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첫 국정감사가 한창인 요즘, 때 이른 ‘레임덕’ 이야기가 조금씩 퍼지고 있다. 관료 출신인 새누리당 한 초선 의원이 안타까워하며 쏟아낸 말을 들어보자.
“임기 중반점을 돌고서 치르는 재선거, 보궐선거를 두고 ‘힘이 빠졌네’, ‘공무원들이 말을 안 듣네’ 하며 레임덕이 회자되는 것과 달리, 이번 정부에선 여야 없이 힘 빠지는 소리를 해대고, 또 힘 빼려는 말들이 거침없이 나오고 있다. 임기 첫해 이런 금기어가 나오는 것은 정치적 도의에도, 일반 상식에도 맞지 않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레임덕이란 표현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면 결국 여당도 박 대통령과의 거리두기에 나설 수도 있다는 뉘앙스였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10월 초 정치부 기자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다.
여당이 박 대통령과 거리두기에 나섰고 조중동도 칭송에서 비판으로 입장을 바꿨다. ‘레임덕 징후’로 해석되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하지만 박 의원이 레임덕을 먼저 거론한 것은 아니다. 지난 9월에는 장외투쟁 중이던 천호선 정의당 대표가 “진 장관이 사퇴 의사를 밝혔는데 청와대가 사직서를 반려했단다. 레임덕이 찾아왔는지 의심스럽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이들 야권의 레임덕 발언을 의식한 듯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10월 초 “내년 6월 지방선거는 대통령 선거 버금가는 선거다. 선거에서 지면 바로 레임덕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여권에선 홍 사무총장의 발언을 두고 ‘성급했다’는 지적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새누리당 의원 한 명 한 명을 따로 만나면 레임덕 징후에 대해 ‘NCND(긍정도 부정도 않다)’의 자세를 취한다. 절반은 수긍하고 있는 셈이다. 한 여권 관계자의 분석은 이렇다.
“임기 시작 8개월이 지났는데도 정부 구성이 완료되지 못한 점(4대 권력기관장과 공기업, 공공기관 인사 공백), 대통령 손발들의 잇따른 항명(진영 장관 사퇴, 윤석열 특별수사팀장의 외압 폭로), 무엇보다 정책 드라이브가 걸리지 않는 점(세제개편안 후퇴, 기초노령연금 수정)은 권력누수의 3박자 요건을 모두 충족한다. 특히 청와대는 새누리당을 잘 이끌고 잘 통제하고 있다고 봐 왔지만 실상은 그동안 당이 알아서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임기 첫해 첫 정기국회가 마치 야당의 독무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이제 여당이 더 이상 BH(청와대)의 수렴청정을 원하지 않는다는 복선으로 읽힌다. 시키는 대로 하지도 않을 것이고, 알아서 기는 일도 없을 것이란 일종의 마이웨이 선언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TK(대구·경북) 한 재선 의원은 “여권의 국감은 피감기관장 호통 치는데 혈안이 될 것이 아니라 테마를 잡고 정부의 국정 방향을 안내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해야 하는데 지금은 의원 한 명 한 명이 각개격파 식으로 제 팔 제가 흔들기를 하고 있다. 저마다 공명심에 휩싸여 있다”며 “상임위 안에서 청와대가 공격을 받아도 엄호하는 이들이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분위기를 보면 박 대통령으로선 여의도에 진짜 측근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TK는 박 대통령의 고향(대구)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구미)인 까닭에 그 아쉬움이 더 진하게 배어있는 듯했다.
정치권 정보와 동향을 파악하는 한 기관 관계자는 이런 이야기를 흘렸다. 10월 중순 새누리당 내부에서 정부의 주요 인사는 대선 때 힘을 합쳐 집권에 노력한 분으로 임명하자는 목소리가 나온 것을 두고서다. 그는 “논공행상을 통한 대선 공신의 낙하산 임명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것은 이 정부 인사에 불만이 대단히 크다는 것의 방증”이라며 “낙하산은 없다고 밝힌 박 대통령에 대한 집단 항명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했다.
다른 정보 수집 기관 관계자는 “공석인 감사원장, 검찰총장 두 권력기관장 인선이 늦어지는 것을 두고 공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란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실상은 그런 자리 싫다며 손사래 치는 경우가 많아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가까이 이명박 정부만 봐도 일 중독자 후보군이 그렇게 많아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번 정부는 그와는 정반대”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일각에선 이번 감사원장, 검찰총장 인사까지 낙마자가 나타날 땐 인사 후폭풍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일 가능성도 점친다. 이래저래 박 대통령으로선 사면초가인 것이다.
레임덕 징후가 실제 레임덕으로 발현하는 것도 시간문제란 시각도 존재한다.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가 보궐선거로 당에 들어오면 ‘친서(親徐)’와 ‘친김무성’으로 당이 양분될 것이란 관측 때문이다. 서 전 대표에게도 김 의원에게도 줄을 대기가 어려운 의원들 사이에선 제3세력이란 대안을 마련하든가, 지역별 분화로 동네 대표를 빚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도권, 부산울산경남, 대구·경북, 충청+강원권’으로 당 질서가 재편될 것이란 이야기다.
또 다른 여권 관계자는 “이인제 의원이 만든 ‘통일모임’에 당 중진들이 대거 참여한 점, 충청권이 호남권보다 인구에서 앞섰다며 선거구제 개편 논의를 촉발한 점 등도 보면 충청을 먹는 중진이 당권이든 대권이든 앞선다고 판단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충청이 명실공히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 캐스팅 보트 지역으로 다시 거듭나고 있다”고 했다. 송광호, 정우택, 이인제, 윤진식, 이명수, 홍문표 등 충청권의 재선 이상급이 ‘우선주’가 된다는 이야기다.
이번 정부의 ‘레임덕 징후’를 언론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조선·중앙·동아>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이 박 대통령에 대한 칭송에서 비판으로 어조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내년 종합편성채널 재심사를 두고 거대 보수 언론의 압박과 회유가 레임덕을 부채질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선우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