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오석 부총리가 10월 2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경제5단체장들과의 간담회를 열고 투자·고용 확대를 주문했다. 연합뉴스
삼성그룹은 올해 초 46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가 지난 5월 53조 원으로 투자 규모를 확대했다고 밝혔다. 반도체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부문을 중심으로 연말까지 1조∼2조 원을 더 투자해 최대 55조 원 투자가 예상된다고 전했다. SK그룹은 일자리 확대에 집중해 올해 7700명 고용목표를 2∼3% 넘길 것이라고 밝혔다. 포스코도 올해 투자목표 8조 5000억 원에서 3분기까지 76%인 6조 7000억 원을 집행했고, 4분기에 투자를 늘리는 방안으로 전체 투자액을 8조 9000억 원까지 키우기로 했다.
그런데도 기업 전반적으론 “정부가 투자환경을 만들어주지도 않고 압박만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한 대기업 임원은 “정부는 현재 경제지표만 보고 경기가 회복기에 들어섰다고 판단하는 것 같지만, 실물 쪽에선 일부 기업을 제외하곤 국제경기나 내수가 부진해 경영실적이 나쁜 상황”이라며 “정부가 경제상황이나 기업들의 사정을 너무 안이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냈다.
대기업들은 경제 여건에 더해 정부 측에 규제완화를 주문하고 있다. 30대 기업 사장단은 윤 장관과의 간담회에서 한 목소리를 냈다.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은 “상반기에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들이 많이 통과됐고 지금도 많은 법안이 대기 중인데 경제민주화 관련 입법은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기업들이 투자, 일자리 창출, 경제 활력 회복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문을 열었다.
환경 관련 기업 규제, 통상임금과 근로시간 단축 등 노동 관련 현안, 산업단지와 택지개발지구 사이에 걸쳐 있는 공장부지 문제 해소, 부동산 시장 활성화 대책, 조선업 대출지원 문제, 연구개발(R&D) 관련 세제혜택 연장 요구까지 나왔다.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에 따른 비용부담을 거론하며 요금체제 재검토를 주문하기도 했다. 결국 “규제를 풀어줘야 투자에 나서겠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기업들의 투자 여력이 큰 데도 투자에 미온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10월 31일 국회 정무위원회 송호창 무소속 의원은 국무조정실 종합국감에서 “기업들이 투자심리가 살아나지 않는 것을 각종 규제 때문이라고 하는데 대기업 금고에는 현금이 쌓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송 의원은 “10대 그룹이 쌓아둔 현금은 올해 6월 말 현재 58조 5791억 원으로 지난해 말의 49조 5622억 원보다 8조 9000억 원 폭증했다”면서 “현금은 쌓여가고 있는데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과연 대기업들이 투자를 안 하는 것일까, 못하는 것일까. 시장에선 기업들의 투자 여력에 대해 30대 그룹 간에도 양극화가 나타나 일률적인 평가를 하기가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기업이라고 해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일부 상위 기업들은 업황이 나아 투자 여력이 크지만, 11~30위권 대기업들은 유동성 부족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31일 금융안정보고서를 통해 경기 부진과 수익성 악화 등으로 일부 대기업들의 유동성 위험이 잠재해있다고 진단했다. 부채비율이 200% 이상인 부채과다기업 중 적자를 내고 있는 기업의 비중이 절반을 넘는 55%에 달해 상당수 부채과다기업의 수익성이 부진하다는 것이다. 한은은 또 국내 은행들이 대기업 대출 태도를 강화하고 있는 데다 비우량 기업의 회사채 발행 여건이 악화되고 있어 이들 대기업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상위 10대 기업과 여타 기업 간 양극화도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은 “상위 10대 기업의 매출액영업이익률은 2012년 상반기 6.8%에서 2013년 상반기 7.8%로 큰 폭 상승한 반면, 이를 제외한 여타 기업은 5.1%에서 4.7%로 하락했다”고 설명했다. 한은은 “현금흐름보상비율(영업활동에 의해 창출된 현금흐름으로 단기차입금 상환과 이자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여력)도 상위 10대 기업은 170% 수준으로 상승한 반면 여타 기업은 30% 미만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기업 설비투자 부진에 따른 경쟁력 저하 우려도 제기됐다. 한은은 “국내 투자가 2011년 이후 마이너스 성장세를 지속하면서 GDP 대비 비중도 2009년 상반기 27%에서 2013년 상반기 24%로 하락했다”며 “기업의 현금성 자산 비중이 2013년 상반기에 2009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남은 2개월 동안 정부가 원하는 만큼 기업들의 투자와 고용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는 박근혜 정부 첫해 성과와 직결되는 까닭에서다.
박웅채 언론인
사장들 회의 때문에 회장들이 기다렸다
지난 10월 29일 오전 7시 30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선 진풍경이 벌어졌다. 호텔 2층에선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30대 그룹 기획총괄 사장단의 간담회가, 36층에선 서울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가 열렸다. 언론의 관심은 정부의 투자 주문과 기업들의 애로 건의가 이뤄진 30대 그룹 간담회로 쏠렸다. 이 바람에 서울상의 회장단 회의는 당초 예정보다 20분 늦게 열렸다. 언론사 취재단이 2층에서 먼저 ‘일’을 마친 뒤에야 36층으로 올라온 것이다. 2층에 모인 기업인들은 사장급이었다. 이상훈 삼성전자 사장, 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 차화엽 SK종합화학 사장, 조석제 LG화학 사장 등이 참석했다.
반면 36층 서울상의 회장단 회의에는 박용만 회장(두산그룹 회장)을 필두로, 강호문 삼성전자 부회장, 김반석 LG화학 부회장, 김영대 대성산업 회장, 김윤 대림산업 부회장, 김희용 동양물산기업 회장, 서민석 동일방직 회장, 신박제 엔엑스피반도체 회장, 우석형 신도리코 회장, 이인원 롯데그룹 정책본부 부회장 등 총수거나 ‘실세 부회장’들이다. 이를 지켜본 한 대기업 관계자는 “회장들이 사장들 때문에 순서를 기다린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고 전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