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사진공동취재단
전자는 업계의 극심한 불황 여파를 대변하고 후자는 이를 기회로 사업 확장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으로 상반돼 보이는 이 두 가지 소식에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공통된 의도가 숨어 있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바로 ‘동생과 사별한 제수씨 회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한진해운의 유동성 위기가 자칫 그룹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지원키로 결정했다는 것이 대한항공 측 설명이다. 그러나 지원 결정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증권가와 신용평가기관은 일제히 대한항공의 신용도와 주주가치에 부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수천억 원에 달하는 추가 지원 가능성도 열려 있어 재무구조가 취약한 대한항공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대한항공 관계자는 “한진해운을 지원하는 데 재정적인 문제는 전혀 없다”며 “그만한 능력도 없이 지원을 결정하겠느냐”고 반박했다.
대한항공이 지원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한진해운이 잘못될 경우 조양호 회장의 ‘육·해·공 물류기업’의 꿈이 와해되기 때문이다. 다만 국가 기간산업으로 인정받는 해운업을 살리는 데 금융권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한 대기업 임원은 “최근 동양 사태 때문에 궁지에 몰린 금융권이 직접 나서지는 못한 채 조 회장 측에 지원을 요구한 것일 수 있다”며 “국가 기간산업으로서 정부와 금융권에서도 한진해운이 무너지게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나면 금융권이 움직이지 않겠느냐”면서 “여의치 않으면 추가 지원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제수씨인 최은영 한진해운홀딩스 회장.사진공동취재단
그동안 한진해운이 계열분리를 요구해온 것과 달리 조 회장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계열분리를 허락하지 않아 ‘조 회장이 사실은 계열분리를 원치 않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끊이지 않았다. 이제 한진해운 주식을 담보로 잡은 이상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은 더는 계열분리를 요구할 수 없게 됐다.
재계 한 인사는 “주식 담보가 포인트”라면서 “조 회장이 훗날 이 지분을 바로 취득할 수도 있으며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한진그룹이 한진해운을 아예 지주회사의 자회사로 묶어둘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조 회장은 계열분리를 하지 않아도 될 명분을 얻은 것으로서 오히려 고마운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한항공 관계자는 “1500억 원을 담보 없이 그냥 빌려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면서 “이번 지원 결정은 계열분리 문제와 절대 무관할 뿐 아니라 회사의 생존 문제가 걸린 마당에 계열분리 문제가 불거지는 것도 의미 없다”고 강조했다.
현대글로비스의 공격적 사업 확장 역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제수씨 회사’인 현대상선 관련 있는 모습으로도 비치고 있다. 조양호 회장처럼 손에 쥐고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이미 현대상선의 주요주주인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과 손을 잡는다면 현대상선은 정 회장의 ‘사정권’ 안에 들어온다고 할 수 있다. 현대상선은 게다가 최근 회사채신속인수제를 신청하며 현대엘리베이터가 보유 중인 지분 5%를 산업은행에 담보로 제공했다. 현대상선이 만약 빚을 제때 갚지 못하면 이 지분은 현대그룹 경영권의 향방을 가를 수도 있다(<일요신문> 1120호 보도).
이런 상황에서 현대글로비스는 지난 10월 23일 2020년 글로벌 일류 선사의 비전을 밝혔다. 이를 위해 자동차운반선은 현재 50여 척에서 100척으로, 벌크선은 100척에서 400척으로 늘린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해운업 불황기에 이 같은 공격적 확장 선언은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최근 현대글로비스는 구조조정에 시달리고 있는 STX팬오션의 전직 임직원들을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STX 출신 한 인사는 “최근 STX팬오션 출신 사람들이 현대글로비스로 많이 갔다”며 “국내 벌크선업계 1위인 STX팬오션의 어려움을 틈타 공격 경영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를 바라보는 해운업계 전체의 시선은 따갑다. 여러 해운사가 쓰러질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현대·기아차(자동차운반)와 현대제철(벌크)이라는 강력한 우군을 두고 있는 현대글로비스가 사업을 확장한다면 국내 해운업계가 자칫 더 큰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특히 2014년이면 현대·기아차가 유코카캐리어와 맺은 수출물량 의무할당계약이 끝나는 데다 현대제철 역시 당진 3고로 준공과 현대하이스코 냉연강판사업 인수 등으로 확장을 추진하고 있어 자동차운반과 벌크 쪽에서 물량이 쏟아질 예정이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현대글로비스는 현재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31.88%의 지분을 보유해 최대주주로 올라서 있다. 그 뒤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11.51%), 현대차(4.88%)가 잇고 있다. 이 같은 지분구조 때문에 현대글로비스는 현대차그룹 오너 일가 회사이자 후계승계의 핵심으로 늘 거론돼 왔다. 회사가 성장하면 주가가 폭등하고 그만큼 오너들의 보유 지분 가치가 상승하며 이것이 후계승계에 필요한 자금과 지분으로 활용된다는, 전형적인 후계승계 시나리오에 딱 들어맞는 회사가 현대글로비스라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 온 것이다.
글로비스를 앞세운 현대차그룹의 해운업 폭풍성장과 공격경영은 정몽구 회장의 제수씨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게 위협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룹의 주력이지만 경영난에 허덕이고 지배구조의 핵이지만 경영권 분쟁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대상선에 기대고 있는 현정은 회장으로서는 현대글로비스의 성장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현 회장은 현대상선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그러나 실제로는 현대상선이 담당하던 현대오일뱅크 원유 수송이 지난해 말 현대글로비스로 넘어가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28일 현대오일뱅크는 기존 파트너인 현대상선을 버리고 현대글로비스와 10년간(2014년 7월~2024년 6월) 원유를 수송하는 장기운송계약을 체결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와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현대상선 포위 전략에 시동을 건 것 아니냐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상선 지분 20%를 넘게 보유하고 있으며 현대오일뱅크는 현대중공업 계열사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이 그동안 경영권을 위협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상선 경영권이 흔들릴 우려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진·현대차 그룹의 최근 행보와 관련해 당사자인 현대글로비스나 대한항공이나 모두 “확대해석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이 ‘제수씨 회사’라는 점에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계속 오르내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