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 티켓을 안고 돌아온 유재학 감독을 만났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정말 깜짝 놀랐다. 아마 농구 시작하고 그렇게 많은 취재진을, 그것도 공항에서 만난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선수들은 이번 대회를 통해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의 좋은 경험들을 했을 것이다. 대회는 끝났지만 숙제는 더 많이 남았다. 대표팀 운영과 관련해서는 연맹이나 협회에서 더 많이 신경을 써야 한다고 본다.”
―국제대회를 치르면서 아쉬운 점으로 기억되는 부분이 무엇인가.
“가장 먼저 우리 선수들이 몸싸움에 약하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선수들끼리 약간의 터치나 충돌이 있어도 바로 심판의 휘슬이 울린다. 아예 몸싸움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국제대회에서는 이 정도의 몸싸움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무리 세게 부딪혀도 휘슬이 안 울린다. 손과 다리를 쓰거나 팔꿈치로 가격하는 파울 외에는 심판이 잡아주질 않는다. 그런 상황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국제대회에 나가면 이런 심판 판정 룰로 인해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아직도 국내에서는 한국식 심판 룰을 고집한다. 이 부분은 분명 시정이 돼야 한다고 본다.”
―경기력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나.
“우리 센터들은 딱 페인트 존에서만 농구를 한다. 그런데 그 센터의 신장이 다른 팀의 포워드나 가드 라인의 신장 밖에 안 되다 보니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대표팀 꾸리고 두 달을 준비하면서 센터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농구를 했다. 중동이나 필리핀, 중국 선수들은 외곽에 스위치맨 수비가 되면 가드들이 외곽으로 다 쫓아간다. 우리는 원 드리블에 다 뚫린다. 이건 선수들 탓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도자들이 성적을 내기 위해 그 테두리 안에서만 가르쳤기 때문이다. 한국이 제일 불리한 게 신장과 체격, 그리고 점프력이다. 그걸 커버하려고 스피드를 키우고 잔기술을 늘려 가는데 지금은 외국 선수들이 키도 크고 점프력도 좋고 스피드도 빠르다. 우리보다 못하는 게 없다. 진짜 이런 성적을 내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래서 수비 연습을 그렇게 죽도록 시켰었나.
“수비 외에는 우리가 할 게 없었다. 그들을 공격으로 이기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골을 넣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는 게 중요했다. 8차례의 경기 중 60점 이상을 내준 경기가 이란전과 필리핀전뿐이었다.”
―1차전에서 중국을 만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승리를 거뒀다. 이겨서 다행이지만, 만약 패했더라면 힘든 일정이 됐을 것 같다.
“처음 대진표 받아 들고 정말 난감하고, 황당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대진표가 나올 수 있나 싶었나.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니 어차피 중국과 한 번은 붙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의 전력을 잘 모를 때 붙는 것도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중국과 중간에 붙었더라면 어려운 싸움이 됐을 것이다.”
―대회 전, 솔직히 어느 정도의 성적을 예상했나.
“50 대 50이었다. 대만, 중국, 필리핀 등 우리보다 좋은 전력을 갖고 있는 팀들이 있었지만, 한국 선수들이 ‘대표팀’이란 조직으로 모였을 때 발휘되는 남다른 정신력, 팀워크, 끈끈한 오기 등을 믿고 싶었다. 중국을 물리치면서 한 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지난 2010년 대표팀의 미국 전지훈련에서 작전을 지시하고 있는 모습.
“난 모험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지도 철학은 열심히 하는 선수들과 농구하는 것이다. 실력이 되는 선수가 열심히 하지 않는다? 그러면 아웃이다. 나한테는 실력과 이름값보다는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선수가 더 중요하다.”
―이번 대회에서는 김민구라는 신예 스타가 등장했다. 김민구에 대해 평가를 한다면?
“민구는 운이 좋은 케이스이다. 어느 게임에서도 공격의 물꼬는 (김)주성이나(조)성민이가 터줬다. 점수를 뽑아낸 상태에서 민구가 투입됐기 때문에 부담 없이 슛을 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회 출국 전 한국에서 연습할 때랑 8강전까지만 해도 민구의 슛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평소 선수들하고는 농담을 잘 안하는 편인데, 민구한테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농담도 하고 일부러 여유있는 점수 차이에서만 코트에 내보냈다. 이런 부분이 민구한테 큰 에너지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세계선수권대회가 내년 8월에 열린다. 과연 그 대회에 어느 감독이 나가느냐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여론은 본선 진출에 성공한 유재학 감독이 맡아야 한다는 분위기이다.
“아직 협회나 연맹에서 공식 제의가 오지 않았는데 내가 이렇다 저렇다 입장 표명을 할 상황이 아니다.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 방열 회장님께서 계속 팀을 맡아줘야 한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공식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만약 나중에 그 제안이 들어온다면 그때 다시 고민해보고 싶다. 단, 이전에 국가대표 감독을 맡고 나서 내가 강조했던 말이 국가대표는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에 대한 책임은 지고 싶다.”
유재학 감독은 12명의 대표팀 선수들과 헤어지기 전, 개별적으로 숙제를 나눠줬다고 한다. 대표팀 생활 동안 그가 지켜본 선수들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에 대해 나름 정리를 해서 선수들에게 전해준 것. 내년에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한국 농구의 발전을 위해 그가 얼마나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