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문제와 관련한 북한의 관련 보도와 반응에서는 격앙된 분위기가 감지된다. 지난 10일자 북한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담화는 그 포문을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북측도 정상회담 당사자이니 대화록 공개를 그냥 두고 보지만 않을 것’이란 얘기다.
2002년 5월 13일 박근혜 당시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이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가졌다. 남한 내부의 대화록 공방 정국과 관련, 북한 당국이 주요 방북 인사들의 대화 내용을 공개하겠다고 위협하고 나섰다.
주목되는 점은 북한이 그동안 방북한 주요 인사들의 대화 내용을 공개하겠다고 위협하고 나선 대목이다. 조평통은 “담화록을 공개할 내기한다면 우리 역시 남조선 위정자들과 특사들이 우리에게 와서 발라 맞추는 소리를 한 데 대해 전면 공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평통은 또한 “(담화록이 공개될 경우) 남조선이 어떤 혼란에 빠지게 되고 남조선 현 당국자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는가하는 것은 더 말할 여지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남조선에서의 사태 추이를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주장에서는 향후 상황 전개에 따라 방북인사 대화록을 공개할 수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북한은 지난 2002년 5월 이뤄진 박근혜 대통령(당시 한국미래연합 창단준비위원장 자격)의 방북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 내용을 사실상 지목하고 있다. 북한 방송들은 그 해 5월 13일 이뤄진 회담과 만찬 내용을 이례적으로 14일 ‘0시 뉴스’를 통해 공개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평양방송은 “김정일 동지께서는 박근혜 여사를 위해 만찬을 마련했다”며 “만찬회는 동포애의 정이 넘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고 깍듯이 박 대통령을 예우했다. 김정일이 그만큼 박근혜 면담에 각별한 공을 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김정일은 박 대통령이 요구한 남북 현안에 대해서도 몇 가지 약속을 해줬다. 그 중 한국전쟁 국군포로 생사 확인과 금강산댐 공동 조사는 북한이 적십자 회담 등을 통해 먼저 논의를 제안해 우리 회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이 방북 이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대표를 맡고, 대북문제와 관련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자 ‘유신창녀’ 등의 극언까지 퍼부으며 비난전을 펼쳤다. 지난 대선에서 당선이 유력해지자 비난이 주춤해졌지만, 취임 이후 ‘청와대 치맛바람’ 운운하며 극렬한 비난을 재개했다.
북한은 그동안 크고 작은 남북회담의 비공개 합의를 깨고 일방적으로 관영 매체를 통해 공개한 적이 적잖았다. 주로 회담에서 불리한 상황이거나, 남측을 곤경에 빠트리려 할 때 민감한 협의 진행 내용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각색해 폭로하는 방식이다. 남북 회담에 관여해온 정부 당국자는 “회담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남북관계를 파국으로 이끌 필요가 있을 때도 비공개 회담내용을 드러내 버리는 수법을 써왔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지난해 1월 집권 이후 대남 문제와 관련해 호전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인 지난 3월에는 서해 최전방을 방문해 “적진을 벌초하라”거나 “항복문서에 도장 찍을 놈도 없게 수장시켜 버리라”는 섬뜩한 말을 쏟아냈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지난 8일 “김정은이 3년 내 무력통일을 호언하고 있다”고 국회 정보위에 보고하기도 했다. 30세의 젊은 지도자로서의 미숙함에 대남 열세에 따른 열등감까지 더해져 좌충우돌형의 행보를 보인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하지만 사정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반론이 더 우세하다. 우선 북한이 대화록을 공개한다고 해도 그 내용을 신뢰하기 어렵다. 북한의 행태로 볼 때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치밀하게 각색되거나 조작된 내용을 포함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다. 신뢰도를 높이려면 박 대통령과 김 국방위원장 간의 녹음파일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이는 북한이 최고지도자의 면담 내용을 몰래 녹음해둔다는 걸 한국은 물론 국제사회에 자인하는 꼴이 된다.
정부 관계자는 “공식회담의 경우 상호 합의 또는 양해 하에 남북 모두 녹음을 하고 녹취록을 만든다”며 “박근혜 대통령의 김정일 면담 같은 경우 성격상 녹음까지 하는 걸 공식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 모두 자기 측에서 이뤄지는 남북 간 주요 면담의 경우 녹음기록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비공개리에 이뤄지는 것이란 설명이다. 이를 공개하는 건 스스로 외교 관례를 깨버리는 행위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박 대통령 방북 녹취파일을 공개할 경우 역풍을 맞을 가능성도 북한으로선 고려해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특사로 방북해 김정일과 만난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등의 대화 내용은 뭐였느냐에 관심이 쏠리고 공개압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국방위 정책국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6월 “김태효 청와대 비서관 등과 5월 정상회담 개최와 관련한 비밀접촉을 했다”며 그 내용을 공개하게다고 위협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책에 대한 반발이었다. 당시 박지원 민주당 대표 등이 나서 북한의 공개를 만류했고, 우리 정부도 “깔 테면 까보라”고 맞서자 북한은 꼬리는 내렸다.
대화록 공개를 둘러싸고 북한이 극단적 선택을 할 경우 국정원 등 우리 당국의 맞대응 카드가 등장할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정일과 면담한 몇 달 뒤 남한에 왔던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이 남측 인사들과 나눈 적나라한 이야기들이 공개될 경우 북한 권력 내부에도 소용돌이가 일 수 있다. 장성택이 현재 김정은 권력의 후견인 역할을 하는 핵심 인물이란 까닭에서다.
결국 북한의 방북인사 면담록 공개 위협은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에 대한 격앙된 반응일 뿐 실제 행동에 옮겨질 가능성은 여러 요인 때문에 제한된다는 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최고존엄 운운하며 박근혜 정부에 대해 날을 세우고 있지만 남북대화 수요가 다시 필요해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회담을 제의하고, 유화 국면으로 돌아설 것이란 전망이 정부 안팎에서는 나오고 있다.
이영종 중앙일보 기자 yj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