹이나 일본상금순위 자격).
미PGA Q스쿨도 나갔다. 하지만 마치 주니어무대처럼, 다른 선수들이 거치는 이런 과정은 이상하리만큼 김형성과는 인연이 없었다. 계속해서 아쉽게 실패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디 오픈이다. 미PGA 메이저대회를 꼭 경험하고 싶어 5번이나 디 오픈 예선에 나갔지만 한 번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올해 기회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지난해 일본 첫 승을 기록한 데 이어 2013년 5월 일본 메이저대회인 일본PGA챔피언십에서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8시간 만에 절친한 후배 배상문의 미PGA 첫 승(HP바이런넬슨대회)으로 묻히기는 했지만 일본 상금랭킹 2위(현재는 4위)로 점프하며 디 오픈 출전권이 굴러들어온 것이다.
“(디 오픈 경험은) 너무 좋았어요. WGC대회로 미PGA무대를 경험하기는 했지만 메이저대회는 다르잖아요. 최경주, 양용은 프로도 현장에서 ‘그래서 메이저대회’라고들 하시더군요. 미국 진출의 욕망이 더 강해졌어요.”
비록 컷탈락을 했지만 디 오픈의 경험은 김형성에게 큰 자극이 됐다. 그리고 미국 진출도 우회로이기는 하지만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는 미PGA의 경우 2부투어를 거치지 않으면 Q스쿨에 나갈 수 없게 됐어요. 일본투어를 떠나 미국에서 2부 생활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우회로를 택하기로 했어요. 세계랭킹 70위권이면 WGC 대회는 출전이 가능해요. 50위권만 되도 메이저대회까지 나갈 수 있지요(현재 100위권). 1년에 8개 이상의 대회를 뛰면서 상금을 확보하면 다음 해 풀시드를 받을 수 있어요. 지금처럼만 하면 수년 내에 미국으로 갈 수 있을 겁니다. 올해 목표도 일본 상금 1위가 아니라 세계랭킹 70위권 진입입니다.”
‘나는 된다.’ 스스로에게 보내는 주문처럼 들리는 이 말은 김형성의 카카오톡 인사말이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
일본선 ‘아줌마스토커’가 졸졸
김형성은 2009년 초 여자프로골퍼였던 도미정과 결혼하면서 ‘품절남’이 됐지만 아직도 한국과 일본의 여성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일본에서는 아줌마 스토커가 따라다닐 정도라고 한다. 김형성은 결혼 후 성적이 훨씬 좋아졌다. 가족이야말로 자신의 골프를 지탱해주는 가장 큰 힘이다.
“아버지가 대장암 투병 중인데 제 골프가 당신에게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용돈도 많이 드리고요(하하). 그리고 미국 진출의 이유 중 하나에는 아이들도 있어요. 미국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투어를 뛸 생각이에요.”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