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을 계기로 대표적 공안통 김기춘 비서실장(왼쪽)이 ‘원톱’으로 주목받고 있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해임 위기서 기사회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최근 일련의 사건을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란 게 중론이다. 여러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검사 출신의 김기춘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은 ‘왕실장’으로서 기선제압이 필요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에다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국정원 개혁이라는 공세로 코너에 몰렸던 남재준 국정원장은 비상구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외교·안보 분야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 60% 이상 지지율을 보였다. ‘공안검사(김기춘)-군장성(남재준)’ 출신이 박 대통령의 고공 지지율에 편승하려 했다면 어떤 이슈를 끄집어내야 했을까. 청와대가 기세등등해졌다. 하지만 집권 여당 내에서는 이런 정보를 가진 이도, 지략을 갖춘 이도 찾아보기 어렵다.”
내란음모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계기로 ‘청와대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여권의 실세지형이 뒤바뀌고 있다는 말이다. 새 스타플레이어가 등장, 급부상하고 있다는 평가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언론의 주목도가 가장 큰 ‘신예’는 아이러니하게도 ‘노장’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1막과 2막 사이에서 다소 석연찮고 느닷없이 등장한 그지만 박 대통령의 ‘저도 구상(여름휴가차 저도에서 머문 박 대통령의 향후 국정구상을 일컫는 말)’에서 주인공은 김 비서실장이었다.
김 실장은 대표적인 공안통이다. ‘중정 정치’를 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들었던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 대공수사국장을 거쳤고,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지냈다. 1989년 서경원 평민당 의원 방북 사건 수사는 그의 대표적인 이력. 특히 김 비서실장이 박 대통령의 ‘멘토+자문+원로그룹’으로 통하는 ‘7인회’ 멤버라는 점에서 앞으로 큰 힘이 실릴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인사위원장까지 겸임하게 돼 김기춘 파워는 딱히 형용할 표현이 없을 정도로 막강해 보인다.
뜨는 이가 있으면 지는 이가 생기는 것이 정치권의 생리다. 김 비서실장의 등장으로 다소 힘이 빠진 인물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꼽힌다. 정무수석에서 홍보수석으로 수평이동을 했지만 ‘정무+홍보’를 겸임하다시피 한 이 수석은 그간 실세 중의 실세였다. 허태열 전 비서실장과는 동등한 입장에서 교감했다. 하지만 일흔다섯의 노장 김 비서실장에 앞에서는 다소 몸을 낮춘다는 전언이다. 최근 청와대 인사들과 사석에서 만난 한 정치권 인사가 전한 실상은 이랬다.
“박 대통령에 대한 충성 밀도로 보면 이정현 수석만 한 인물이 없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의 세월을 보면 이 수석은 김기춘 실장에 비할 수 없다. 이 수석이 박 대통령에게 귓속말은 주고받을지 몰라도 큰 틀에서 좌표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항모를 움직이는 키를 쥐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김 비서실장은 결단을 읍소하거나 압박할 수 있는 사람이다. 청와대 실세들이 이제 김 실장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오더라.”
존재감이 미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정홍원 국무총리는 더 작아질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김기춘-정홍원 투톱체제’가 완성됐다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김 실장과 정 총리의 이력이 이를 말해준다.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왼쪽)와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 박은숙 기자
추락하는가했더니 날아오른 실세로 남재준 국정원장을 들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논란 진실공방 속에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해 여야의 뭇매를 맞던 그는 곧 해임될 듯한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국정원 개혁 화두를 내란음모 이슈로 반격, 반전을 꾀했다. “3년간 내사했다”는 보도가 연일 강조된 것도 민주당이 국정원 개혁 과제 중 하나로 국내 정치파트 폐지를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국정원 국내 파트를 없애면 이런 공안 사건은 밝힐 수 없다는 사실을 남 원장이 보여준 셈이다.
정치권 동향을 파악하는 한 기관 관계자는 “(남 원장은) 수세에 몰릴 때 생각지도 못한 카드를 꺼내고 있다”며 “게다가 카드가 몇 개나 더 있는지 알 수 없다. 그가 꼬장꼬장한 이유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야권에서는 현 정부를 비꼬며 국정원 정치의 서막을 외쳤는데 실제 현실화하고 있다.
실종되다시피 한 여의도 정치를 끌어가야 할 인물은 친박근혜계 핵심,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다. 이석기 의원의 체포동의안은 가결됐지만 의원직은 유지된다는 점에서 그를 국회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 것이냐는 최 원내대표의 전략에 달렸다. 야권을 상대로 얼마나 적절하게 ‘밀당(밀고 당기기)’을 벌이느냐가 10월 재·보궐 선거, 앞으로 불어 닥칠 공공요금 정국, 내년 지방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내에서 8표 차 신승으로 대표성을 확보하지도 못한 최 원내대표를 두고 그간의 정국에서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다는 비판적 여론이 작지 않다. 잘못하면 정기국회까지가 그의 임기가 될 것이란 말도 나온다.
반대로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최 원내대표보다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국정원 정치가 연출되는 상황에서 윤 부대표는 다소 이례적으로 국정원 개혁 방안을 스스로 밝혔다. 국내 파트 축소, 유휴 인력 사이버·경제안보 파트로 투입, 대공 수사권은 유지 기조 속에 정치적 중립은 강화한다는 것이 새누리당의 복안이라고 밝혔다. 당내 누구도 국정원 개혁이 진행형임을 알리지 않은 속에서 윤 부대표가 돋보이는 모습이다.
여권의 실세지형이 뒤바뀌고 있지만 공통점은 있다. 바로 ‘검사 전성시대’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썼다. “정홍원 국무총리/검사, 김기춘 신임 비서실장/공안검사, 홍경식 신임 민정수석/공안검사, 황교안 법무장관/공안검사…. 공안검사 공화국시대.”
박 대통령이 특정 분야 출신의 특수한 목소리만 경청하고 있다는 우려가 들린다. 신예의 등장으로 목줄이 타는 여권이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 주목되고 있다.
선우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