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모델 자격은 몸매도 키도 나이도 무관하다. 끼와 예술성만 갖췄다면 누구나 도전 가능하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기자가 직접요?”
“네, 직접요. 취재 좀 하고 싶어서요.”
그리고 이어지는 작은 침묵. 곧이어 답변이 돌아왔다.
“음. 그럼 일단 한번 사무실로 와보세요.”
국내의 대표적인 누드모델협회인 ‘한국누드모델협회’와의 전화통화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누드모델을 직접 체험하겠다는 기자의 당찬 출사표가 던져진 채. 시간은 결전의 그날로 향하고 있었다.
만남 약속 당일. 한국누드모델협회 건물 앞에 섰을 때 머릿속에는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하에 위치한 사무실을 한 계단씩 내려가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혹시 벌써부터 모델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그러나 우려(?)했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넓은 화실은 텅 비어 있고, 화가들은 한 편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하는 모습에 문득 “아, 지금이 점심 때였구나”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시간은 오후 12시. 하지만 이상하게도 허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밥을 먹고 난 후의 팽창할 뱃살 걱정에 배고픔도 저만치 달아났을 것이다. 사실 기자는 ‘결전의 그날’을 대비하며 단기간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나름 열심히 해온 터였다.
기자가 인사를 하자 화가들 사이에서 한창 얘기를 주고받던 한국누드모델협회 하영은 회장(여·45)이 기자를 반겼다.
“반가워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하 회장은 기자에게 우선 누드모델을 체험하려하는 이유를 몇 가지 물었다. 일종의 사전 면접인 셈. 기자는 남자누드모델이 생소하다는 점과 그들의 세계를 직접 체험해 보고 싶다는 희망을 장황하게 피력했다. 무엇보다 근육질의 몸매만이 남자 누드모델이 가능하다는 편견을 깨고 싶다는 나름의 거창한 포부와 함께. 한참을 듣고 있던 하 회장이 그런 편견이 익숙하다는 듯 한 마디를 던졌다.
“누드모델은 몸매도 키도 심지어 나이도 상관없어요. 예술성만 갖춰졌다면 충분히 도전할 수 있습니다. 일단 오셨으니 오늘 바로 한번 해보실까요?”
하 회장의 화끈한 승낙에 내심 당황했다. 설상가상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바로 20분 후 누드모델로 서보라는 통보를 받았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그 시간이 빨리 올 줄 이야. 새삼 지난 저녁 못 다한 팔굽혀펴기가 생각나 눈이 질끈 감겼다. 호기 있게 “편견을 깨고 싶다”고 당당하게 얘기했지만 남들 앞에서 멋져 보이고 싶은 욕망은 옷을 입으나 벗으나 똑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 쪽으로 가서 가운으로 갈아입으세요.”
하 회장의 안내로 탈의실에 혼자 남겨진 기자는 알 수 없는 묘한 고독감에 사로잡혔다. “나만 벗고 남들은 입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탈의실 너머는 마치 다른 세상처럼 두려움이 가득했다. 옷을 탈의하고 가까스로 문을 열고 나갔을 때 기자의 유일한 방어막은 얇디얇은 파란색 가운 하나뿐이었다. 새삼 아무것도 입지 않은 밑부분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즐겨 듣는 노래가 있으신가요?”
멍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기자에게 하 회장이 웃는 얼굴로 물어왔다. 자주 듣던 노래가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으면 스피커에 연결해 포즈를 취하는 내내 틀어준다는 것. 보통 누드모델들은 자신들만의 음악리스트를 하나씩 갖고 있다고 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긴장을 푸는 효과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만의 감정과 연기를 표현해 내기가 수월하다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기자의 휴대폰에는 저장되어 있는 음악이 별로 없었다. 평소 힙합음악을 즐겨 듣긴 하지만 알몸인 상태로 힙합 포즈를 취하면 정말 우스꽝스러울 것이라는 상상과 함께 “그냥 있는 거 아무거나 틀어주세요”라고 어물쩍 넘어가버렸다.
어느덧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고 화실에는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자, 이제 무대로 올라가세요.”
하 회장의 말에 발걸음을 서서히 옮기기 시작했다. 화실 정중앙에 있는 무대에는 푹신한 바닥재가 깔려 있었고, 무대 뒤편에는 모델의 뒷모습을 보여주려는 용도인 듯 커다란 정면 거울이 달려 있었다. 무대 앞에는 반원 형태로 책상에 드문드문 앉은 7~8명가량의 화가들이 있었다. 순간 무대에 오르기 전 하 회장의 한마디가 생각났다.
“다들 성묘 가셨나. 오늘은 화가들이 얼마 안 오셨네. 오늘은 운이 좋은 거예요. 원래는 자리가 꽉 찰 정도로 많은데.”
나름 위안이 되는 한마디였지만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여성 화가들이 3명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자님이 용기가 대단하시네요. 여기 그리는 사람들도 막상 벗으라고 하면 못 벗을 거예요.”
용기를 북돋아 준 한 여성 화가는 어느덧 프로의 눈빛으로 연필을 손에 쥔 채 무대에 선 기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없었다면 뜨거운 침묵만이 화실 속을 감돌고 있을 터였다.
드디어 가운을 홀가분하게 벗은 기자는 무대 앞에 있는 초시계를 가볍게 눌렀다. 초시계는 포즈를 취하는 시간을 정해주는 용도로 쓰인다고 한다. 보통 3분마다 울리는 알람에 맞춰 새로운 포즈를 취해야만 한다. 새로운 포즈도 어느 한 곳을 보면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다른 방향을 향해 취하는 것이 원칙이다. 포즈의 방향이 다양할수록 화가들이 다양한 스케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몸과 포즈. 생소한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음속에는 ‘자포자기’만이 떠올랐다. 첫 포즈는 이러한 심정을 대변하듯 일어서서 왼손을 허리에 얹은 가벼운 자세로 시작했다. 갈 곳을 잃은 오른손은 그저 아래로 쭉 뻗어 어정쩡함을 모면해보고자 했다. 얼굴은 오른쪽으로 틀어 45도 아래로 바닥을 보았다. 그제야 ‘실제 상황’임을 직감하기 시작했다.
정면을 향해 있는 가슴과 배에는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던 중 어느덧 3분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다른 포즈를 취해야 하지만 머릿속은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변한 상태였다. 포즈를 못 잡고 잠시 생각하다 몇몇 화가들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 당황스런 눈빛 교환. 화가들의 눈빛에서 “침착해! 침착해!”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백조의 호수를 연상케 하는 장엄한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졌다.
음악을 온몸으로 느끼며 한 마리의 백조가 된 듯 두 팔을 쭉 폈다. 마치 자유를 갈망하듯 바닥에 있던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
“이것이 비상이다.”
순간 삶에 대한 회한이 밀려왔다.
“왜 나는 이 자리에 섰는가.”
남들 앞에 알몸으로 서서 투영되는 감정은 부끄러움이었지만 그것이 단지 알몸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은 아니었다.
알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건 내 삶의 지난 흔적이었다. “벗으면 그 사람의 삶이 보여요”라고 공공연하게 얘기하던 하 회장이 생각났다. 누드모델은 그런 직업이었다. 나체의 삶을 남들 앞에 당당히 서서 통째로 보여주는 직업.
이후 3분은 “다음에 어떤 포즈를 취할까” 생각하는 데 온통 할애했다. 매번 다른 포즈를 취하자니 머리를 빠르게 굴릴 수밖에 없었다. 앉아도 보고 무릎을 꿇어보고 엎드려도 봤다. “누워볼까”라고도 생각했지만 너무 편히 쉬려는 의도가 티가 날까봐 포기했다. 3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자세를 유지하는 동안 어느덧 전신에는 땀이 뻘뻘 나고 있었다. 기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 총 10포즈를 취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프로 누드모델은 보통 2시간 정도 포즈를 취한다니 존경심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누드모델이 슬슬 익숙해질 무렵 시간 종료를 알리는 타이머가 울려왔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가운을 다시 입은 기자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 오른 상태였다. 살면서 했던 어떤 경험보다 강렬한 경험이었다. 긴장이 풀어지자 허기도 함께 밀려오기 시작했다.
“저 어땠나요?”
걱정이 사라진 하 회장의 낯빛은 기자의 무모한 도전에 따뜻한 화색이 감돌았다. 하지만 평가는 냉정했다.
“마치 살아있는 목석같았어요. 죽어있다고 해야 하나요.”
30분 내내 딱딱한 통나무처럼 보였을 기자의 포즈에 대한 적확한 표현이었다.
“벗어도 일상에 있듯 표현이 자연스러워야 해요. 지금 옷을 입고 있으니 얼마나 자연스러워요. 벗어도 그런 경지에 올라야 한다는 얘기죠.”
일일 누드모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평가였지만 칭찬 하나 없는 가혹한 평가가 야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뿌듯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가 누드모델 계에서 26년을 있었지만 기자가 직접 누드모델 하는 것은 처음 봤어요.”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최초’이자 단독 기자 누드모델이라는 하 회장의 ‘특종 인증’에 야속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다음 취재를 위해 힘차게 협회 문을 나섰다.
고민호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